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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분석/중국역사의 이론

중국역사는 궁중투쟁의 역사인가?

by 중은우시 2007. 6. 19.

글: 유앙(劉仰)

 

중국인이 쓴 아무 역사책이나 뒤적거려보면, 내용은 거의 전부 궁중투쟁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중국의 많은 역사서를 보면, 역사는 마치 바로 황제 주변을 둘러싼 궁중투쟁인 것처럼 보인다. 그리하여 어떤 사람은 과장하여, 중국의 역사는 바로 궁중투쟁의 역사이다라고 말하기까지 한다. 순수하게 현상만 보자면 이런 결론도 어느 정도 근거는 있다. 그러나, 궁중투쟁을 중국역사전부라고 생각하는 것은 중국역사에 대하여 잘못된 판단을 하게 하는 시작이다.

 

중국사서가 황제주변의 궁중투쟁을 중요시하게 된 근본적인 원인은 바로 황권이 지고무상했기 때문이다. 중국역사상, 황권의 탄생, 연속, 감독은 가장 골치아픈 일이었다. 왜냐하면 거의 참고할 제도가 없었기 때문에, 제도로서 황제의 권력을 구속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불가능했다. 그러나, 황권이라고 해서 아무런 구속을 받지 않을 수는 없었다. 그리하여, 관방역사 특히 관방궁중정치사는 바로 황권을 구속하는 도구로 사용되었다.

 

먼저, 역사서중에서 많은 고대의 현명한 군주를 현재황제가 모델로 삼을 수 있게 제공했다. 만일 다른 방식으로 황제에게 권유한다면, 이세민, 위징과 같은 아주 특별한 관계가 아닌 한 황제는 전혀 귀기울이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고대의 현명한 군주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삼황오제의 예를 들게 되면, 황제가 신하의 건의를 받아들이면서도 심리적으로 만족하게 된다.

 

다음으로, 황제도 마찬가지로 조상을 존중했다. 그래서 황제에게 어떤 것을 권할 때에는 현재 황제의 부친, 조부를 들어 얘기하면 비교적 쉽게 효과를 볼 수 있었따. 만일 황제가 막나가면, 직접적으로 비난하는 것은 좋은 결과를 가져올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걸주, 진시황, 수양제등의 이야기를 해준다면 효과를 발휘할 수 있다. 중국의 역사서는 대부분이 관방역사서이므로, 중국의 사서중 많은 기록은 궁중이야기이고, 주로 이는 현재 및 미래의 황제에게 참고하도록 만든 것이다. 이런 방식은 황권에 대하여 효과적으로 제어할 장치가 없는 상황에서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중국의 관방사서에서 궁중정치이야기가 많은 또 하나의 원인은 바로 대신들의 개인적인 필요때문이었다. 지고무상한 황권 앞에서 한 대신이 아무리 재능이 뛰어나더라도 반드시 황권과의 관계를 잘 처리해야 했다. 이런 관계는 황제본인에게도 관계되고, 황제 주변의 사람과도 관계된다. 그리하여, 역사서를 쓰는 사람고, 역사서를 읽는 사람들은 자기가 장래 정치판에서 확고하게 자리잡기 위하여는 반드시 많은 궁중정치의 기본규칙을 알아야 했다. 그래서, 사서에 실려있는 궁중정치의 성공과 실패의 예들이 그들에게는 모두 참고가 되는 선인의 경험이었던 것이다. 궁중정치에 대하여 마음대로 평론할 수 없었기 때문에, 중국사서가 현상과 사실을 주요하게 기록하는 이유가 되었고, 역사를 평가하는 전통은 종종 경시되었다.

 

전통문화에는 정수(精髓)도 있고, 엉망인 것도 있다. 이런 주장은 이미 많은 사람들이 인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어떻게 정수와 엉망을 구분할 것인가는 쉽지 않은 일이다. 필자는 전통문화중 가장 중대한 결함은 바로 지고무상한 황권이다. 황권은 어느 측면에서도 제도화된 제약을 받지 않았으므로, 황제주변의 사람들은 많은 중대한 문제에 있어서, 그저 역사상 다른 황제의 이야기를 해줄 수밖에 없었고, 아주 조심스럽게 자기의 의견을 발표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방법의 좋은 측면이라면 황권에 대한 제약이 역사를 빌려 실현될 수 있었다는 점이지만, 나쁜 측면이라면 황제는 왕왕 옛 것을 그대로 따르고, 새로운 시도를 하지 않게 되었다는 점이다. 역대에 일반적으로 개국황제나 황조를 세운지 얼마되지 않은 초기의 황제들만이 업적을 남기고 뒤로 갈수록 황제는 더욱 손발이 묶여서 꼼작하지 못하는 경우를 보게 된다. 서로 다른 이익집단이 있으므로, 사람들은 대량의 역사기록중에서, 자기가 필요로 하는 궁중이야기만을 찾고, 이를 황제에게 들이밀게 되며, 황제는 어쩔 수 없이 따르게 되는 것이다.

