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맹헌실(孟憲實)
중원은 왕세충의 천하였다. 수나라때의 동도(東都)인 낙양은 왕세충의 중요기반이었다. 군사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낙양을 차지하고 있다는 것은 군웅을 오시할 수 있다고 할 수 있다. 왕세충의 원래 성은 지(支)이고, 서역의 호인(胡人)이었다. 모친이 왕씨에게 개가하면서 성을 왕씨로 바꾸었다. 재능에 있어서 왕세충은 걸출했다. 그는 유가경전을 잘 알았을 뿐아니라, 역사에도 정통했다. 게다가 병법과 법률에도 뛰어났으며, 심지어 귀책(龜策), 추보(推步)술도 뛰어났다. 귀책, 추보라고 하면 아주 전문적인 것으로 생각할지모르지만, 실제는 점치는 것이다. 왕세충에게는 또 하나의 뛰어난 재주가 있는데, 바로 변론에 뛰어났다는 것이다. 역사서에는 왕세충이 얘기하면 그것이 이치에 맞지 않는 것을 알면서도 말재주가 워낙 뛰어나 아무도 그를 변론으로 누르지 못했다고 기재되어 있다. 이렇게 보면 왕세충은 문무를 겸비한 인재였다
왕세충은 또한 아부에도 뛰어났다. 그는 강도궁감(江都宮監)을 맡고 있을 때, 즉, 수양재가 양주에 머무는 행궁의 장관을 맡고 있을 때, 온갖 방법을 동원하여 황제를 기쁘게 해주기 위하여 애를 썼다. 수양제는 당연히 그를 아주 신임했다. 수양제가 안문(雁門)에서 포위를 돌파하였을 때, 왕세충은 황제를 보호하라는 명령을 받고 즉시 강도를 출발해서 밤낮을 달려 안문까지 갔다. 밤에도 갑옷을 벗지 않고 낮에는 세수도 하지 않으면서, 봉두난발로 무수하게 곡을 하면서 달려갔다. 비록 안문의 포위를 푸는데, 왕세충이 구체적인 공로를 세운 것은 없었지만, 그는 충성심을 그대로 나타냈고, 수양제까지도 감동을 받았다.
만일 그가 그저 윗사람에게 아부하는 것만 잘 했다면, 그저 심복이 되었을 뿐일 것이다. 그러나, 왕세충은 부하들도 아주 잘 다루었다. 매번 출정때마다 전리품을 모두 사병들에게 나누어주었다. 그래서 모두 왕세충을 위하여 죽어라 싸웠다. 황제의 신임에 사병들의 지지가 있어, 그는 지도자로서의 소질을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수나라 말기의 혼란이 시작되었다. 왕세충에게 기회가 온 것이다.
왕세충은 여러번 농민반란을 진압하여 수양제의 신임을 더욱 돈독히 했다. 그래서, 낙양이 이밀(李密)에게 여러번 공격을 받자, 수양제는 왕세충으로 하여금 주력부대를 이끌고 강도에서 출발해 지원하게 하였다. 왕세충은 이밀과 싸웠고, 당시 가장 치열한 전쟁터였다. 쌍방은 서로 이기기도 하고 지기도 하였다. 이밀도 낙양에 갖혀서 다른 것은 돌볼 겨를이 없었다.
수양제가 죽은 후, 왕세충은 금방 낙양을 지배한다. 이어 이밀을 격파한다. 이밀은 관중으로 도망치고, 부하들은 왕세충에게 투항하여, 그의 세력은 더욱 커지게 된다.
