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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무측천)

측천무후는 정말로 친딸을 목졸라 죽였는가? (I)

by 중은우시 2007. 12. 10.

글: 맹헌실(孟憲實)

 

무측천(武則天, 則天武后, 이름은 照, 측천무후는 스스로 한자 를 만들어 자기 이름으로 썼음)은 중국의 역사상 돌연 나타났고, 역사의 기적을 이루어낸 인물이다. 남성중심사회에서 어떻게 여자황제가 될 수 있었는가? 그러나, 그녀의 성공 뒤에는 얼마나 많은 댓가를 치루었는가? 무측천에 대한 평가를 둘러싸고, 요마화(妖魔化)는 전통사학계의 주류적인 입장이다. 무측천을 요마화하는 일련의 역사기록중에서 "무측천이 자기의 친딸을 죽였다"는 것은 가장 전형적인 사례의 하나이다.

 

"간략한 기술에서 복잡한 기술로": 기록의 변천

 

개략 영휘4년경, 무측천은 당고종과의 사이에 공주를 하나 낳는다. 그러나 이 공주는 불행히도 요절하고 만다. 공주의 죽음은 도대체 무엇때문인가? 최초의 기록은 아주 간단했다. <<당회요(唐會要)>>의 권3 "천후무씨(天后武氏)"조에서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소의(昭儀, 당시 무측천의 직위가 소의였음)가 낳은 딸이 갑자기 죽었다. 그리고 왕황후가 죽였다고 상주했다. 황상은 이에 황후를 폐할 뜻을 갖게 되었다" 당시의 무측천은 소의였다. 황제의 구빈(九嬪)중에서 으뜸인 자리로, 정2품이었다. 이 공주는 무측천이 당고종과의 사이에서 낳은 두번째 아이이다. 첫번째는 아들인 이홍(李弘)이다.

 

<<당회요>>의 이 기록에 의하면, 무측천과 당고종사이에 낳은 공주는 확실히 요절했다. 그러나 사망원인은 몰랐으므로 그냥 "갑자기 죽었다"고만 적었다. 무측천은 공주의 죽음을 확실히 이용했다. 공주의 죽음을 왕황후의 짓으로 책임전가했다. 고종은 무측천의 영향을 받아, 왕황후를 폐할 마음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당회요>>라는 책은 비록 북송때 왕부박(王溥)가 편집한 것이지만, 당덕종시기의 소원(蘇寃) 40권의 <<당회요>>와 당선종시기 최현(崔鉉)의 <<속회요>>를 흡수한 것이어서 당나라때의 사료가 비교적 많았기 때문에 이후의 학자들에게 중요하게 취급되었다. 이곳의 기록은 비교적 믿을만 하다. 당시, 왕황후는 소숙비(蕭淑妃)와 연합하여 무측천과 대립하는 구도였는데, 무측천의 비정한 전투기교는 당시의 상황에 아주 적합하였다. 어쨌든 모친이 친딸을 잃은 것이니까, 이성을 상실한 말을 해도 용서받을 수 있는 상황이었고, 고종은 상처받은 모친의 모습을 보면서 아마도 동정심이 끓어 올랐을 것이다.

 

다만, 당고종의 새로 태어난 공주가 요절한 사건에 대하여 <<구당서(舊唐書)>>는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않고 있다. 다만, 측천황후 본기의 "사신왈(史臣曰)"중에서 "무후가 정실의 자리를 차지하기 위한 음모이다. 목구멍을 눌러 강보의 아이를 죽인 일이나, 육장을 담그는 일....등은, 그 무도함이 아주 심하다. 여인들의 투기에서 자주 나타나는 형태이다"라는 기록이 있다. 그중 두번째의 일은 왕황후와 소숙비에 대한 잔혹한 행위를 가리키고, 앞의 행위는 아마도 친딸을 죽인 일을 얘기하는 것으로 보인다. <<구당서>>가 편찬된 것은 후당 출제 개원2년(945년)으로 4년의 기간을 들여서 완성했다. 이 사건이 왜 <<구당서>>의 본문에 들어가지 않고, "사신왈(사신이 말하기를)"이라는 방식으로 표현되었는지에 대하여는 확실한 증거는 없었고, 추측컨대 이때 이미 무측천이 친딸을 죽였다는 식의 소문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다만, 증거가 없었으므로 그저 개인적인 의견을 표명하는 식으로 적은 것일 것이다.