 

황제에게 참고자료를 제공할 필요에 따라, 중국의 역사서에는 대량의 궁중투쟁의 기록이 남아 있게 된 것이다. 그리고, 많은 역사의 현실은 보다 덜 중요하게 다루어졌다. 미국의 중국계학자인 황인우(黃仁宇)가 쓴 <<만력15년>>이라는 책이 20년전에 중국에서 출판될 때, 한 중국의 명나라역사학자는 이렇게 말했다: "다른 사람은 중국역사를 이렇게 쓰고 있는데, 나는 평생을 명나라 역사를 연구했지만, 도대체 뭘했는가?" 그 원인은 국내에서 중국역사를 연구하는 사람은 항상 황제신변의 자잘한 일들을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고, 황인우의 <<만력15년>>은 대량의 국내학자들이 거들떠보지 않고, 황제와 무관한 역사자료를 사용했으므로 궁중투쟁의 각도를 벗어날 수 있었기 때문이며, 명나라 역사의 또 다른 측면을 해석해낼 수 있었고, 사람들이 그 때의 역사를 좀더 명확히 알 수 있게 만들었다.

 

중국역사서가 궁중투쟁을 많이 기록한 현상은 후인들이 역사를 읽을 때 쉽게 오해를 자아내게 된다. 오해의 하나는 중국역사의 전환점마다 황제개인의 이유때문에 이루어졌다고 생각하고, 사회현실의 원인은 경시하게 된다. 오해의 둘은 궁중투쟁을 간단하게 역사진실과 동등시 하게 되는 것이다. 하나의 간단한 예를 들어보자.

 

중국근대역사상, 자희태후(서태후)는 비난받는 인물이다. 만일 우리가 그저 궁중투쟁의 각도에서만 보자면, 쉽게 이런 결론을 내릴 수 있다. 보수적인 자희태후는 청말의 개혁과 개량운동을 말살했다. 만일 우리가 중국의 궁중투쟁이라는 틀을 벗어나서 본다면 이렇게 볼 수 있다. 바로 서방의 열강들이 의식적으로 자희의 권력을 보전시켜주었다는 것을. 그 목적은 바로 더 쉽게 중국을 조종하기 위한 것이었다. 열강의 지지와 묵인이 없었따면 자희태후는 절대로 광서제를 유폐시키지 못했을 것이다. 만일 열강이 광서제를 지지했더라면 자희태후는 일찌감치 끝장났을 것이다. 열강들이 광서제를 지지하지 않은 이유는 바로 그들이 중국이 개혁, 개량을 통하여 강대해지는 것을 원치 않았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열강들이 중국에서 최대한의 이익을 취할 수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 일체는 우리가 보는 중국의 궁중투쟁위주의 역사서에서는 볼 수 없는 것이다. 심지어 연속극들도 각종의 마음대로 만들어낸 궁중정치를 재미있게 만들어내고 있으니, 그 해도 적지 않다.

 

중국의 역사를 배우고, 중국의 역사를 진정으로 이해하려면, 반드시 궁중정치사의 속박을 벗어나야 한다. 반드시 사회현실을 보아야, 진정으로 중국역사를 이해할 수 있다. 궁중정치에서의 중국역사는 편면적인 역사이다. 중국역사가 궁중정치에 치우치는 경향은 황권을 중시한 결과이다. 이런 경향이 초기에는 그다지 심하지 않았다. 사마천의 <<사기>>에는 궁중정치가 아닌 내용들도 적지 않다. 그러나, 명나라, 청나라에 이르러서는 궁중정치가 관방역사의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만일 우리가 오늘날에도 여전히 궁중투쟁사를 가지고 중국역사를 이해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역사의 진면목을 볼 수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