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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민국 후기)

원수(袁殊) : 오중간첩(五重間諜)

by 중은우시 2007. 6. 4.

원수는 1911년 호북 근춘(春)에서 태어났다. 학예(學藝)라고도 부르며 가명은 증달재(曾達齋)이다. 1929년 일본유학을 한다. 귀국후에 "중국좌익문화총동맹"의 상임위원을 지내고, <<문예신문>>을 창간한다. 그는 여러개의 신분을 지니고 있었는데, 군통(軍統), 중통(中統), 청홍방(靑洪幇), 친일파였다. 그러나, 그의 비밀신분은 중공특무인원이었다.

 

- 군통은 "국민정부군사위원회조사통계국"을 줄여서 부르는 말인데, 국민당이 통치의 편의를 위하여 설립한 통치기구이며, 나중에 국방부 기밀국이 된다. 군대계열이어서 군통으로 불린다. 책임자는 대립(戴笠)이다.

- 중통은 "국민당중앙당부통계조사처"를 줄여서 부르는 말인데, 국민당 중앙당조직이 장악했던 기관이다. 중통은 국민당CC계의 진입부, 진과부가 장악하고 있었다.

- 청, 홍방은 중국의 역대 비밀결사조직으로 상해지역에서는 두월생, 황금영, 장소림이 유명한 삼대두목이다.

 

1931년 10월, 원수는 중국공산당에 가입하고, 이후 특무업무를 맡게 된다. 지하당책임자의 지시에 따라, 1932년 봄, 사촌형인 황포군관학교 1기졸업생 가백도(賈伯濤)의 관계를 이용하여, 원수는 상해시 사회국장겸 중통의 지역책임자인 오성아(吳醒亞)를 만나게 되고, 중통의 조직원이 된다. 나중에 그는 오성아의 소개로 신성통신사(新聲通信社)의 기자가 되며, 이로써 남경정부의 기자회견에 참석하게 되어, 많은 사람을 알게 된다. 그 중의 한 명이 일본주상해영사관의 부영사 암정영일(巖井英一)이었다. 당시, 중국과 일본이 협상중이었고, 협상내용은 화폐환율과 관세문제였다. 이 이슈는 신문업계의 주요한 뉴스거리였다. 원수는 암정영일과 잘 알았으므로 소식이 빠르면서도 정확했다. 그리하여 그는 금방 기자들 사이에서 유명하게 된다. 오성아마저도 그를 괄목상대하게 된다. 한동안 시간이 흐른 후, 암정영일은 원수에게 매달 200위안의 교제비를 건네게 되고, 그는 일본측의 정보요원이 되었다. 당연히 이는 중공지하당책임자의 승인을 받은 것이었으며, "삼중간첩"이 된 것이다.

 

오래지 않아, 암정은 다시 원수를 일본으로 보낸다. 귀국후, 원수는 즉시 풍설봉(馮雪峰)과 연락한다. 1937년 6월, 반한년(潘漢年, 중공특무책임자)은 팔로군주상해판사처 주임의 신분으로 상해로 돌아온다. 이로부터 1946년에 해방구로 옮겨갈 때까지, 원수는 반한년의 지휘하에 성공적으로 정보전을 수행한다. 풍설봉은 그에게 "청방의 신분"으로 두월생을 찾아가서 '시사간행사'를 창간해보라는 제안을 받는다.

 

항일전쟁이 발발한 후, 대립은 일본문제에 대하여 정확히 판단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두월생으로부터 원수라는 일본유학생이 일본영사관의 암정영일과 관계가 괜찮다는 말을 전해준다. 대립은 아주 기뻐하며, 친히 그를 찾아간다. 원수는 일이 중대함을 알고는, 즉시 반한년에게 결정해달라고 보고한다. 반한년은 한참을 침묵하다가 결국 "이건 좋은 일이다. 얻기 힘든 기회이다. 너는 절대 이 좋은 기회를 잃지 말아라. 대립이 요구하는 모든 것을 들어주어라"라고 지시하게 된다. 대립은 원수에게 두 가지 임무를 부여했는데, 하나는 일본측의 정보를 수집하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시국이 어떻게 바뀌더라도 상해에 계속 남아 있으라는 것이다.  이렇게 원수는 또 다시 신분이 늘어났다. 군통, 중통, 청홍방, 일본, 중국공산당까지 드디어 역사상 전무후무한 5중간첩이 된 것이다. 이때부터 원수는 각종 관계를 이용하여, 일본정보를 대량으로 획득한다. 자연히 먼저 반한년에게 보고하고, 그 후에 선택적으로 군통에 보고했다.

 

1937년 "8.13"송호항전기간동안, 원수는 죽음을 도외시하고, 일본학생으로 변장해서, 전선을 넘나들고, 일본진지에 깊숙히 들어가 정찰하여, 많은 정보를 제공한다. 상해가 고도로 된 후, 원수는 명을 받아(형식적으로는 대립의 명, 실질적으로는 반한년의 명) 상해에 남는다. 군통 소장의 명의로 비밀행동소조를 조직하며, 일본인과 친일파를 암살하는 등의 작전을 펼친다. 그중 가장 성공적이었던 것은 홍구에 있던 일본해군의 무기고를 폭파한 것이다. 1937년 상해가 일본의 손에 들어간 후, 암정영일은 다시 상해로 아서 "특별조사조"를 구성한다. 원수도 당연히 구성원으로 참여한다. 당연히 이 일은 반한년도 알고 군통도 아는 일이다.

