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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민국 후기)

나가륜(羅家倫) : 31세의 청화대학 총장

by 중은우시 2007. 5. 15.

글: 나구방(羅久芳)

 

우리는 아마도 이러한 몇마디 말로서 나가륜의 일생을 형용할 수 있을 것이다: "5.4운동"의 학생지도자 겸 명명자, 31세의 청화대학 총장, 10년간의 중앙대학 경영자.

 

나가륜의 딸인 나구방이 이야기하는 부친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다시한번 그 동탕과 희망, 계몽과 존망이 함께하던 시대를 되돌아보게 된다.

 

북대의 나가륜

 

부친은 절강 소흥 사람이다. 1897년 강서 남창의 한 오래된 문인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는 일찌기 서당식의 전통교육을 받았다. 그러나, 상해에서 출판된 신서보(新書報)를 읽을 기회가 있었고, 전도사가 연 야학에서 영어를 배웠으며, 이후 학문을 하는데 좋은 기초를 닦았다.

 

1915년, 부친은 복단공학(復旦公學)의 중학부에 들어갔다. 한학의 기초가 튼튼했으므로, 동료들은 그를 '공자님'이라고 불렀다. 1917년 여름, 20세의 부친은 북경대학에 합격하고, 외국어를 전공한다. 부친이 북경대로 가서 공부하던 그해에 마침 채원배 선생이 북경대학에서 교편을 자았다. 부친의 회고에 의하면, 당시 북대에는 두 곳에서 그들이 자주 모였는데, 하나는 한화원(漢花園) 북대1원 2층집의 윗층 국문교원휴계실이었는데, 전현동(錢玄同)등이 자주 그 곳에 있었고, 또 다른 하나는 1층의 도서관주임실인데, 이대소(李大)의 사무실이었다. "이 두 곳에는 스승과 제자의 구별이 없었고, 예절이나 겸손은 필요없었다. 모두 와서 논쟁을 했고, 서로 어려운 문제를 내고는 했다. 개략 매일 오후 3시가 되면 이 두개의 방에는 사람들이 가득 찼다"

 

1919년 1월 1일, 부친은 일부 북대의 고학년학생들과 함께 <<신조(新潮)>>라는 잡지를 출판하였다. 제1기부터 제5기까지 총편집인은 부사년(傅斯年)이었고, 부친은 편집인을 맡았다. 두 사람은 많은 부녀해방, 혼인자유등 기운이 넘치는 글들을 발표했다. <<신조>>잡지는 당시에 <<신청년>>을 이어 신문화운동을 창도하는 두번째의 가장 영향력있는 간행물이었다.

 

채원배, 진독수, 이대소, 호적등은 모두 부친에게 큰 지원을 해주었다. <<신조>>의 편집부는 바로 이대소의 북대도서관 사무실이었다. 채원배는 북대의 경비에서 매월 3000위안을 <<신조>>에 내주었고, 이는 보수파로부터 강력한 공격을 초래했다. 그들은 교육총장(교육부장관)인 부증상(傅增湘)으로 하여금 채원배에게 압력을 가하게 하였고, 그로 하여금 두 사람의 교수를 사표내도록 하였다. <<신청년>>의 편집인인 진독수와 호적이었다. 그리고 두 학생을 제적하도록 하였다. 바로 <<신조>>편집부의 부사년과 부친이었다. 그러나, 채원배는 고집을 세우며 따르지 않았고, 대학은 정치로부터 간섭받지 않는다는 원칙을 지켜냈다. 이리하여 그는 전국학술계의 존경을 받게 된다.

 

부친과 호적은 일생동안 스승이면서 친구인 관계를 유지했는데, 바로 북대에서부터 시작된 것이다. 호적이 미국에서 북대로 돌아온 후, 처음에는 철학을 가르치지 않았고, 한동안 부친이 있던 외국어학과에서 머물렀다. 1918년, 부친과 호적은 함께 입센의 명극 "인형의 집(A Doll's House)"를 번역해서, 5.4이전에 <<신청년>>에 발표했다. 나중에 많은 사람의 기억에 따르면, 이 극이 당시의 젊은이들에게 준 충격은 매우 컸다.

