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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경제/중국의 부호

양국강(楊國强) : 가장 촌스러운 중국최고부호

by 중은우시 2007. 6. 1.

십여년간 '잠복'해 있던 순덕지산(順德地産)의 오너 양국강이 더 이상 몸을 감출데가 없어지면서 수면위로 떠올랐다.

 

2007년 4월 20일 오전 10시, 홍콩거래소내에서 "벽계원(碧桂園)"은 고삐풀린 야생마처럼 상장후 짧은 2분만에 주당 5.38홍콩달러에서 7.21홍콩달러로 가격이 치솟았다. 일일 최고가는 7.35홍콩달러였고, 상장가격에서 37%나 올랐으며, 거래량은 1,004,020,000주에 이르렀다. 거래금액도 72.26억홍콩달러였으며, 이날 홍콩거래소에서 보통주로 거래량이 1위를 차지했다.

 

만일 종가인 주당 7.27홍콩달러로 계산하면, 95.2억주를 보유한 벽계원주식회사의 양혜연(楊惠姸, 양국강의 딸. 가족주식대표보유인)의 당일 재산총액은 692.104억홍콩달러에 달하였다. 같은 날 이전까지 최고부자였던 장인(張茵)의 산하에 있는 구룡지업의 시가총액은 682.39억달러로, 지분비율이 72%인 장인의 재산총액은 491.32억홍콩달러였다. 이것은 벽계원의 실제소유자인 양국강의 개인재산이 장인보다 1/3정도 더 많다는 것을 의미한다. 명실상부한 중국의 최고부자가 된 것이다.

 

정뢰, 진천교, 황광유, 장인등 역대 최고부자와 비교하여, 양국강은 아마도 가장 촌스러운 중국최고부자일 것이다.

 

먼저 소개할 것은 양국강의 토생토장의 경력이다.

 

황광유와 마찬가지로, 양국강도 남방 농촌의 가난한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양국강이 태어날 때, 위로는 이미 두 명의 누나와 3명의 형이 있었다. 여러해 후, 그의 셋째형인 양국광(이 사람은 가족중 학력이 가장 높다고 볼 수 있다)은 <<벽계원보>>에 연재의 방식으로 가족백년사를 소개한 적이 있다. 그는 이렇게 전가족이 양국강의 출생을 바라보는 걱정스러운 마음을 나타낸 바 있다. "동생의 출생은 이 가난한 가족에 기쁨을 더해주지는 못했다. 그것은 집안에 또 하나의 채워야하는 입이 생겼다는 것을 의미했다..."

 

가세가 빈한했으므로, 양국강은 17세전에는 신발을 신어본 적이 없다. 양국강은 어려서 집에서 소를 기르고, 농사를 지었다. 조금 큰 후에는 외지로 나가서 콘크리트공이 되었다. 큰형 양국화가 당시 순덕현 제2건축회사의 책임자로 있었으므로, 양국강은 그 보살핌을 받아, 북교(北滘)공사의 시공노동자로 취직했다. 6년후, 다시 건축대대장이 되었다. 1989년, 35세의 양국강은 비로서 정식으로 자신의 사업을 시작한다. 즉, 북교진건축공정공사의 법정대표자 겸 사장이 된 것이다.

 

다른 사람의 눈에는, 양국강이 촌스럽게 느껴질 것이다. 그는 몸매도 바싹 마르고, 피부는 까무잡잡하고, 발에는 찍찍 소리나는 슬리퍼를 신고 있고, 양복은 항상 치수가 하나 큰 것같았다. 그리고 회의시에는 신발을 벗고 양반다리로 앉았다. 농민의 습관을 전혀 버리지 못했다. 그가 평소 타는 것은 중국산 폭스바겐 차이고, 생활은 아주 검소하다. 드러내기를 좋아하지 않는다. 어떤 때에는 자기의 부동산프로젝트의 분양사무소에 앉아있는데, 모르는 사람은 잘못 찾아온 농민쯤으로 치부한다.