 

<<구당서>>의 이러한 개괄적인 입장표명은 <<신당서>>에 이르러 한걸음 더 나아가게 된다. 아주 구체적이고 생동감있게 묘사된다. <<신당서. 후비열전>>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소의가 딸을 낳았다. 황후는 와서 아이를 돌보고 놀다가 돌아갔다. 소의는 몰래 이불 속의 아이를 죽였고, 황제가 오기를 기다렸다. 겉으로는 기쁜 듯이 얘기하면서, 이불을 들추어 아이를 보았더니, 죽어 있었다. 놀라서 좌우에 물으니, 모두 "황후가 마침 왔었습니다"라고 하였다. 소의는 바로 비통하게 눈물을 흘렸다. 황제는 내용을 알지 못하고 화를 내서 말하기를: '황후가 내 딸을 죽였구나. 이전에 비와 서로 헐뜯더니 이제는 이 지경에 이르렀구나" 그리하여 소의의 계략은 성공하고, 왕후는 도저히 해명할 수 가 없었다. 황제는 더욱 그것이 사실이라고 믿었고, 황후를 폐위시킬 생각을 하게 되었다" 여기에서 공주가 죽음에 이르는 과정에 아주 상세하게 실렸다.

 

<<자치통감>>의 기록은 직접적으로 <<신당서>>를 승계하였다: "황후에 대한 총애가 비록 시들었으나, 황상은 여전히 황후를 폐할 생각은 없었다. 소의가 딸을 낳게 되자, 황후는 그를 예쁘게 여겨 데리고 놀았다. 황후가 나가자, 소의가 몰래 공주의 목을 졸라 죽이고, 다시 이불을 덮어 놓았다. 황상이 도착하자 소의는 겉으로 환한 웃음을 지었다. 이불을 들추자 딸은 이미 죽어 있었다. 바로 놀라서 통곡을 했다. 좌우에 묻자, 좌우는 모두 "황후가 마침 이 곳에 왔었다"고 말한다. 황상은 대노하여, "황후가 내 딸을 죽였구나"라고 하였다. 소의는 그 죄를 추궁해달라고 울면서 호소했다. 황후는 스스로 이를 밝힐 방법이 없었다. 황상은 그리하여 황후를 폐위시킬 생각을 갖게 되었다"

 

자세히 비교하면, <<자치통감>>의 이 문자는 기본적으로 <<신당서>>에서 따온 것이다. 황후가 새로 태어난 공주를 보고, 떠난 이후에, 무측츤이 몰래 공주를 죽여버리고, 현장을 위장한다. 당고종이 도착하자, 무측천은 웃음을 거짓으로 지으면서 이불을 들춘다. 그리고 공주가 이미 죽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좌우에 물으니, 모두 황후가 막 다녀갔다고 말한다. 그리하여 황제가 대노하고 왕황후가 공주를 죽였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왕황후는 스스로 변명할 방법이 없었다. 그리하여 황제는 황후를 폐위할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상의 기본적인 줄거리는 두 책이 기본적으로 동일하다. 다만 구체적인 부분에서 약간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구체적인 상황이 더욱 자세하고 더욱 생동감이 넘치게 될 수록 의심은 더욱 짙어지게 된다. <<자치통감>>과 <<신당서>>의 이러한 구체적인 정황에 대한 수정은 별론으로 하더라도, 이미 과정에서 변화가 생긴 것이다. 우리가 묻고 싶은 것은 그 변화가 합리적인 것이냐는 점이고, 의도는 무엇이냐는 점이다. 그러나, 구체적인 정황에 대하여 아주 따지는 <<자치통감>>에서 이 사건을 묘사할 때는 비교적 명확한 시간관념을 확립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자치통감>>에서는 이 일을 영휘5년의 연말에 기술하고 있는데, <<자치통감>>의 체제에 의하면, 이 사건의 구체적인 발생일시가 붕명확하다는 것을 설명한다. 편년체사서로서, <<자치통감>>은 이러한 사서의 모범이었고, 역사사건의 시간확정에 대하여 아주 엄격했다. 그러나, 공주의 죽음문제에 있어서, <<자치통감>>은 그저 <<신당서>>의 합리적이지 않아 보이는 글을 그대로 받아쓰고 있을 뿐이다. 왜 더 중요한 시간문제에 있어서 더욱 구체적인 좌표를 설정해주지 않았는가? 답은 확인할 수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다만, <<자치통감>>은 이 사건에 대한 정보에 있어서 제한적이었고, 중요한 시간문제도 확정할 수 없었다. 그저, <<신당서>>의 기초위에서 세부상황을 보다 "합리화"시키는 수정만 한 것이다.