 

1919년 봄, 저명한 철학자 듀이가 중국을 방문했다. 북경에서 일련의 강연을 했고, 호적은 그를 위해 통역을 담당했고, 부친과 또 다른 학생 한명은 기록을 맡았다. 매번 강연이 끝난 후, 호적선생은 부친등으로 하여금 강연의 요지를 대조하였고, 그후에 발표하였다. 이런 엄격한 훈련은 대학생에게 있어서 만나기 힘든 기회였다.

 

1919년 4월, 중국은 파리에서 평화회담이 결렬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왔고, 부친은 일부 동료학생들과 대책을 논의했다. 북대와 채원배 총장에게 압력을 주지 않기 위하여, 그들은 5월 7일에 시민과 공동으로 시위를 벌이기로 결정했다. 그런데, 5월 3일, 채원배 총장이 북양정부가 산동문제에 대하여 양보하기로 결정했고, 즉시 부친, 단석붕(段石朋), 부사년과 강백청(康白淸)등에게 통보되었다. 그날 밤에 사람들은 5월 4일로 날짜를 바꾸어 천안문에서 시위를 하기로 했다. 그날 저녁 부친은 강소원(江紹原), 장정제(張廷濟)등과 함께 각학교대표들의 추천에 의하여 총대표가 되었다. 부친의 임무는 밤새워 표어를 쓸 백포를 구매하는 것과 각학교 학생을 연락하고, 선언을 기초하고, 각국주중국대사관에 비망록을 전달하는 것등이었다. 아쉽게도 그날 찍은 사진은 많지 않고, 그저 1장에서만 부친의 면모를 확인할 수 있다. 백포의 깃대를 들고 북대대오의 맨앞에 서 있는 모습이다.

 

"5.4"의 그날 뿌려진 유일한 인쇄물은 <<북경학계전체선언>>이라는 전단으로 부친이 기초한 것이다. 1919년 5월 4일 그날 오전, 부친은 바깥에서 북대로 돌아왔는데, 한 동료학생이 말하기를 "오늘의 운동에 선언이 없으면 안된다"고 하였고, 북경의 여덟개 학교는 북대를 추천해서 기초하게 하였다. 북경대학생들은 다시 부친을 추천하여 기초하게 하였다. 당시 시간이 긴박하여, 사양할 수가 없었다. 부친은 긴 탁자의 옆에 서서 선언을 썼다. 선언은 비록 겨우 180자였지만, 기세는 대단했고, 아주 호소력이 있었다. 특히 마지막 몇개 문구가 그렇다: "중국의 토지는 정복할 수는 있지만, 죽일수는 없다. 중국의 인민은 살륙할 수는 있지만 고개를 숙이게 할 수는 없다. 나라가 망했다. 동포여 일어나라!" 지금 다시 읽어도 가슴이 뛰는 내용이다.

 

1919년 5월 26일, 부친은 "의(毅)"라는 필명으로 <<매주평론>>의 제23기에 단문을 기고한다. 제목은 <<5.4운동의 정신>>이었다. 첫번째로 5.4운동이라는 개념을 말할것이다. 이로부터 "오사사건"은 "오사운동"이 되었다.

 

31세의 청화대학 총장

 

1920년 가을, 부친은 북경대학 외국어과를 졸업했고, 마침 기업가인 목우초(穆藕初)가 자금 5만은원을 출연하여 북경대학에 장학기금을 설립했다. 부친과 강백청, 단석붕등 5명의 학생들은 총장 채원배에게 선정되어, 해외유학을 떠나게 된다. 이 5명의 우수한 북경대학생의 출국유학은 당시 비교적 많은 주목을 받았다. 한 신문에서는 이를 만청 조정이 헌정을 시찰하기 위하여 보낸 "오대신출양(五大臣出洋)"에 비유했다. 역대로 목씨의 장학금을 받은 북대학생들은 모두 각분야에서 나름대로 성과를 내었다.

