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유앙(劉仰)
현재 중국은 또 한번의 거대한 문화충돌에 직면해 있다. 동방문화와 서방문화. 누가 낫고 누가 못한가? 어떻게 해야 중국땅에서 서로 교류하고 융합하며, 뿌리를 내리고 꽃을 피울 수 있을까? 이것은 이미 백여년이 걸린 주제이다. 이 주제를 전면적으로 평가하는 것은 쉽지 않다. 많은 중국과 외국의 사상가, 이론가들이 이에 대하여 많은 일들을 했다. 나는 여기에서 그 주제를 직접 얘기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저 중국역사상 발생했던 한 가지 사건을 개략적으로 분석해보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역사가 우리에게 일부 유익한 참고가치가 있기를 바란다.
유학(儒學)이 중국에서 정통지위를 점하기 시작한 것은 대체로 한나라때부터이다. 다만, 유학의 지위가 나중에 도전받게 되는데, 가장 큰 도전자는 바로 불교(佛敎)였다. 당시 중국인의 천하관념에서, 불고는 서방에서 온 학문이다. 즉, "오랑캐(夷狄)"의 학문이고, 중원본토의 사상이 아니다. 그러므로, 어떻게 서방에서 전래된 불교를 대할 것인가는 오랜 기간동안 중국사상계의 중대한 이슈였다. 이 이슈가 당시에 얼마나 심각했는지는 오늘날 어떻게 서방문화를 대할 것인가보다 결고 뒤떨어지지 않는다.
불교는 중국에 전래되기 전에, 이미 수백년간 존재했고, 자신의 성숙되고 완비된 체계를 갖추고 있었다. 마치 1840년이전의 서방이론체계와 같이. 불교는 동한 말기에 중국에 유입되기 시작했고, 처음에는, 물 위에 뜬 부평초처럼 뿌리를 잘 내리지 못했다. 이런 상황은 현대서방문명이 막 중국에 진입했을 때의 상황과 유사한 점이 있다. 다만, 현대서방문명은 무력에 의지하여 전세계에 강제로 보급되었다. 중국을 포함해서. 그러나, 불교가 중국에 보급된 것은 무력에 의존하지 않았다. 힘이 된 것은 중국사회 상층인사들이 자발적으로 받아들인 것이었다. 거기에는 황제도 포함된다. 불교는 이리하여 중국에서 크고도 빠르게 발전하게 되는 것이다.
현재의 서방무명이 중국에 들어올 때와 서로 다른 또 한가지는 불교가 중국에 진입하면서 중국정통의 유학에 심각한 도전을 조성하는 외에, 중국본토의 도교와도 경쟁을 벌이게 된다는 것이다. 도교는 노자를 교주로 모시고 있지만, 사실은 역사적인 유구함에서 불교에 맞서기 위한 것이었다. 다만 불교의 발전이 더욱 빨라지자, 유학의 정통지위까지 위협하기에 이른다. 위진시대에 많은 명사들은 지금까지도 풍류와 소쇄로 사람들을 감탄하게 만든다. 위진시대의 학술사상은 "현학(玄學)"이라고 부르지만, 실제로는 불교, 도교의 영향을 깊이 받았고, 유가와는 많이 달랐다. 그들중의 많은 사람들은 심지어 유학에 반대하는 것으로 학문의 방향을 이끌었다. 당나라에 이르러, 이씨성의 황족은 도가의 노자를 자신의 조상으로 모셨다. 게다가 현장이 인도에 갔다가 오면서, 유학의 지위는 더욱 위기에 처한다. 비록 당나라초기에 위징, 적인걸과 같은 유학인사들이 있었지만, 일부 역사학자들은 유학이 당나라에 이르러 '부단여대(不斷如帶, 겨우 한줄로 이어짐)"의 상황이었다. 많은 경우 유학은 당시 중국사회에서 잠류(潛流)였꼬, 불교가 대거 성행한다.