 

이상의 이런 기록을 보면 우리는 이런 것을 발견할 수 있다. 공주의 죽음에 대한 문자기록은 간략한데서 복잡한 것으로 변천해간다. 이 과정에서 중요한 정뵌 사건발생시간에 대하여는 전혀 더 이상 진전이 없다. 다만, 세부상황은 갈수록 명확해진다. 중국의 고대사연구에서, 일찌기 "누적적구조학설"이라는 것이 있다. 그 의미는 고대의 역사는 시간이 흐름에 따라 더욱 명확해지는데, 이것은 바로 후세인들이 날조한 결과라는 것이다. 문학사상으로도 비슷한 문제가 있다. 작품이 전해지는 과정에서 계속 가공되고 창조되어 최후의 모습과 최초의 상황은 많이 달라지는 것이다. 그렇다면, 궁중비사에 있어서도 이런 철칙이 적용될 수 있지 않을까? 관련된 모든 당사자들이 기록을 남겨두지 아니한 상황하에서 후세인들이 어떤 경로를 통해서 더 많은 구체적인 상황에 대한 정보를 얻어냈을까? 그래서 오늘 날, 우리가 직면하는 역사적인 사실에 대하여 간략한 기술에서 복잡한 기술로 묘사가 변천하는 과정이 있는 경우에 우리는 의문을 품어보아야 하는 것이다.

 

왕황후는 무측천의 입궁전에 이미 총애를 잃었다.

 

현재의 역사기록에 의하면 <<당회요>>든 <<신당서>>든 왕황후의 지위위기에 대하여는 어린 공주의 죽임이 가져온 결과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당고종이 이때 부터 황후를 폐위할 생각을 품었다는 것이다. 사실, 왕황후의 위기는 어린 공주의 죽음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그리고 나중에 왕황후가 폐위되는 것에서도 공주의 죽음이 어떤 작용을 했었다는 증거는 나타나지 않는다.

 

왕황후의 위기는, 무측츤이 입궁하기 전에 이미 드러났다. 왕황후는 태원왕씨(太原王氏)인데, 당시의 천하제일의 집안이었다. 왕황후는 명문출신이고, 당당한 황후였지만, 그녀와 당고종의 관계는 처음부터 문제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당고종은 소숙비와의 사이에 1남2녀를 낳았다. 이는 <<당회요>>에서 말하는 바와 같이, "당시 소양제가 총애를 받았고, 왕황후는 그녀를 싫어했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가지게 한다. 무측천이 두번째로 황궁에 들어갔을 때, 여전히 소숙비와의 총애다툼이 계속되었었다. "소양제의 총애를 나누게 하기 위하여" 무측천을 받아들인 것이다. 그러나 일은 원하는 바와는 달리 진행되어, 무측천이 입궁하자, 당고종은 그녀를 소숙비보다 더욱 총애하였다. 왕황후는 늑대를 끌어들인 꼴이었다. 소숙비에 대한 총애는 없애는데 성공했지만, 무측천은 뒤에 나타나서 더욱 심하게 총애를 독점했다. 왕황후는 여전히 황제의 총애를 받지 못했다.

 

당고종은 왕황후를 싫어했다. 왕황후의 위기문제는 여기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왕황후에게 이런 위기가 있었기 때문에 그녀의 외삼촌인 유석(柳奭)은 영휘3년 7월, 태자를 옹립하는 문제를 제기하게 된다. <<신당서>> 이충(李忠)본전에 의하면: "왕황후는 아들이 없었다. 황후의 외삼촌인 유석이 황후에게 말하기를 이충의 모친은 출신이 한미하니 그를 태자로 세워주면 분명히 우리와 가깝게 될 것이라고 하였다. 황후도 그렇게 생각하여, 황제에게 청하였다. 다시 유석은 저수량, 한원, 장손무기, 우지녕등과 계속 청하여, 마침내 황태자로 세워지게 된다" 이를 보면, 황제는 황후의 요청을 처음에는 받아들이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장손무기등 조정의 중신들이 계속 나타나서 요청하자 황제는 어쩔 수 없이 동의한 것으로 보인다. 이충이 태자가 된 것은 명확히 기재되어 있다시피, 왕황후가 자신의 입지를 공고히 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리고 이 때는 무측천과 당고종의 사이에 아들이 없었을 때이고, 공주의 죽음은 더구나 얘기할 거리도 없었다.

