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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경제/중국의 부호

손수화(孫樹華): 하남최고부호의 성장과 붕괴

by 중은우시 2007. 6. 25.

글: 장목목(張木木)

 

흑룡강에서, 손수화라는 이름을 들어보지 못한 사람은 거의 없다. 그러나, 이 낯선 땅에서 하남최고부호의 휘황한 인생은 그 마침표를 찍었다. 2007년 6월 1일, 23시경, 손수화는 흑룡강성 하얼빈시 남항구 "복순천천대주점"에서 사기대출혐의로 체포되었다. 경찰에 의하면, 그는 당시 인터넷을 하고 있었다고 한다. 중원의 전설적인 부호는 이로써 그 전설의 끝을 고하였다.

 

이때까지 손수화는 사기대출로 이룩한 재부제국(財富帝國)을 사람들의 앞에 보여주었는데, 진정 놀라운 것은 그 속도와 규모였다. 한 보통 농민이 어떻게 하여 10년만에 <<포브스>>에 이름을 올리는 부호로 성장했을까? 그가 지배하던 화림집단(華林集團)은 또 어떻게 2년만에 총자산 2억위안(한화 약 260억)에서 47억위안(한화 약6000억)의 규모로 확장할 수 있었을까?

 

탄생

 

1983년, 손수화는 19세때 이미 자신의 창업역사를 시작한다. 폐품수집이었다. 그러나, 그를 진정 "하남최고부호"로 만든 중요한 전환점은 1992년에 일어난다. 이 해에 그는 자기의 수중에 지니고 있는 돈과 여기저기서 끌어모은 돈 90만여위안의 돈을 가지고 지방정부와 합작하여 소규모의 농업용비닐공장을 만든다.

 

이보다 1년전에, 손수화는 인생에서 첫번째 목돈을 만지게 되는데, 그것은 바로 하남성 주구시(周口市) 회양현(淮陽縣)의 공상은행에서 총금액 20만위안을 대출받은 것이다. 이 기간동안 회양현 공상은행의 행장인 장학재(張學財)는 그를 많이 도와 주었다. 그러나, 장학재에 의하면 그는 손수화와 그리 잘 알지는 못한다고 했다. 그가 도와 준 것은 손수화가 당시 이 은행의 대출담당자를 통하여 몰래 대출을 일으켰는데, 이것을 발견하고도 장학재는 그 대출담당자를 비호해 줌으로써, 간접적으로 손수화를 도와준 것이었다.

 

5년간 열심히 사업을 하여, 1997년에 이 농업비닐공장은 1200만위안의 자산가치를 보유하게 되었다. 그러자 손수화는 이 공장을 기초로 "회양호광소료유한공사"를 설립한다. 이 공장은 바로 화림집단의 가장 기본되는 자산이다. 이후 1년간 하늘은 다시 손수화를 크게 도와주었다. 1998년 홍수가 나고난 후의 복구사업에서 그가 생산한 하우스용 비닐의 수요가 크게 늘어났다. 그는 이 기회를 잡아서 북방에서 최대인 하우스용 비닐공장인 회양현화림소료봉포유한공사를 설립한다. 이때 손수화의 재부제국인 화림집단의 서막이 열린 것이다.

 

장사는 갈수록 커졌다. 회양화양무역유한공사, 회양토공막유한공사, 정주복림소화유한공사가 몇년내에 계속 설립되었다. 2000년이 되어, 손수화는 이 기업들을 기초로 "화림집단"을 만들었는데, 총자산이 16.5억위안이었다.

 

8년간의 창업단계가 지나고, 손수화가 지배하는 화림집단은 외부사람들이 자세히 알아보지 못할 만큼 미친듯이 확장해나갔다. 2000년 4월, 국가의 중점공사인 "연산10만톤PE파이프프로젝트"를 낙찰받았다. 이것은 확장의 시작이었다. 2002년 8월, 이 프로젝트는 회양에서 시작되고 총투자 12.5억위안이 소요되었다. 이리하여 아시아 최대의 PE파이프생산기업이 설립된 것이며, 이것은 손수화의 사업에 하나의 중요한 전환점이었다.

 

계약에 따라, 화림집단은 70%를 출자하고, 안채집단(安彩集團)이 30%를 출자했다. 그러나, 두 집단은 합작을 시작한지 8개월도 되지 않아 헤어지게 된다. 안채집단의 전 총경리인 이유은(李留恩)은 당시의 시비곡직을 이렇게 얘기한다.

 

2002년초, 성인민대표대회기간중에 성농업은행의 한 책임자가 이유은을 만나서, 이유은에게 이 프로젝트를 소개했다고 한다. 이 책임자는 자금측면에서는 은행에서 전부 기업에 대출해 줄 것이니, 화림과 안채가 합자하는 형식을 취하면 좋겠다고 하였다.

