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당)

삭원례(索元禮) : 무측천시대에 페르시아에서 온 고문전문가

중은우시 2007. 9. 5. 20:49

글: 허휘(許暉)

 

삭원례는 무측천시대의 유명한 혹리(酷吏, 가혹한 관리)였다. 고향이나 생년은 미상이며 691년에 사망했다. 성격이 잔인하고 흉포하였으며, 다른 사람을 밀고하는데 재주가 있었다. 그리하여 무측천의 심복이 되었다. 삭원례의 손에 죽은 원혼은 수천명이 넘어 원성이 자자하게 된다. 결국 무측천은 인심을 수습하기 위하여 그를 속죄양으로 삼아 죽여버리게 된다.

 

삭원례는 페르시아인이며 눈두덩이 깊고, 코가 높았으며 얼굴에 수염이 가득했다고 한다. 낙양에 아랍인이 많기는 했지만, 설회의(薛懷義)의 의붓아비가 될 수 있었던 자는 삭원례 한명이었다.

 

설회의는 어떤 자인가? 그는 당대의 여황제인 무측천이 가장 총애하던 면수(面首, 남첩)였다. 설회의의 본명은 풍소보(馮小寶)인데, 키가 크고 힘이 셌으며 팔힘이 강했다. 원래는 여자들의 지분등을 파는 보잘 것없는 장삿꾼이었는데, 우연한 기회에 당고종의 딸인 천금공주의 시녀을 알게 되고, 함께 운우의 정을 나눈다. 천금공주는 무측천에 잘보이기 위하여 풍소보를 바친다: "소보는 비상재(非常材)가 있으니 가까이 두실만합니다" 여기서 비상재는 남자의 물건이 크다는 말이다. 무측천도 그에 대하여 아주 만족한다. 궁중을 드나들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풍소보는 머리를 깍고 중으로 만들고 낙양 백마사의 주지로 임명한다. 풍소부는 선비출친이 아니므로 다시 성을 설씨로 바꾸고 부마인 설소(薛紹)와 한 집안으로 만들어준다. 그리고 설소로 하여금 설회의를 숙부라고 부르게 시킨다. 이때부터 설회의는 교만방자하게 되며, 우대어사 풍사훈이 설회의의 수하가 범죄를 저질렀다고 탄핵하자, 설회의는 공공연히 대로를 막고 수하를 시켜 풍사훈을 거의 죽을 정도로 때려주게 된다. 그래도 설회의는 아무런 처벌을 받지 않는다.

 

이처럼 권력이 하늘을 찌르던 인물이 자기의 의붓아비를 그냥 둘리가 없었다. 그리하여 설회의는 무측천에게 삭원례를 추천한다. 그러면서 의붓아비가 사람의 신체에 고통을 받는 극한이 어디인지를 깊이 연구했고, 오랫동안 연구하다보니 고통에 익숙해 저셔, 의사가 환자의 고통을 보고도 무감각하듯이 그는 동정심이 없으므로 범죄자를 고문하는데 둘도 없는 적임자라고 말한다. 무측천이 그의 말을 듣고 흥미가 동하여 "의붓아비가 그것말고도 잘 하는게 있느냐"고 묻는다. 그러자 설회의는 "밀고도 잘합니다"라고 한다. 그러하 무측천은 크게 기뻐하며, "너의 의붓아비는 하늘이 내게 준 선물인가보다. 서경업같은 늙은이가 금방 반란을 일으켰는데, 아직 대신들 중에서 누가 그와 결탁했는지 알아내지 못했다. 너희 의붓아비로 하여금 이 일을 처리하게 하면 되겠다. 내일 들라고 하라."

 

다음 날 삭원례는 유격장군의 직위를 받고, 수도의 모든 감옥을 관장하게 된다.

 

삭원례가 부임한 후 첫번째 맡은 사건은 어보가(魚保家)의 사건이었다.