 

이충이 태자로 되었다고 하여, 왕황후의 지위위기가 해소된 것은 아니었다. 이충이 태자에 오른지 얼마되지 않아 당고종과 무측천의 사이에 아들이 하나 태어난다. 이 아들은 "이홍(李弘)"이라고 이름을 지어준다. 그런데, 이홍이라는 이름은 그 자체로 의미심장한 측면이 있다. 남북조이래로, 도교에서는 이런 참언이 돌고 있었다. 즉, "노군당치(老君當治, 노군은 태상노군 즉 노자를 의미한다. 그리고 당고종의 이름이 이치이다)", "이홍당출(李弘當出)"이라는 참어이다. 이는 이홍이 천자가 될 것이라는 것을 나타낸다. 당장유(唐長孺)의 연구결과에 따르면, 당고종과 무측천이 자기의 아들에게 이홍이라는 이름을 지어준 것은 바로 이러한 참언에 따르겠다는 뜻이라고 볼 수 있다는 점이다. 당시에 이충이 이미 황태자로 세워져 있었는데, 이렇게 한다는 것은 이충의 황태자지위를 인정하지 않겠다는 것인 동시에, 왕황후에 대하여도 인정하지 않겠다는 뜻이 담겨있지는 않을까. 만일 왕황후의 지위위기가 무측천의 공격에 의한 것이라고 하기 보다는, 차라이 당고종이 그녀에게 오랫동안 냉담했었다는데서 원인을 찾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리고 당고종이 아들의 이름을 이홍이라고 지었다는 것은 사실 황후에게 더욱 큰 위기가 닥칠 것이라는 점을 암시한다고 볼 수 있다. 명확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이때 당고종이 황후를 바꿔버릴 생각을 하고 있지 않았다면 이 문제는 해석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홍이 출생한 때, 무측천과 왕황후/소숙비연맹의 투장은 이미 한 단계를 넘어섰다. 그리고 승리한 것은 무측천이다. 위에서 인용한 <<당회요>>무후전, <<구당서>>무측천본기와 <<신당서>>왕황후전에 따르면 각 책마다 기술한 각도가 다르기는 하지만, 결론은 공통된다. 즉 무측천이 승리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무측천은 당사자로서 당고종이 왕황후를 어떻게 보고 있는지 그리고 황제와 황후의 관계가 어떠한지는 모두 손바닥을 들여다보듯이 잘 알고 있었다. 왕황후는 한번도 당고종의 총애를 받은 바 없고, 고종에 있어서 왕황후는 일찌감치 작일황화(昨日黃花, 어제 이미 시든 꽃)였다. 그래서, 왕황후를 폐출시키는데 대하여 당고종은 기본적으로 아무런 심리적인 장애가 없었다. 장애가 있다면 조정대신들쪽이었다. 당고종의 감정기복에 대하여 손바닥보듯이 잘 알고 있는 무측천은 이미 실패한 왕황후에 대한 타격을 계속 가하기 위하여 친딸의 생명을 댓가로 바칠 필요가 과연 있었을까?

 

공주의 죽음은 황후폐위과정에서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한다.

 

당고종은 확실히 황후를 폐위시키기 위한 과정을 밟는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밝힌 이유들 중에서 공주의 죽음은 전혀 언급되지 않는다.

 

당고종이 황후를 폐위시키고자 하는 발걸음은 우선 태위(太尉)인 장손무기를 설득하는데서 시작한다. 아주 낮은 자세로 접근한다. 먼저 장손무기의 집을 방문한다. <<자치통감>>의 기록에 의하면, "당고종은 무소의와 함께 태위 장손무기의 집을 방문한다. 술이 어느 정도 올랐을 때, 장손무기가 사랑하는 부인의 자식들 3명을 모두 조산대부로 봉하고, 금은보화비단을 실은 수레 10개를 장손무기에게 하사한다. 황상은 황후가 자식이 없다는 점을 들어 은근히 장손무기의 뜻을 떠봤는데, 장손무기는 다른 말을 하면서 뜻을 따르지 않았다. 황상과 소의는 기분이 좋지 않아 돌아왔다" 당고종은 장손무기에게 여러가지 선물을 하면서 장손무기의 동의를 받아내려 하였다. 그러나, 구체적인 이유로 든 것은 "황후에게 자식이 없다"는 점이었다. <<자치통감>>은 이 글의 문자를 영휘5년(654년) 년말에 두었다. 이것도 구체적인 날짜를 확인할 수 없다는 의미이다.