 

부친이 간 곳은 미국 프린스턴대학의 연구원이었다. 오래지 않아 컬럼비아대학에서 역사와 철학을 공부했고, 듀이 교수의 문하가 되고자 하는 바램을 성취했다. 1923년 목씨의 기업이 파산하였고, 부친의 장학금도 중단되었다. 이해 가을, 3년의 미국유학생활을 마친 후, 부친은 <<사상자유사>>의 번역문과 <<과학과 현학>>이라는 책의 원고를 가지고 막 "제1차세계대전"을 끝내고, 물가가 비교적 싼 독일로 갔다.

 

20세기 20년대의 많은 중국유학생들은 독일에 가서 공부했다. 하나는 독일의 각대학은 농후하고도 자유로운 학술분위기를 가지고 있었고, 둘째는 세계대전후에 마르크가 대폭 가치하락된 후 외국화폐를 가지고 독일로 가서 환전하면 비교적 괜찮았기 때문이다. 당시 영향력있는 많은 사람들이 독일에 모여들었다. 예를 들어, 채원배, 주가화, 조원임, 유대유, 진인각, 서지마, 김악림등이 그들이다. 그들은 자주 함께 모여 고담준론을 펼쳤고, 하고싶은대로 말했다. 부친은 말년에 회고하기를 그때가 그에게서 가장 즐거웠던 시절이라고 하였다.

 

채원배는 부친이 가장 존경하던 어른이었다. 1924년, 부친의 유학기간에 채원배 선생과 편지를 많이 주고받았다. 행운이었던 것은 이 편지들은 우리 집에 모두 보관되어 있고, 채씨집안에서도 적지 않은 부친의 서신을 보관하고 있다는 점이다. 몇년전 우리는 서로 편지를 교환하였는데, 모두 50여통이었다. 채선생과 부친은 완전히 일종의 스승과 제자관계인데, 지금 보니 아주 따뜻한 것같다.

 

채원배가 퇴직한 후 머물 집이 없었다. 그의 70회생일때, 부친과 같은 과거의 제자와 동료들은 그가 몸을 쉴 장소가 없다는 것을 생각하여, 자금을 모아 상해에 주택을 하나 마련해 주었다. 생신축하서신은 호적이 기초하고, 부친등이 수정한 후, 수백명의 친구, 학생의 명의로 헌정하였다. 채원배는 삼개월여를 생각한 끝에 여러 사람들이 마련해준 뜻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77사변"이 발생하면서 이 꿈은 실현되지 못하였다. 1940년 채원배는 사망하였다.

 

목씨기업이 파산한 후, 부친은 원고번역으로 생활비를 마련한 적이 있다. 그러나 여전히 돈이 부족했다. 그래서 채원배 선생의 추천하에 상무인서관의 감리 장원배 선생이 부친에게 1500위안을 빌려주었고, 부친은 영국과 프랑스에서의 마지막 1년의 연구를 마칠 수 있었다. 부친은 장원제 선생에 대하여 항상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었고, 귀국후에 여러차례 이 돈을 돌려드리고자 했으나, 장원배 선생은 거절하였다. 한번은 생신축하의 명목으로 1000위안을 드렸더니, 장선생이 마지 못해 받았다.

 

1926년, 유럽과 미국에서 여러해동안 유학한 부친이 귀국했다. 그는 일찌기 동남대학에서 교편을 잡은 적이 있고, 나중에 전지정무위원회(戰地政務委員會) 교육처장을 맡았다. 1928년, 남경국민정부는 중국을 통일하였고, 국민정부 교육부장이 된 채원배는 부친에게 급히 북경으로 와서 청화대학 총장을 맡으라고 하였다. 그해 부친의 나이 겨우 31세때였다. 부친이 부임한 때는 바로 여름방학때 학생모집하는 기간이었다. 그는 학생모집공고에 "남녀불문"이라고 써붙였다. 그래서 청화대학은 청화역사상 첫번째 여학생을 받아들이게 된다.

