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릉은 도굴된 적이 있는가?
1960년, 몇몇 농민이 폭약으로 돌을 깨다가, 부주의로 무척천의 묘도입구를 깬 적이 있다. 이 묘도입구는 참으로 국가의 절대기밀사항이었다. 도굴군들이 천여년간 찾을래야 찾을 수 없었던 것이었고, 황소(黃巢)가 40만대군을 시켜 수년을 팠지만 파내지 못했던 것이었다. 이후, 사람들은 묘도입구의 위에 화산유송(華山油松)을 심었는데, 지금은 다 자라서 큰 나무가 되었다.
당태종때로부터 시작하여 당나라의 황제들은 대부분 "이산위릉(以山爲陵, 산을 황제릉으로 만드는 것)"의 방식을 채택했는데, 건릉은 그 중에서도 가장 대표적인 것이다. 많은 석상과 양산북봉의 거대함은 건릉의 웅장한 기세를 보여주고 있다. 멀리서 보면 건릉은 마치 옆으로 누워 있는 여인을 방불케 한다.
황제릉으로 말하자면 묘도구는 열쇠와 같다. 발굴에 있어서 묘도입구를 발견한다면 절반은 일을 끝낸 것이나 다름이 없다. 지금까지 건릉지궁의 열쇠는 40여년간 손안에 쥐고만 있었다. 만일 이 열쇠를 이전에 도굴꾼들이 손에 넣었더라면 건릉은 일찌감치 도굴되어 비어있었을 것이다.
중국역사상 건릉을 발굴하려고 한 것은 일찌기 여러번 있었다. 1200여년중에 양산위에는 도굴꾼들의 발걸음이 끊긴 적이 없었다. 자잘한 도굴군은 수를 헤아릴 수 없었으며, 정사에도 기재하지 않았을 뿐아니라, 양사에서도 전하기 버거울 정도로 많았다. 역사상 이름을 남긴 발굴은 17번정도 있었다. 비교적 대규모의 발굴작업은 3번있었다. 그러나, 모두 각종의 이유로 중단되고 발굴을 완성하지는 못하였다.
당나라 말에 농민반란이 있고, 황소의 기세가 가장 대단했다. 그는 40만 반란군을 이끌고 양산의 서쪽에서 산을 파들어갔다. 곧바로 40미터 깊이의 소위 "황소구(黃巢溝)"를 팠다. 거의 절반의 산을 파낸 것이다. 다만, 황소의 군대에는 학문이 깊은 자들이 없었으므로 건릉이 남향으로 되어 있다는 구조적인 특색을 고려하지 않아서 방향을 잘못잡고 파들어가는 바람에 결국은 실패하고 말았다.
역사서에서 기재된 오대의 요주자사 온도는 관직을 가진 도굴꾼이었다. 그는 병사를 이끌고 십여개의 당나라때 황제릉을 도굴했고, 많은 돈을 벌었다. 손에 돈이 있었으므로 대낮에 수만명을 동원해서 건릉을 발굴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발굴작업은 아주 순조롭지 못했다. 날씨는 항상 광풍폭우가 몰아쳤고, 온도는 이에 놀라서 발굴하려는 생각을 거두었다.
중화민국 초기에, 국민당의 장군인 손연중(孫連仲)이 사람을 이끌고 와서 손전영이 자희태후와 건륭황제의 묘를 도굴한 것을 본따서 양산에 군영을 설치하고 군사연습을 하는 것처럼 위장하면서, 묘도옆의 세 개층의 암석을 부수고 들어갔다. 그러나, 결국은 아무 것도 얻지 못하고 말았다.
현재, 많은 전문가들이 건릉은 당나라때의 18개 황제능중 유일하게 도굴되지 않은 능묘로 보고 있다. 이유는 건릉의 묘도가 완벽하고 묘도를 버리고, 돌산의 다른 곳에서 파고들어가 지궁에 도달한다는 것은 매우 어렵기 때문이다. 현재까지 새로운 도굴을 위한 동굴을 발견하지는 못했다. 물론, 사실이 그러한지는 나중에 지궁을 열어봐야 알 수 있을 것이다.
건릉을 발굴하는 시기는 언제가 좋을 것인가.
섬서성 고고학계의 원로인 석흥방 선생은 여러번 글을 써서 건릉을 발굴할 수 있는 여러가지 조건이 이미 성숙되었고, 시기도 성숙되었다고 발표하였다. 40여년동안 고고학계는 남당이릉, 명정릉, 법문사지궁, 진공대묘등을 발굴하면서 이미 풍부한 경험을 얻었고, 높은 수준의 전문가들을 보유하게 되었으므로 건릉의 발굴업무를 수행하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것이다.
건릉을 발굴하는 것은 섬서성정부의 40여년동안 연구했다. 많은 돈을 들여서 수십만자의 글을 썼는데, 많은 과학자들이 참여해서 아주 엄밀한 <<당건릉발굴계획>>을 작성하였다. 발굴계획에 따르면, 밀폐시스템을 사용하여야 한다고 하였다. 공기의 유통을 차단한 다음에 두 사람의 산소통을 휴대한 무균업무인원(또는 로보트)을 묘도에 집어넣어 마이크로카메라로 자료를 촬영해오도록 하는 것이다. 어떻게 보호할 것이고, 어떻게 전시할 것인가도 자료에 기재하고 있다.
건릉은 전국의 다른 황제릉이 보유하지 못한 다섯 가지의 조건을 보유하고 있다. 하나는 주묘실의 위치를 알고 있다는 것이고, 이것은 매우 정확하다는 것이다. 한번에 바로 열 수 있다는 것이다. 둘째는 내장품이 풍부하다는 것은 아직까지 도굴된 적이 없다는 것을 증명한다는 것이다. 셋째는 많은 돈을 들여서 발굴계획을 작성하였고, 여러 전문간의 의견을 들어두었다는 것이다. 넷째, 수십년간 계속하여 중앙정부에 보고하여 이미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다섯째, 명황제릉이 파괴되고 있는 것에서 보듯이 바로 자료를 구조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과학적으로 건릉을 발굴할 객관적인 조건은 모두 갖추어져있는 상황이므로 하루라도 빨리 발굴하는 것이 유리할 수 있을 것이다. "진국지보"가 하루빨리 세상에 나옴으로써, 성당에 대한 연구와 중서문화비교연구도 활발히 이루어지게 될 것이다. 중화민족의 지위도 올라가고, '서부대개발'에도 유리하게 작용할 것이며 중국의 관광사업이 또 다른 고조기를 맞이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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