 

그후, 영휘6년 6월, 당고종은 계속 황후폐위를 도모한다. 연속 이틀간 회의를 소집하였다. 대신중에는 장손무기, 저수량, 우지녕이 참가하였다. 이적(李勣)에게도 참가하라고 하였으나, 몸이 좋지 않다는 핑계를 대고 가지 아니하였다. <<자치통감>>의 기록에 의하면, 당고종은 장손무기 등에게 "황후는 아들이 없고, 무소의는 아들이 있다. 이제 무소의를 황후로 삼고자 하는데, 어떠한가?"라고 물었따. <<구당서. 저수량전>>의 기록에는 약간 더 살이 붙어 있다. 당고종은 "가장 큰 죄는 후사를 잇지 못하는 것이다. 황후는 자식이 없고, 소의는 자식이 있으니, 이제 소의를 황후로 삼고자 한다. 그대들의 뜻은 어떠한가?" 당고종이 내세운 이유는 여전히 "황후에게는 자식이 없다"는 점이었다. 즉, 이것이 가장 큰 죄라고 강조한 것일 뿐 두 글에서 기본내용은 똑같다.

 

저수량을 대표로 하는 대신들은 왕황후를 폐위시키고 무소의를 옹립하는데 반대했다. 먼저, 왕황후에게는 잘못이 없다는 점을 들었다. 다음으로, 태종황제의 생전의 의지를 들었다. 보기에 그들은 황후에게 자식이 없는 것이 가장 큰 죄라는 당고종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다음 날 다시 토론에 들어간다. 저수량이 강조한 중점은 무측천이 적합하지 않다는 점이었다. 저수량과 같은 대신들이 왕황후에게는 잘못이 없다고 하였으므로 당연히 어린 공주를 죽인 일같은 것은 생각도 않았을 것이고, 당고종도 이 일을 폐위의 근거로 얘기하지는 않았다. 뇌가기 선생이 이 문제를 비교적 상세히 검토한 바 있는데, 황후가 공주를 죽였다는 일은 비록 한편으로 황후가 스스로 해명할 수 없었기는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다른 사람도 그녀가 죽였는지여부를 증명할 수 없었다는 점이다. "황상은 왜 황후가 어린 공주를 죽였다거나 주문을 사용했다는 것을 이유로 들지 않았을까? 저수량은 왜 황후에게는 잘못이 없다고 말했을까? 이를 보면 이 두 가지 일은 그저 궁중내의 풍파일 뿐, 왕황후가 최소한 이 두가지 죄를 뒤집어쓰지는 않았다고 볼 수 있다"

 

여기서는 어린 공주의 죽음에 대하여만 논의해보기로 하자. 만일 어린 공주의 죽음이 확실히 당고종으로 하여금 폐위시키겠다는 생각이 들게 하였다면, 그렇다면 어린 공주의 죽음이 황후의 손에 의한 것이라는 확신을 가졌어야 한다. 만일 그가 어린 공주의 죽음에 황후가 관련되어 있다는 점에 대하여 확신을 가지지 못하였다면 황후를 폐위하겠다는 생각은 근거가 없는 것이 될 것이다. 마찬가지 이유로, 그가 만일 황후가 공주를 죽였다고 믿는다면, 그는 당연히 이 일을 이유로 들어 황후를 폐위하고자 했을 것이다. 반대로 그가 폐위의 이유를 설명하면서 이것을 언급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그렇다면 이것은 그가 황후를 공주살해의 주범으로 인정하지 않고 있었다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 결론적으로, 현재의 문헌기록을 살펴보면, 황후가 공주살해의 오명을 뒤집어쓴 것이 황제로 하여금 황후폐위의 생각을 들게하는 역할을 했을지는 몰라도, 진정으로 황후를 폐위하게 된 때에 황제는 이 일을 언급하지 않고 있다. 그러므로, 이는 거꾸로 어린 공주의 죽음은 황후를 폐위하겠다는 생각이 나오게 한 동인은 아니라고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