 

부친이 청화대학에 오고나서, 이전에 없던 개혁의 바람을 일으키며 교수를 초빙했다. 당시 청화대학교수는 수준이 천차만별이었다. 50명의 교수중에 부친은 겨우 18명만 계속 채용하고, 별도로 근 30명의 교수를 다시 채용했다. 청화대학을 졸업한 사람이 거의 1/3이었다. 금릉대학, 동남대학에서 화학, 물리, 생물학과를 연구한 조교들이 청화대학으로 와서 강사가 되었다. 이로써 청화대학 실험과학의 두터운 기초가 쌓였다. 동시에 일부 북대출신의 문과교수도 계속 영입했다. 부친의 동창인 양진성, 풍우란등이 교무장, 학원원장등을 맡았다. 이 조치는 당시에 "청화가 북대와 합병하려한다"는 유언비어를 낳게 하였다. 부친은 그러나 전혀 개의치 않았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학술을 선양하려는 목적 뿐이다 소위 학교파벌은 모른다"

 

부친은 여러해 후에 이렇게 회고한다: 그가 교수를 초빙한 원칙의 하나는 어떤 교수의 지위도 인정으로 정하지 않고, 자신의 호오(好惡)를 기준으로 정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당시 재미있는 일은 외국어계의 오복(吳宓) 교수는 오사운동때 신구문학다툼에서 일찌기 신문학운동을 공격한 적이 있고, 부친과 글로 싸운 적이 있었다. 부친이 총장이 되는 것을 보자 그는 부친이 그에게 불리하게 대할 것을 걱정하여 조원임 교수를 요청해서 부친의 의중을 떠보았다. 부친은 크게 웃으며 말하기를, "우리가 그 때 다툰 것은 문언과 백화이다. 현재 그가 가르치는 것은 영국문학이니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일이다. 만일 그가 정말 중국고전문학을 가르칠 수 있다면 나는 역시 그를 초청해서 가르치게 할 것이다. 나는 절대 편협한 사람이 아니다" 이후, 부친은 그를 계속 채용했을 뿐아니라, 대우에서도 특별히 보살펴주었고, 이후 두 사람은 아주 가까운 친구가 되었다.

 

부친본인은 어떤 학파에 속하지 않았다. 인재를 선발할 때도 그런 것을 따지지 않았다. 전종서(錢鍾書)를 파격적으로 뽑은 것 이외에도, 1930년 청화대학 역사학과를 지원한 오함(吳含)은 수학점수가 빵점이었는데, 중문과 영문은 모두 만점이었다. 부친은 오함도 파격적으로 합격시켰다. 나중에 어떤 기자가 전종서에게 이 일을 물었더니, 그는 이렇게 말했다: "이 일은 당시 교장인 나가륜이 특별히 나를 불러서 교장실에서 얘기했었다. 그의 특별허가를 받아서 입학할 수 있었다. 나는 나가륜에게 허리를 굽혀서 고맙다고 절을 했다" 몇년전 나는 부친의 유고를 정리하다가, 우연히 영보재 방고신전에 쓰여진 두개의 편지와 10여수의 옛시를 발견했다. 자세히 읽어보니, 그 작자가 바로 전종서 선생이었다.

 

부친의 청화대학에서의 최대의 공헌중 하나는 원래 외교부에 속해 있던 "청화학교"를 "국립청화대학"으로 승격시킨 일이다. 1932년, 복잡한 정치형세하의 부친은 어쩔 수 없이 사직한다. 비록 이러했지만, 2년도 되지 않아, 부친의 청화대학에 대한 공헌은 긍정적으로 인정된다. 당시 청화대학 국학연구원의 지도교수 진인각선생은 이에 대하여 얘기하면서, "지희(志希, 나가륜의 자)가 청화에 있으면서, 청화는 정식으로 국립대학이 되었다. 공덕은 아주 크다" 그리고 청화대학교사를 여러해 연구해온 소운봉 교수도 이렇게 말했다. "현재 많은 사람들이 그저 매이기(梅貽琦)가 청화대학의 공신인 것만 알고 있고, 나가륜이 분투한 성과와 경험은 알지 못한다. 실제 매씨의 성취에 대하여 튼튼한 길을 닦아준 것이다"

 

10년간 중앙대학 총장

 

1932년 8월, 부친은 중앙대학 총장에 취임한다. 사실 부친은 당시 그다지 이 골치아픈 임무를 맡고 싶어하지 않았다. 당초, 중앙대학은 "9.18"사변후 해산위기에 처해 있었다. 당시 부친은 어려움을 잘 알고 있었다. 교육행정업무에 대하여도 이미 싫증이 나 있었다. 그래서 행정원회의에서 그를 파견해서 총장을 맡기기로 결정되었다는 것을 알고는 극력 사양했었다. 그러나, 그의 북대 스승이고 당시 교육부장을 맡고 있던 주가화가 친히 집으로 찾아와서, 계속 국가와 민족의 학술문화의 전도를 위한 대의를 내걸고 설득하여 부친이 결국 받아들이고 만다.