 

대립은 원수가 세운 공을 장려하기 위하여 홍콩으로 부른다. 홍콩에서 원수는 대립을 만나 두 가지 임무를 받는데, 하나는 이사군(李士群)을 암살하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일본관계를 보다 강화하라는 것이다. 원수는 상해로 돌아온 후, 군통잠복인원과 함께 이사군이 살고 있는 76호를 폭파할 계획을 세운다. 그런데, 생각지도 못하게 군통 상해구책임자인 왕천목(王天木)등이 반란을 일으켜, 배신하게 된다. 나중에 원수는 "외무성정보요원"으로 암정에게 인도된다. 원수는 암정에게 "흥아건국운동본부"를 건립하겠다고 제안하여, 흥아건국운동본부는 1939년 11월 암정공관에서 설립된다.

 

연안은 정보중심인 상해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으므로, 일본본부의 동향 및, 일본과 왕정위, 장개석간의 상호 관계와 모순의 미묘한 변화를 파악하는 것이 필요했다. 1942년초, 일본외무성은 진부목(陳孚木)과 원수를 흥건운동의 대표로 일본방문을 하도록 한다. 외무성의 책임자 야춘길삼랑은 바로 이 조직의 방일을 주선한 주인공이었다. 길삼랑은 진부목과 원수에게 국가전략을 설명하고, 장개석을 유인하여 일본을 주체로 하는 대동아공영권을 건설할 것이라고 한다. 일본군은 이미 남진의 전략을 기획하였다. 이 소식에 원수는 깜짝 놀란다. 되돌아와서 알아본 바에 의하면 일본군의 남진은 이미 확정된 것이었다. 그리하여 반한년은 즉시 연안에 보고한다.

 

유럽에서 제2차세계대전이 전면적으로 발발하기 전에, 소련은 앞뒤로 적을 맞이하는 것을 겁내왔다. 일본군이 남진한다는 정보를 얻은 후, 대담하게 수십만의 병력을 서부전선에 투입할 수 있었다. 1939년부터 항전승리때까지, 원수는 아무런 문제를 일으키지 않았는데, 이는 그의 지략이 뛰어났다는 것을 보여준다. 당연히 이 기간동안 그는 수많은 임무를 완성한다. 적시에 당중앙에 일본군의 동향을 보고했고, 인사변동사항; 소남지역의 일본군 동향, 배치; 포로로 잡힌 인사(노신의 부인 허광평을 포함함)의 구원활동; 반한년, 범장강, 추도분등의 보호; 적시에 정보를 전해주어 속유가 일본군의 포위망을 도망친 것등이 그것이다.

 

나중에 원수는 일련의 일본괴뢰정부의 직위를 맡게 되는다. 청향정치공작단단장, 강소성교육청장, 청향전문위원 및 보안사령관등등이 그것이다. 그의 정보공작은 갈수록 노련해졌따. 1945년초, 원수는 교육청장직을 사직하고, 상해시참의원의 직위만 보유한다. "8.15"항일전쟁승리후, 운수는 충의구국군의 새로 만든 별동대제5종대지휘와 군통직속의 제3참참장이 되고, 중장의 계급을 수여받는다. 다음해 즉, 1946년초가 되어서야, 국민당에서는 원수가 중공의 해방구로 도망친 사실을 알게 된다. 그리하여 대로하여 "항일유공인원 원수"는 "공산매국노"가 되어 버린다. 군통은 원수에 대하여 지명수배를 내렸으며, 소주의 가산을 몰수한다.

 

화동국 조직부장인 증산(曾山)은 원수와 얘기함녀서 여러 관계를 감안하여, 원수에게 임시로 개명하도록 하면서 자신의 성을 따르게 하여, 증달재로 한다. 이 이름은 이후 수십년간 사용된다. 나중에 그는 화동국 연락부 제1공작위원회 주임이 되고, 여단장급이 된다. 1949년 원수는 북경으로 오고, 이극농의 정보부서에서 일하게 되며, 일본 미국동향을 조사연구하는 업무를 수행한다.

 

반한년은 매번 북경에와서 회의를 할 때마다, 두 사람이 만났다. 마지막으로 만난 것은 1955년이며, 원수가 북경반점으로 가서 반한년을 만난다. 반한년은 아주 비감하게 말했다: "정보업무를 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끝이 좋지 않다. 이것은 중국이나 외국이나 똑같다." 반한년사건이 발생한 후 며칠이 지나지 않아, 원수도 체포된다. 12년형을 받아 1967년에 형기가 만료된다. 그런데, 때마침 이 해는 문혁이 시작되는 해여서 다시 8년을 복역한다. 1975년에야 형기를 마친다. 그리고도 여전히 노동개조농장에 보내어진다. 그는 그의 처인 단목이 1968년 두려움으로 수면제를 과다복용하여 자살하려하였으나 미수에 그쳤으며, 나중에 집에서 나가 어디로 갔는지 종적을 알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1982년 반한년의 명예가 회복된 후, 원수도 '무죄'를 선고받는다. 그러나 여러가지 사정은 그로 하여금 편안한 말년을 보낼 수 없게 한다. 임종전에 정신착란에 이른다. 1987년 11월 26일, 원수는 세상을 떠나니, 향년 76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