 

이 책임자가 다리를 놓아주어서, 안채집단의 총경리인 이유은은 대표단을 이끌고 네덜란드, 독일등을 시찰하고, 화림집단의 실력에 대하여도 조사해 보았다. "최종적으로 이것은 좋은 프로젝트라는 결론을 내리고, 발전여지가 많다고 생각했다" 이후 화림과 손을 잡고 PE파이프분야에 진출하기로 하였다. 안채는 3000만위안의 등록자본금과 4000만위안의 운영자본금을 출자했다.

 

그러나, 합작과정에서, 손수화와 화림집단의 각종 문제가 드러났다. "화림집단의 내부관리는 아주 혼란스러웠습니다. 순수한 가족경영체제였습니다. 일체는 모두 그들 가족들이 한 마디 하면 끝나는 것입니다. 기본적으로 시장원칙에 따라 일을 처리하지 않았습니다. 손수화도 진정으로 기업을 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없었습니다" 이런 상황을 본 후에, 안채집단은 과감하게 합자에서 빠지기로 결정했고, 계약을 해지했다. 화림에 3000만위안의 등록자본금을 반환해달라고 요구했다.

 

이유은이 생각하지 못했던 것은, 손수화는 안채의 인감을 위조하고, 이유은의 서명을 모방하여 허위서류를 만들었던 것이다. "사람들이 보게 되는 후기의 계약이나 문건에 나오는 안채의 서명이나 도장은 전부 손수화가 위조한 것입니다"

 

이후 화림집단은 다시 많은 국가급, 성급 혹은 시급의 대형프로젝트에 손을 들이민다. 주구 상수에 위치한 리튬건전지프로젝트(1기공사의 예상투자금액 2.7억위안), 남양천지애의 축전발전소프로젝트(예상투자금액 72억위안), 25만수방직프로젝트(예상투자금액 8.6억위안), 하얼빈 삼환로 공사(예상투자금액 65억위안), 송화강사랍대교, 주구-상구고속도로(예상투자금액 21.6억위안), 주구곤붕외국어완전중학(예상투자금액 3.5억위안), 신향-장원고속도로....업종도 교통, 에너지, 도로교량, 교육, 화공, 방직등 각종 분야에 미치었다. 주로 인프라산업위주였다.

 

2002년-2005년동안 화림집단은 전국각지에 설립한 각종 회사가 15개이상에 이르렀고, 대외에 공포한 총조산은 급속히 성장하여 2002년 16.5억위안, 2003년 33억위안, 2004년 43.7억위안에 달하였다. 바로 2004년 이행 손수화는 <<포브스>>중국부호방에 이름을 올렸고, 손수화와 그가 지배하는 화림집단은 이때가 최전성기였다.

 

사기대출

 

2002년-2005년에 급속히 성장한 배경에는, 이 기업의 대출이 빠른 속도로 증가한 점이 있다. 대출총액이 40억위안에 달하였다. 그러나, 화림집단이 대외에 공포한 자료에는 26억위안으로 기록되어 있었다.

 

40억위안의 대출에는 포동발전은행 정주분행 금수지행의 2억위안, 중신실업은행 정주분행 문화로지행의 1.3억위안, 광동발전은행 정주분행의 1억여위안, 농업은행계통의 20억여위안이 있는데, 그중 농업은행 주구분행으로부터의 대출이 8.9억위안이다.

 

내부를 잘 아는 사람에 의하면 손수화의 대출금중 상대적으로 큰 금액은 농업은행계통인데, 이것은 손수화 본인이 농업은행계통과 보통관계가 아니기 때문이라고 한다. 화림집단에는 융자부가 있는데, 이 부서의 직원은 모두 현지 농업은행에서 근무하던 사람들이다. "화림집단과 관련한 대출신청은 금액이 얼마이든간에, 각 부서에서 모두 무사통과시켰고, 이것은 농업은행계통에서는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 되어 버렸다" 농업은행 내부인사의 말이다.

 

2002년 1월, 화림집단의 자회사인 안채화림은 영업허가증도 취득하지 않고, 농업은행 회양현지행에 년산 10만톤의 급수용 PE파이프프로젝트건설자금 4.5억위안을 신청했다. 4개월여후, 즉, 2002년 5월 17일, "대출금액이 이미 화림에 입금되었다" 그러나, 그해 6월 18일이 되어서야 이 회사가 설립되었고, 이해 9월 27일이 되어서야 이 프로젝트에 대한 중앙정부의 인허가를 최종취득하게 되었다.