 

부친은 젊었을 때의 구미유학경험을 가지고 그가 이끄는 중앙대학이 과정, 설비 및 학술환경측면에서 모두 신식학교의 모범이 되도록 하고자 하였다. 부친은 성격이 강직하고 문제처리에서 양보와 타협이 없었다. 비록 당정요인이 그에게 교수를 추천하더라도, 그가 보기에 적합하지 않으면 한명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부친이 중앙대학에 있을 때, 자주 중국과 외국의 명사, 학자를 초청했는데, 항전시기의 주은래, 마인초등도 중앙대학에 와서 강연했다. 그의 구상에 따르면, 중앙대학의 목표는 당연히 베를린대학, 옥스포드대학, 파리대학등 국립대학중의 일류대학이었다.

 

1937년, 부친이 중앙대학을 맡은지 5년이 되는 해였는데, 크게 발전할 것을 준비하였다. 그가 나중에 형용한 바에 따르면 "장밋빛 대학꿈"이었다. 항전전에 중앙대학의 부지는 남경시내에 있었고, 복잡하고 시끄러워 공부하기에 적합하지 않았다. 게다가 부지도 좁아서 겨우 일,이천명을 수용할 수 있을 뿐이었다. 그는 남경교외에 5000내지 1만의 학생을 수용할 수 있는 대학을 만들고자 하였다. 그의 구상에 따르면 학교안에는 근대식의 실습공장과 농장도 갖추고 있어야 했다. 부친의 구상은 정부의 지원을 받아서 이미 240만위안의 제1차 건축비까지 승인되었다. 부친은 사람을 보내어 몇 개월을 조사한 끝에 남경주변에서 적합한 부지를 찾았고, 마지막으로 남문바깥 약 7킬로미터지점의 석자강(石子岡) 지방으로 정하게 된다.

 

원래의 계획에는, 1년이후 공학대학과 농학대학이 먼저 이사가기로 되어 있었다. 그런데, 신학교부치의 공사를 시작한지 몇 개월 후에 "77사변"이 터지면서, 부친의 장밋빛 대학꿈은 물거품이 된다.

 

항전이 시작되자, 중앙대학은 4번의 폭격을 맞는다. 제1차폭경후, 부친은 학교이전을 준비한다. 그 때, 일본군은 막 화북에 침입하였으므로, 많은 사람들은 중일간의 평화가능성을 믿었다. 그들은 부친의 학교이전조치가 사회민심을 동요시킨다고 보았다. 즉, 탈영과 같다는 것이라고 질책을 하였다. 부친은 해명하지 않았다. 새로운 학교부지에 대하여는 의견이 일치하지 않았다. 어떤 사람은 남경교외로 옮기자고 하였고, 어떤 사람은 상해조계지역으로 옮기자고 하였고, 어떤 사람은 무창의 낙가산으로 옮기자고 하였다. 부친은 중일전쟁이 오래 끌 것이므로 만일 학교를 옮긴다면 중경이 가장 좋다고 보았다. 남경에서 중경까지는 수로로 직접 도달할 수 있고, 사천의 산이 둘러싸서 방공에 용이하다고 본 것이다. 부친은 학교이전업무에 대하여 일찌감치 준비하고 있었고, "7.7사변"의 1년전에 부친은 총무처에 얘기해서 500여개의 상자를 만들고, 상자안에는 중요한 도서와 기기를 담을 수 있도록 하였다. 진짜 학교를 이전하게 되었을 때, 이 상자들은 많은 서적과 기기를 순조롭게 옮기는데 큰 작용을 하였다.