 

어보가는 시어사인 어승엽의 아들이다. 그는 무측천이 고발을 하는 것을 좋아한다는 것을 알고, 한가지 아이디어를 제출한다. 즉, 동궤를 만드는데, 이는 구리로 만든 상자이다. 이것을 지금의 우체통처럼 사용하여 모든 밀고서신은 이 곳에 한번 넣으면 다시 꺼내지 못하게 한 것이다.

 

무측천은 어보가로 하여금 4개의 서로 색깔이 다른 동궤를 만들게 한다. 그리고 조당의 4개 방향에 둔다. 청궤는 "연은(延恩)"이라고 이름붙여 동쪽에 두고, 고발자가 인사 농사에 관한 사항을 말하고 싶으면 넣게 하고, 단궤는 "초간(招諫)"이라고 이름붙여 남쪽에 두고, 시정의 득실에 관한 사항을 고하게 하고, 백궤는 "신원(申寃)"이라고 이름붙여 서쪽에 두고 억울한 사람들이 사연을 써넣게 하고, 흑궤는 "통현(通玄)"이라고 이름붙여 북쪽에 두고 천문, 역모에 관한 사항을 밀고하게 하였다. 이 네 개의 동궤는 국가의 진정, 고소등을 담당하는 것이었다. 무측천은 전문관리도 두고 열쇠를 관리하게 하였고, 정기적으로 궤를 열어 안에 든 서신을 꺼냈다. 무측천은 다시 조서를 내려, 낙양으로 고발하기 위하여 오는 자는 방문을 방해할 수 없도록 하였다. 그들에게 자세한 사정을 묻는 것도 금지했다. 낙양방문을 특별허가받은 자는 5품관리에 준하여 역참과 역마를 사용할 수 있었다. 낙양에 온 후에 신분이 누구이든 무측천이 친히 접견하고, 숙식을 제공했다. 현지정부가 상경을 방해하는 등의 경우에는 일률적으로 상경자가 고발한 죄명으로 처벌했다. 밀고자중 공로가 있는 자에게는 작위를 주었고, 최소한 풍성한 상을 내렸다.

 

이렇게 하자 밀고가 성행하게 되었다. 어쨌든 국고의 돈이 나가는 것이고, 허위밀고의 경우에도 처벌이 크지 않았으므로 밀고자가 줄을 이었다. 그들의 목표는 모두 4개의 동궤였다. 이중 사람이 가장 많이 찾는 것은 흑궤와 백궤였다. 청궤와 단궤는 그다지 인기가 없었다.

 

재미있는 것은 흑궤에 들어온 첫번째 밀고장이 바로 이 동궤를 만든 어보가를 겨냥한 것이었다는 점이다. 이 밀고신은 분명히 어보가의 친척이나 가까운 자들의 손에서 나온 것이다. 왜냐하면 밀고내용이 수년전 어보가가 일찌기 서경업을 위하여 병기를 개량해준 적이 있다는 내용이었고, 이렇게 병기를 개량해줌에 따라 나중에 서경업이 반란을 일으킬 수 있었다는 것이었고, 관병의 피해가 클 수밖에 없었다는 내용이었다.

 

무측천은 기대에 차서 첫번째 서신을 뜯었다. 그러나, 이런 밀고일 줄은 생각도 하지 못하여 가가대소를 했고, 즉시 어보가를 삭원례에게 넘겨 조사하게 시켰다.

 

이것은 삭원례에게도 첫번째 사건이다. 신임관리는 무서운 법이다. 삭원례는 이 사건을 끝까지 추궁하기로 결심한다. 그리하여 두 가지 추궁방법을 강구한다. 그것은 옥지(獄持)와 숙수(宿囚)이다. 옥지는 진흙으로 귀를 막고, 머리를 철바구니로 덮으며, 목에 칼을 채우고 머리칼을 매달고 더러운데 있게 하는 것이며, 숙수는 낮에는 먹지 못하게 하고, 밤에는 자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삭원례는 이 두 가지 방법을 사용하여 사람이 고통을 느끼는 극한을 시험했다.