불교의 중국진입에 긍정적인 점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다만, 불교의 광범위한 전파는 많은 문제를 야기시켰다. 불교가 중국에 진입한 후 수백년간, 송나라이전까지, 중국에서는 모두 4차례의 "금불(禁佛)"사건이 발생한다. 송나라이전의 "금불"은 주로 사회경제적인 원인에서였다. 왜냐하면 불교가 사회경제발전에 영향을 주었기 때문이다. 현대인들이 송나라를 평가할 때, 자주 "적빈적약(積貧積弱)"이라는 말을 쓰고 있는데, 필자의 생각으로는 송나라의 "적빈적약"은 불교가 이전에 장기간 성행했던 것과 관련이 있다고 본다. 이는 역사의 후유증이다. 혹은 지체되어 나타나는 영향이다. 이를 바꾸는 것은 하루 아침에 이루어질 수가 없다. 생각해보라. 불교사상은 외래의 위협에 어떻게 대응할 수 있는가? 그러므로, 불교가 중국에 진입한 수백년후에, 중국인들은 실천을 통하여, 불교가 사회에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의 영향을 준다는 것을 이해하게 된다. 그저 소수인들이 이론적으로 도취되어 좋다고 하면 그만이 아닌 것이었다. 오늘날 중국에 들어온 서방문화는 실제로 이러한 마찬가지의 과정을 거쳤다. 일백년은 역사적으로는 그리 길지않을 수 있다. 불교가 중국에 들어와서 진정으로 인식된 시간고 비교하자면 긴 것도 아니다. 이런 시간동안, 사람들은 이론적으로 서방문명에 도취되기 쉽다. 서방문명이 중국에 철저히 이식된 후에 생길 악영향은 손쉽게 눈에 띄지 않는다. 바꾸어 말하자면, 현재 서방문명이 중국에 이식된 후에도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의 영향이 있는데, 아직까지도 중국인들이 전면적으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송나라이전의 4차례에 걸친 "금불"은 사회경제적인 고려에 따른 정치수단이었다. 진정 사상적으로 불교에 반격하기 시작한 것은 대체로 당나라중기의 한유(韓愈)부터 시작한다. 한유는 불교에 반대하는 입장이 강경했다. 다만, 한유의 역사적 가치는 그가 불교에 반대하는 동시에, 유가사상의 정통지위를 재차 수립하기 시작했다는데 있다. 이에 대하여, 우리는 간단하게 한유등은 그저 오래된 골동품을 다시 꺼내와서, 다시 신단위에 놓아둔 사람이라고 치부할 수는 없다. 불교는 사상과 이론적으로 확실히 뛰어난 점이 있다. 그리하여 유가사상을 더욱 성숙하게 만들고 시스템화하게 만들어주었다. 예를 들어, 한나라때의 유학은 대부분 문구를 해석하는 것이었다. 다만, 송나라때의 유학은 하나하나 자신의 사상체계를 갖추어가는 것이었다. 이는 불교가 초래한 결과중 하나라 아니할 수 없다. 송나라이후에 형성된 유가사상에서 사실 많은 내용이 불교에서 받아들이거나 참고한 것이다. 예를 들면, 북송의 사상가인 주돈이의 <<애련설(愛蓮說)>>이 있다.
유학만 그러했던 것이 아니다. 불교 자체도 많은 변화를 겪는다. 원래의 서토불국의 형태와는 이미 많이 달라지게 된다. 불교의 본토화는 심지어 중국불교가 자체적인 체계를 갖추게 되기에 이른다. 서방으로 가서 석가모니에 절할 필요가 없이, 중국내에도 일련의 문파종사가 등장한다. 상세하게는 말하지 않겠지만, 한 가지만 얘기하도록 하자. 불교의 탄생지부근에서는 지금도 여전히 탁발을 하여 밥을 얻어먹고, 사회에서 그들을 기르는데 대량의 비용을 부담한다. 그러나 중국에서는 불교가 마침내, "하루를 일하지 않으면 하루를 먹지 말라(一日不做, 一日不食)"의 전통을 세우고, 출가인이 먹을 것을 구걸하는 현상은 중국에서 더 이상 대량으로 발생하지 않는다. 중국에서 전파되어 나간 불교는 대부분 중국을 조종으로 삼고, 더 이상 서방(인도)의 근원을 찾아가지 않는다.
송나라이후 유학과 불교의 관계는 실제로 이전의 수백년간 불교와 유학의 상호 교류, 융합한 결과이다. 이런 교류와 융합은 쌍방 모두에게 큰 변화를 불러왔다. 이런 교류와 융합이 현재 세계에 남겨준 가장 큰 성과라면, 송나라때부터 시작하여 중국에서 종교는 세속정치를 초월하지 못한다는 원칙을 확립한 것이다. 정교합일은 중국인들에게 철저히 배척당한다. 송나라와 동시대의 서방과 유라시아의 절대다수의 지역에서는 여전히 정교합일의 제도를 실행하고 있었다. 신흥국가인 미국이 비로소 헌법에서 이 정교합일을 폐지한다. 정교분리는 당금 세계의 보편적 원칙이다. 사실상 정교분리정책의 근원은 바로 중국의 송나라때 건립된 것이다.
역사상 서방불교가 중국에 대량 보급된 결과는 오늘날에 있어서도 여전히 중요한 참고가치를 지닌다. 첫째, 외래문화는 다 나쁜 것이 아니다; 둘째, 외래문화도 많은 한계와 부작용이 있다; 셋째, 본토문화는 외래문화와 접촉하면 더욱 풍부해지고 자신을 발전시킬 수 있다; 넷째, 외래문화도 중국의 대지에 적응하면서 변화한다. 그러므로, 외래문화와 본토문화를 절대화하는 것은 적합하지 않다. 지금도 외래문화의 우월성 절대화의 경향이 지나치게 강한 편이다. 마치 예전에 불교가 중국에서 무법천지였던 상태와 같다. 나중에 적인걸, 한유, 두목과 같은 사람들이 나타나서 불교를 배척하게 되는 것도 외래문화의 극단화에 대한 균형잡기였다고 볼 수 있다. 송나라이후, 배불태도를 강하게 지닌 유학자는 갈수록 줄어든다. 이와 반대로 이론과 사상적으로 융합시키는 사람은 갈수록 늘어난다. 현대중국에서도 이런 국면이 출현했다. 아마도 한동안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관건은 중국사회에 뿌리박은 문화의 본체가 반드시 확립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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