 

그런데, 이 기간동안 양국강은 인생최대의 악운을 겪는다. 큰딸이 계속 열이 났지만, 봉급이 적었던 그는 치료받을 돈이 없었다. 그래서 딸의 IQ에 영향을 주게 될 정도가 된다. 어려서부터 가난하게 살아, 치료할 돈이 없었다는 점에 자극받은 것이 아마도 그가 돈을 벌려고 하게 된 가장 직접적이고 원시적인 동력이 아니었을까.

 

그러나, 황광유는 어려서부터 천하를 누볐던 것과 달리, 양국강은 수십년동안 시골구석에서 붙어 있었고, 순덕이라는 곳에 뿌리를 박았다.

 

다음으로, 양국강과 현지정부의 물과 물고기같은 정경결합을 살펴보자.

 

홍콩거래소내에 양국강의 곁에 서 있는 사람은 그를 따라온 고향의 '관리'들이었다. 그들은 벽계원이 시가총액 최대의 중국내부동산기업이 되는 것을 감격적으로바라보았다. 이들 관리들은 양국강과 벽계원을 칭찬했다. "순덕의 자랑이고, 불산의 자랑이며, 불산 제3산업발전의 자랑입니다"

 

중국민영기업발전역사를 잘 아는 사람들은 모두 알 것이다. "자기의 기업이 신속하고 안전하게 성장하게 하려면, 지방정부와 관리의 지원이 없이는 아주 어렵다는 것을. 이런 지지는 앞으로 지지하는 경우도 있고, 뒤로 지지하는 경우도 있다. 앞으로 지원하는 것은 광명정대하고 법률과 정책에 부합하는 지원이다. 뒤로 지원하는 것은 관청과 상인의 숨은규칙의 지배하에, 법률과 정책의 가장자리를 맴도는 것이다.

 

양국강의 초기 창업사를 잘 분석해보면, 우리는 분명하게 이런 정격유착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먼저, 그가 돈을 번 것은 바로 자기가 정부부서에서 '고위층'인 형님 양국화가 있었따. 큰형이 돌보아주었기 때문에, 그는 회사내에서 일취월장하고, 직위도 빠르게 올라갔고, 금방 건축공정회사의 사장이 되었다. 바로 이 직위에서 양국강은 수백만위안의 인생 첫번째 목돈을 만지게 되는 것이다. 둘째, 사장을 맡고난 4년후에, 즉 1993년, 양국강은 그의 파트너인 양이주(楊貳珠)와 함께 3,395만위안의 거액자금을 내서 북교건축공정공사에 대하여 MBO(경영진에 의함 기업인수)를 하고 양국강은 이후로 "보스양"이 되었다.

 

이것은 아마도 중국에서 최초의 MBO사례일 것이다. 그리고 그후, 바람처럼 일어난 MBO는 계속 논쟁의 촛점이 되었다. 그리고 정부에서 직접 중단하겠다고 하게 된다. 양국강이 순조롭게 국유기업을 사영화할 수 있었던 것은 현지정부관리의 적극적인 지지가 있었던 것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당시 북교진의 당서기인 구상현은 바로 "보스양"이 출현할 수 있도록 도와준 귀인중의 한 명이다. 순덕에서 지방관리를 지낸 사람은 거의 예외없이 양국강에게 각종 편리를 보아주었다. 이런 밀접한 정경유착은 쌍방에 이익을 가져다 주었다.

 

정경유착은 중국업계의 특색이다. 이것은 뭐 이상할 것도 없다. 그러나, 양국강은 역대 지방정부관리와 수십년을 하루같이 밀접하게 협력했다. 한번도 틈이 벌어지거나, 모순이나 분쟁이 발생한 적이 없다. 이것은 정말 이상하게 느껴질 정도이다.