 

중앙대학의 이전은 비교적 순조로웠다. 학생들도 배를 타고 남경을 떠났다. 전학교의 도서와 기기는 모두 반출했다. 이뿐 아니라, 항공공정계의 교학용의 세 대의 비행기, 의하원이 해부에 쓰는 24구의 시신도 모두 계획대로 착착 이전되었다.

 

남경이 함락되기 하루 전에, 부친은 마지막으로 학교본부와 농학원이 소재한 정가교(丁家橋)를 순시했다. 목축장에 많은 닭, 오리, 돼지, 소, 양등이 있는 것을 보았는데, 이미 배나 차가 없어 옮길 방법이 없었다. 그는 할 수 없이, 직원들에게 가축은 포기하고 직원은 옮기라고 결정을 내려보냈다.

 

이 가축들도 학교가 돈을 들여 외국에서 수입해온 우량품종들이었다. 농장장은 버리기가 아까웠고, 밤새워 직원을 독려하여 배로 그들을 장강의 북안으로 옮겼다. 물길을 따라 하남, 하북성을 거쳐 천리길을 2년간 옮겨서 그들이 가축들을 기적적으로 중경의 사평패까지 이동시킨다. 남루한 의복의 직원들 한사람 한사람 보면서 부친은 참지못하고 눈물을 흘렸다. 아이들처럼 먼길을 돌아온 가축들과 뽀뽀를 했다. 이 일을 듣고는 남개대학의 총장인 장백령(張伯)이 감탄을 했다고 한다. "두개 대학은 모두 계견불류(鷄犬不留)했는데, 남개대학은 일본인의 비행기에 폭격을 받아 모두 죽었고, 중앙대학은 모조리 중경으로 옮겨왔다"

 

부친은 압력을 받으면서 학교이전결정을 내렸지만, 실제로 중국을 위하여 완전한 대학 하나를 남겨주게 된 것이다. 1937년 11월초, 중앙대학은 중경에서 다시 수업을 시작한다. 항전 8년동안 학문연구는 중단되지 않았으며, 손실을 최소화하고, 질서를 유지시켰는데, 이는 당시 전국 대학중에서 유일한 경우였다.

 

항전기간동안 부친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우리의 항정은 무력대 무력이고, 교육대 교육이고, 대학대 대학이다. 중앙대학이 상대하여야 하는 것은 일본의 동경제국대학이다" 이로써 부친의 기백과 책임감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항전시기인 1938년부터 전국에 연합입시를 시행하던 몇년동안 당시 전체입시생의 2/3는 중앙대학에 1차지원을 하였다. 중앙대학은 당시 전국의 대학중 학과가 가장 많고 규모가 가장 컸던 대학이다.

 

정치분쟁이 많았던 시기에, "중앙대학총장"이라는 직위는 그다지 좋은 자리는 아니었다. 부친은 각종 정치역량의 쟁투와 견제를 받았고, 많은 압력을 받았다. 1941년 여름, 피로해진 부친은 중앙대학 총장의 직위를 사임했다.

 

[참고자료]

 

<<북경학생전체선언>>

 

현재 일본은 만국평화회의에서 청도를 삼키고 산동을 관리하는 일체 권리를 요구하고 있고, 거의 성공하려고 하고 있다. 그들 외교의 대승리이면서, 우리 외교의 대실패이다. 산동의 대세가 한번 가면, 바로 중국의 영토가 파괴되는 것이다.

 

중국의 영토가 파괴되면 중국은 망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 학계는 오늘 줄을 서서 각 공사관에 가서 중국을 위하여 정의를 지켜줄 것을 요청하고, 전국공상각계에서 하나같이 일어나 국민대회를 열어, 대외적으로 주권을 쟁취하고, 대내적으로 매국노를 척결하자. 중국의 존망이 바로 이에 달렸다. 이에 전국의 동포들에게 두가지 신조를 말하고자 한다:

 

중국의 토지는 정복할 수는 있지만, 죽일수는 없다.

중국의 인민은 살륙할 수는 있지만 고개를 숙이게 할 수는 없다.

나라가 망했다. 동포여 일어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