 

손수화는 관계를 맺는데는 아주 통이 컸다. 화림집단은 주구시분행행장인 동학지의 운전기사인 진봉의 구좌에 한꺼번에 700만위안을 입금시켰다고 한다.

 

손수화의 사기대출수단과 경로는 그다지 뛰어난 수단을 쓴 것이 아니었다. "그는 간이 컸다" 그의 핵심적인 사기대출수단은 중복담보제공방식이었다.

 

2004년, 화림집단은 이미 농업은행 회양현지행에 3필지의 토지를 저당잡혔는데, 포동발전은행 정주시분행에 이중저당제공하여 8600만위안을 대출받았고, 2005년 3월, 안채화림이 4.5억위안의 대출프로젝트에 대한 보충저당계약에서, 다시 중신은행정주분행에 2필지의 토지사용권을 저당잡힌 토지를 다시 농업은행 회양현지행에 중복저당잡혔다. 이 두 필지토지의 토지사용증은 모두 허위문서였다.

 

"은행이 아마도 절차를 무시했던 것같습니다. 화림집단의 토지저당대출등기는 회양현국토자원국이 처리했습니다" 주구시 토지국의 한 공무원이 이렇게 말했다. 토지가 중복저당된 포통발전은행 정주시분행의 행장은 바로 농업은행에서 옮겨온 사람이었다.

 

은행대출자료에 의하면, 화림집단과 그 관련기업 및 손수화 개인은 하남회양, 상수의 두개 현에 20여필지의 토지사용권을 가지고 있고, 면적은 9400무에 달한다.

 

20여필지의 토지중에서 7필지 면적 합계4207무의 토지는 장기간 사용하지 않고 있어, 이미 현지정부에 의하여 회수되었다. 화림집단은 현재 3필지 합계 1075무의 토지사용권을 보유하고 있는데, 손수화 본인의 명의하에는 아무런 토지도 없다. 나머지 10여필지의 토지는, 모두 법규위반의 혐의가 있고, 토지사용권을 변조하거나 중복사용한 것들이다.

 

이외에 대규모프로젝트를 낙찰받아 은행대출은 받는 것도, 화림집단의 사기대출수단의 하나였다. 이런 거액의 대출금이 어디로 흘러갔는지도 하나의 수수께끼이다. 그러나, 화림집단의 생산으로 보면, 대출금이 생산이나 공사에 사용되었다는 흔적은 찾아볼 수 없다. 주업인 비닐과 PE파이프등 산업을 제외하고, 화림집단이 낙찰받은 총금액 200억위안의 국가 및 성급 중점공사프로젝트는 근 2년동안 거의 방치되거나 보류되어 있다.

 

붕괴

 

화림집단의 원래 계획에 의하면, 4,5년내에 자산규모가 300억위안으로 팽창하는 것이다. 그후에 상장하고, 산업다원화된 기업으로 탄생하는 것이다. 이러한 장기계획은 신기루와 같은 것이다.

 

2004년 4월, 국가는 관련정책을 내서, 은행은 대출에 있어 긴축하게 되었다. 화림집단같이 은행대출에 의지하여 지탱하는 방식은 막히게 된 것이다. 화림집단은 금방 어려움에 처했다. 냄새를 맡은 은행은 속속 화림집단으로 몰려와서, 이미 기한도래하거나 기한미도래한 채권을 회수하고자 했다.

 

손수화는 온갖 방법을 써서 막으려고 했고, 반년동안 5.7억위안의 대출금을 상환했다. 현지정부도 6000만위안의 대출금상환을 도와주어, 정부가 기업의 대출금상환을 도와주는 선례를 남겼다.

 

2005년 년말 은행의 채권회수바람이 지나간 후, 화림집단의 자회사는 3개로 줄어들었다. 남은 것은 하남화림화학건재유한공사, 화림소료봉포유한공사, 삼원화공주식유한공사였다. 이외에 국가합작PE검사실험실이 남아 있었다.

 

더욱 심한 것은 이 3개의 자회사중에서 2개는 이미 생산중단 또는 반중단상태였고, 유일하게 정상영업하는 곳은 화림건재 하나였다.

 

2007년 3월 하순, 화림집단은 주구시중급인민법원에 파산신청을 제출했다. 이것으 화림집단에 남아 있는 3개기업이 이미 파산절차에 들어갔다는 것을 의미한다.

 

믿을만한 자료에 의하면, 2005년 8월말까지, 화림집단 및 그의 9개 계열회사는 11개금융기관에 개설한 50여개 구좌에 겨우 합계 40.8만위안의 잔액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는 것이다.

 

"19.3억위안의 부채총액이 있는데, 그중 은행으로부터의 대출이 13.6억위안입니다. 이 사건은 아마도 하남기업계에서 지금까지 금액이 가장 큰 파산사건이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