 

만일 순덕에 와서 과룡(科龍)을 인수한 고추군(顧雛軍)을 "과강룡(過江龍)"이라고 한다면, 양국강은 의문의 여지없는 지두사(地頭蛇)이다. "지두사"는 역시 '과강룡'보다 훨씬 질긴 생명력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이렇게 비유한다. 만일 만과(萬科)가 스타벅스라면, 벽계원은 왕노길(王老吉)이라고.

 

양국강의 머리속에 친족개념은 뿌리가 깊다.

 

양국강은 딸 셋과 4살된 양자 하나가 있다. 큰딸은 병으로 저능아가 되었고, 막내딸 양자형(楊子瑩)은 미국에서 공부하고 있다. 25살된 둘째딸 양혜연이 자연히 후계자로 떠올랐다. 양혜연이 아직 10여세의 중학생일 때, 양국강은 그녀를 데리고 회사내의 중요한 회의에 참석했었다. 나중에 그녀를 미국에 유학보내고, 오하이오주립대학의 시장마케팅 및 물류전공으로 학사학위를 받았다. 2005년, 양혜연은 귀국후 벽계원에 들어왔으며, 구매부장을 맡았다. 현재 벽계원그룹의 최대주주이다.

 

2006년말, 양국강은 양혜연의 결혼식을 벽계원대주점에서 성대하게 치러준 바 있다. 신랑은 청화대학을 졸업하고 미국유학한 경력이 있고, 부친은 동북지방 어느 성의 부청장급 간부이다. 결혼식에 참석했던 사람에 의하면 양국강은 딸의 이 결혼에 대하여 아주 체면이 서는 것으로 생각하고 만족해한다는 것이었다.

 

양씨가족은 현지의 명문가이다. 양국강만 하더라도 형제자매가 8명이다. 가족이 많고, 친척도 많다. 그는 재산형성과정에서 '귀인'의 도움을 많이 받았는데, 바로 고향친척들이다. 여러해동안 함께한 사업파트너들도 고향친척이다. 양국강은 고향의 자양분을 많이 흡수한 사람이다. 양국강이 돈을 벌고난 후에도 고향친척들을 잊지 않았다. 그는 친척들을 잘 돌봐주고, 능력이 있는 자이면 회사내에 자리를 마련해 주었고, 능력이 모자라면 직접 돈을 주어 도와주었다. 그는 매년 거금을 내서 고향친척들을 위하여 좋은 일을 해왔다.

 

벽계원은 전형적인 가족기업이다. 벽계원의 9명의 상임이사중 최건파(崔健波)를 제외한 나머지 7명은 모두 양국강의 친척이나 친구이다. 그중, 양지성과 양영조는 모두 그의 조카이다. 최건파는 회사총재를 맡기 전에 순덕구 북교진의 진장(鎭長)을 수년간 지냈고, 양국강의 사업이 번성하는데 많은 지원과 도움을 주었다.

 

홍콩상장때, 이런 고향친척관계는 양국강을 크게 도와주었다. 같은 순덕출신인 항기지산(恒基地産)의 이조기(李兆基), 신세계발전(新世界發展)의 정유동(鄭裕)은 각각 10억홍콩달러를 내서 신주를 인수해주었고, 이는 많은 기관투자자들 이 벽계원주식에 관심을 갖게 하였으며, 68만명의 개인투자자들까지 열렬히 벽계원에 관심을 갖게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외부에서 모셔온 직업경영자들에 대하여 양국강은 아주 조심스럽게 대했다. 완전히 권한을 부여하고 믿음을 주지 않았을 뿐아니라, 심지어 자기의 몇몇 조카들을 함께 보내어 그들과 같이 일하게 하였는데, 실제로는 감시역할을 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조종당하는 느낌을 받고 회사를 떠나버렸다.

 

마지막으로 양국강은 호승심이 아주 강한 면이 있다. 동시에 아주 편협하고 고집스러운 점도 있다.