 

어보가는 죽어라고 인정하지 않았다. 삭원례는 손을 흔들어 "철롱자(鐵籠子, 쇠로 만들어 머리를 씌우는 것)를 가져오라"고 하였다. 철롱자는 머리가 겨우 들어갈 작은 구멍이 있고, 곁에는 작은 나무쐐기가 머리의 각 부위를 찌를 수 있도록 되어 있었다. 어보가는 이것을 보고는 바로 그자리에서 다 인정해 버린다.

 

삭원례는 부임하자 마자 한 건을 해낸 것이다. 이때부터 "철롱자를 가져오라"고 한 마디만 하면 모두 해결되었다. 어보가는 바로 자기가 발명해낸 제도로 자신이 첫번째 희생자가 된 것이다.

 

삭원례는 첫 사건부터 순조롭게 처리하게 되자, 무측천이 더욱 총애한다. 이때부터 삭원례는 대담하게 일을 벌이기 시작한다. 범인 한명을 심문하면 끝까지 추궁하여 수백명을 연루시키고서야 끝냈다. 그의 손아래 죽은 자가 수천명에 이르렀다. 어떤 때는 대신이 입조하다가 돌연 체포되고, 이후 더이상 그의 소식은 들리지 않기도 하였다. 문무백관들은 모두 두려움에 떨었다. 아침에 입조할 때면 가족들과 작별인사를 했다. "다시 볼 수 있을 지 모르겠다" 퇴조한 후에는 가족과 만나서 가슴을 쓸어내리며 "다행이다"라고 하곤 하였다.

 

한번은 십여명의 시위들이 술집에서 모임을 가진 적이 있다. 술이 오르자, 한 시위가 농담처럼 말했다: "상도 못받을 줄 알았더라면 아예 노릉왕을 모시는 건데..." 노릉왕은 바로 금방 황제위에서 쫓겨난 당중종 이현이었다. 한 시위는 다른 사람들이 주의하지 않는 틈을 타서 몰래 빠져나와 삭원례의 사무실로 달려갔고, 이 대역무도한 발언을 밀고했다. 그들이 아직 술집에서 먹고 마시고 놀고 있을 때 이미 어림군이 문을 깨고 들어와 이들 시위를 모두 붙잡아 갔다. 삭원례가 나와서 하나하나로부터 자백을 받아냈다. 농담한 시위는 참형을 당하고, 다른 시위들은 "알면서도 고발하지 않았다"는 죄명으로 교살형에 처했다. 고발한 시위는 5품관직을 받았다.

 

삭원례가 시작단추를 끼자 그를 따라하는 사람이 늘어났다. 일시간에 혹리가 여기저기서 출현했다. 그중 삭원례와 나란히 이름을 떨친 인물이 있었으니, 바로 내준신(來俊臣)이다. 두사람을 합쳐서 내삭(來索)이라고 불렀다. 바로 찾아와서 체포한다는 의미이다. 내준신은 원래 무뢰한이었는데, 강간죄로 자사인 이속에게 장형 백대에 처해진다. 내준신은 이에 앙심을 품고, 글을 올려 이속이 역모를 꾸몄다고 밀고한다. 무측천이 그를 만나보니 사람이 영리하고 말을 잘하여, 삭원례와 같은 혹리의 자질을 가진 것으로 보고, 형벌과 옥송을 담당하게 시켰다.

 

내준신과 삭원례는 서로 의기가 투합했다. 두 사람은 공동으로 10가지 가형(枷刑)을 발명한다. 첫째는 정백맥(定百脈)이고, 둘째는 천부득(喘不得), 셋째는 돌지후(突地吼), 넷째는 착즉승(着卽承), 다섯째는 실혼담(失魂膽), 여섯째는 실동반(實同反), 일곱째는 반시실(反是實), 여덟째는 사저수(死猪愁), 아홉째는 구즉사(求卽死), 열째는 구파가(求破家)이다. 가형은 원래 사형이 아닌데, 이 두 사람의 손안에서 말만 들어도 간담이 서늘해질 형구로 바뀐 것이다. 이 열가지 가형의 이름만 들어도 누가 감히 친히 시험해 보고 싶겠는가.