왕세충은 여러 직위를 가제게 되는데, 가장 자랑스러워했던 것은 정왕(鄭王)에 봉해진 것이다. 상국(相國)으로서 그는 짧은 기간내에 백성을 사랑하는 모습을 연출한다. 왜냐하면 더 큰 야심이 그의 속에서 길러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윗사람이 좋아하는 것이 있으면, 아랫사람은 반드시 그 일을 하게 된다. 환법사(桓法嗣)라는 도사가 정왕의 심리를 읽었다. 그래서 <<공자폐방기>>라는 책을 헌납한다. 이것은 그림인데, 위에는 나무막대를 들고 양을 모는 사람을 그렸다. 이 도사는 해석해서 말하기를, 수나라의 황제는 성이 양(楊)이고, 나무막대 하나는 바로 왕(王)자를 의미한다. 이는 바로 양씨의 다음에 왕씨가 천하를 얻는다는 의미이다. 그러니, 상국께서 바로 양씨의 뒤를 이어 천자가 되실 것이다. 이를 듣고, 왕세충은 아주 기뻐하고 바로 그 도사를 간의대부에 임명한다. 여론을 만들기 위하여, 왕세충은 많은 참새를 잡아서, 비단에 자기가 황제에 오르는데 유리한 글을 써서 목에 묶고 하늘로 날려보냈다. 나중에 사람들이 새를 잡아보고, 바로 보고했고, 새 목에 이런 글이 쓰여있다고 하였다. 그래서 그는 이것이 하늘의 뜻이라고 하면서 새를 잡은 사람을 크게 상주고 더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새를 잡아오게 시켰다.
619년의 봄날, 낙양일대의 새는 아주 운이 나빴다.
새처럼 왕세충의 손바닥안에서 놀아난 것은 황태제(皇泰帝) 양동(楊?)이 있다. 그는 당연히 황제의 자리를 왕세충에게 넘겨주고 싶어하지 않았다. 버텼지만, 역량의 차이가 컸다. 그래서 할 수없이 포기한다. 이해 4월에, 왕세충은 황제에 오르고 국호를 정(鄭)이라 한다. 연호는 개명(開明)으로 한다. 그의 왕씨성의 형제, 자손, 조카들은 모두 왕에 봉해진다. 수십년간 노력해온 왕세충은 드디어 인생의 최고조에 달한 것이다.
왕세충이 처음 황제가 되었을 때는 일을 열심히 잘했다. 처음 정사를 돌볼때에는 왕세충이 정말 열심히 했다. 그러나, 며칠되지 않아. 그는 지겨워지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조정일이라는 것이 해도해도 끝이 없었다. 그는 거리나 골목으로 나갈 때에도 백성들은 자리를 잠깐 피하면 되었다. 다른 황제들처럼 길에서 사람이 없도록 미리 조치하지는 않았다. 그는 백성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과거의 황제는 높은 곳에 앉아서 백성의 일을 잘 몰랐다. 나는 지위를 탐하는 사람이 아니다. 백성을 구원해주고자 하는 사람이다. 현재 황제가 되었지만, 자사와 마찬가지로 모든 일을 친히 처리할 것이고, 백성들과 함께 조정의 일을 협의할 것이다. 궁내의 제도가 너무 엄격하여 백성들이 고하고자 하는 일이 있어도 하기 어려울 것을 걱정하여, 그는 궁전의 바깥에서 조회를 하였다. 왕세충은 며칠간 이렇게 하다가 더 이상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아마도 지겨워진 것일 것이다.
황제는 쉽게 속일 수 있지만, 백성은 속이기 어렵다. 왕세충처럼 황제를 잘 속이던 사람은 관료사회에서는 아주 잘 승진하고 앞날이 탄탄하지만, 그러나, 똑같은 방법으로 천하백성을 대할 수는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연기하는 방법은 윗사람에게나 통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마도 내부의 문제로 인하여 왕세충은 더 이상 연기할 흥취를 잃었는지도 모른다. 많은 사람들이 도망치기 시작했다. 관중의 이연,이세민의 당나라로 갔다. 왕세충은 사법의 역량을 강화해서 오가상보제도(五家相保制度)를 시행해서 한 집이 도망치면 네 집에 연좌의 책임을 물었다. 왕세충은 성을 나서면 도망칠까 두려워해서, 병사를 이끌고 출전하는 자는 먼저 가족을 궁안에 인질로 남겨두도록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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