 

비록 공부를 많이 하지는 않았지만, 양국강의 배움에 대한 열망과 능력은 아주 강하다. 그는 '아시아최고부자'인 이가성을 자신의 우상으로 삼고 있다. 자세히 이가성의 전기를 읽었을 뿐아니라, 자주 이가성의 행적을 들어 내부직원들을 격려하곤 한다. 자신이 무슨 좋은 책을 읽게 되면 수십권을 사서 자기의 직원들에게 나누어준다.

 

왕지강의 <<모사재인(謀事在人)>>이라는 책을 통하여, 우리는 일찌기 위기에 처했던 양국강이 어떻게 좋은 사람들을 모셔왔는지 알 수 있다. 1993년, 사업이 순조롭던 양국강은 큰 위기를 맞이한다. 그해 1/4분기와 2/4분기에 철근, 콘크리트와 목재등 건자재가격이 계속 올랐고, 개발상은 거의 붕괴직전에 이르렀다. 이때, 양국강의 건축회사는 이미 원개발상에게 4000여채의 별장을 건축했다. 하반기가 되면서, 중앙에서는 주식시장과 부동산시장의 거품에 대하여 조치를 취하고 투자금액이 억을 넘는 벽계원프로젝트는 돌연사망할 수 있는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급한 와중에 양국강은 무고하게 이 부동산프로젝트를 떠안게 되었고, 시공자에서 개발상으로 바뀌게 되었다.

 

1994년 10월의 어느 날, 마음이 급했던 양국강은 신화사기자인 왕지강을 모셔와서 '유명기자'의 글을 빌어 벽계원프로젝트를 선전하기 시작했다. 협상후 양국강은 왕지강의 아이디어에 설득당했고, 그 자리에서 그를 기획책임자로 모셨다. 왕지강이 제안한 것은 학교를 설립해서 부동산을 분양하는 책략이었다. 이로 인하여 양국강에게는 3억여위안의 교육준비금을 받아올 수 있었을 뿐아니라, 신속히 부동산의 분양을 완료시킬 수 있었다. 이는 '돈과 머리' '중국식과 서양식'이 결합한 성공적인 사례가 되었다.

 

위기를 넘긴 양국강은 왕지강이라는 '공신'과 친밀했던 협력관계를 끝내게 된다. 어떤 사람의 분석에 의하면, 자주독립정신이 강한 양국강은 외부인이 자신의 전과를 함께 누리는 것을 참을 수 없었을 것이라고 본다.

 

광주벽계원이 거대한 성공을 거둔 후, 이어진 화남벽계원에서는 이런 행운이 없었다. 그는 불같은 기세로 일어나는 황문자(黃文仔)의 성하만(星河灣)프로젝트와 곽재문(郭梓文)의 남국올림픽가든프로젝트에 눌려 숨도 못쉬게 되었다. 그리고, 성하만 프로젝트와 남국올림픽가든 프로젝트의 기획자는 바로 양국강이 쫓아낸 왕지강이었다.

 

양국강은 일련의 조정과 조치를 거쳐, 마침내 벽계원봉황성에서 이전의 휘황함을 되찾을 수 있었고, 일일분양금액 7.5억위안의 신화를 창조했다. 승리를 이끈 어느 날, 양국강은 돌연 기분이 좋아져서 남국올림픽가든과 성하만을 찾아갔다. 양국강으니 기세가 올라 황문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어떤 프로젝트는 10여억위안어치를 파는데, 우리 이사들은 한사람 한사람의 재산이 모두 10억위안이다"

 

원래 자기 혼자놀던 양국강이 벽계원이 상장된 이후에는 현대화, 정규화, 투명화와 여러지역에 걸치는 프로젝트를 진행해야 하는 어려움에 부닥쳤다. 이것은 소농의식이 남아있는 양국강에게는 아주 어려운 도전이 될 것이다.

 

그의 촌스러운 방법이 계속 효과를 발휘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