 

삭원례는 학문수준이 낮았다. 그리하여 이런 것들을 체계화, 이론화하지를 못했다. 그러나, 내준신은 달랐다. 어쨌든 그의 부친은 도박꾼이기는 하지만 학문이 있었던 사람이다. 내준신과 삭원례는 공동으로 교재를 만드는데 이름이 <<나직경(羅織經)>>이다. 모두 12권으로 되어 있는데, 열인권, 사상권, 치하권, 공권권, 제적권, 고영권, 보신권, 찰간권, 모획권, 문죄권, 형벌권, 과만권이다. 그중 "사상권(事上卷)"은 어떻게 황제와 잘 지내는지를 설명하는 것이다. 거기에는 이런 말이 있다: "윗사람은 지혜가 없는 사람이 없고, 아랫사람은 현명한 사람이 없다. 공은 윗사람에게 돌리고, 죄는 자기에게 돌려라, 경계를 풀지 말며, 지혜와 용기를 드러내지 말라. 비록 아주 가까운 친인이라고 하더라도 끊어야 할 수도 있고, 나쁜 일이라 하더라도 사양하지 말라." "과만권(瓜蔓卷)"은 어떻게 아무 것도 없는데서 사건을 날조해내는지를 적은 것이다: "사건은 아주 크지 않으면 사람을 놀라게 할 수가 없고, 사안에 관련되는 사람이 많지 않으면 공로가 드러나지 않는다. 윗사람은 평안을 원하고, 아랫사람은 총애를 원하는 것이다. 억울한 사건이야 항상 있는 것이고 이것은 회피할 수 없다"

 

<<나직경>>은 중국의 첫번째 후흑학(厚黑學)의 저작이고, 두 사람은 당시에 이것을 대외에 공개하지 않았다. 무측천시대때 이런 기서가 있다는 소문은 있었지만, 그 내용을 직접 본 사람은 없었다.

 

두 사람은 나쁜 짓을 많이 해서 마침내 어보가처럼 스스로 벌을 받고 만다. 내준신은 나중에 무씨가족, 태평공주와 무측천의 장창종까지 건드리다가 결국은 벌집은 건드린 꼴이 되어 낙양의 서시에서 참형을 당한다. 형을 받는 날, 사람들이 모두 기뻐하며 말했다고 한다: "이제부터는 침대에 편안히 누워서 잘 수 있겠다" 그리고 형벌이 끝나자 사람들은 앞다투어 눈알을 파내고, 간을 가르고, 고기를 먹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순식간에 시신이 없어졌다고 한다. 그리고는 말을 타고 뼈를 밟았다고 한다.

 

삭원례는 나중에 뇌물죄로 하옥된다. 관리가 고문하고자 할 때, 삭원례는 절대 인정하지 않았다. 그래서 관리가 "삭공의 철롱자를 가지고 와라"라고 하자, 삭원례는 철롱자를 가져오기도 전에 그 자리에서 놀라 모두 인정하였다고 한다. 그리하여 삭원례는 옥중에서 죽게 된다.

 

두 사람이 죽은 후, <<나직경>>이 세상에 나온다. 이때부터 관료사회에서 떠돌게 된다. 관료사회에 있는 사람들은 이 책을 규화보전처럼 여겼다. 저명한 혹리인 주흥이 죽기 전에 이 책을 보고 스스로 그들만 못했다고 탄식했다고도 한다. "나는 헛되이 혹리짓을 하였고나 이 책을 보니 혹리가 무엇인지 분명히 알겠도다. 아침에 도를 깨달았으니 저녁에 죽어도 여한이 없다" 그리고는 죽음을 담담하게 맞이했다고 한다. 재상인 적인걸도 <<나직경>>을 다 본 후에 몸에서 식은 땀을 흘렸다고 한다. 무측천도 이 책을 본 후에 "이처럼 마음을 쓴다면, 짐도 따르지 못하겠구나"라고 하였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