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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당)

안록산(安祿山)은 어떻게 성공했는가?

by 중은우시 2007. 5. 29.

글: 독서삼매(讀書三昧)

 

초형유요종비화(草螢有耀終非火)

하로수단기시주(荷露雖團豈是珠)

 

반딧불이 반짝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불은 아니고,

연잎위의 이슬이 둥글기는 하지만 어찌 구슬이라 하겠는가?

 

-- 백거이 <<방언오수>>

 

무릇 관계에서 윗자리로 오르려고 하는 자는 모두 담쟁이덩굴과 마찬가지로 왕왕 커다란 뒷배경을 업고 타고오르는 경우가 많다. 당현종에게 줄이 닿기 전에, 안록산은 그저 유주절도사(幽州節度使) 장수규(張守珪)의 수하에서 일하는 별볼일 없는 인물이었다. 몸이 뚱뚱했으므로, 장수규는 그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매번 식사때마다 절반정도만 먹었다. 상사에게 잘보이기 위해서 다이어트를 한 것은 아마도 안록산이 처음일 듯하다. 결과적으로 이런 행동은 아주 큰 효과를 보았다. 장수규는 그를 아들처럼 대했다. 비록 배를 곯고 몸은 말라갔지만, 결국 그는 이 유주절도사를 양아버지로 삼는데 성공한다. 이는 직위를 유지하는데 있어서나 향후 발전하는데 있어서 어느 점에서 보더라도 아주 가능성이 많아졌다.

 

사실도 그러했다. 그는 금방 댓가를 받았는데, 별볼일 없는 하급관리에서 금방 평로병마사(平虜兵馬使)로 승진했다. 그러나, 안록산의 야심은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이 산에 오르면 다른 더 높은 산을 오르고 싶어지는 법이다. 이것은 등산하는 사람들의 공통된 병이다. 당현종에게 잘보이고 이 당나라의 황제의 환심과 신임을 얻기 위하여, 매번 당현종이 사람을 파견하여 변방군사업무를 점검하게 할 때면, 그는 매번 파견나온 사람들을 잘 접대했고, "걸위호언(乞爲好言, 황제에게 좋은 말을 해달라고 애걸했다)."(후당서.안록산전). 어떤 식으로 애걸했는지는 사서에 명확히 기재하고 있지 않다. 그러나 분명히 뇌물을 많이 바치는 외에, 스스로를 낮추면서 사람들에게 부탁하였을 것이다. 이 수단은 아주 잘 통했다. 그에게 잘 접대받은 관리들은 되돌아가서 당현종에게 안록산을 극구 칭찬해주었던 것이다. 이리하여, 세월이 흐르니, 자연적으로, 안록산의 이름은 당현종의 기억 속에 좋은 인상으로 확실히 박히게 되었다.

 

당현종에게 잘 보인 후에, 그는 새로운 목표를 위하여 달렸다. 더 높은 곳으로 오르기 위하여. 안록산이 한 두 가지 행동은 아주 고명한 수단이었다. 한번은, 당현종이 그로 하여금 태자인 이형(李亨)에게 인사하라고 시켰다. 그는 고의로 멍하니 서서 절을 하지 않았다. 좌우에 있던 사람들이 그에게 왜 절을 하지 않느냐고 말하자, 그는 짐짓 "신은 오랑캐입니다. 그래서 조정의 예절을 모릅니다. 태자라면 어느 정도 관직인가요?" 당현종이 그에게 말했다. "태자는 바로 장래의 황제이니라" 안록산이 기다린 것은 바로 이 말이었다. 그는 바로 말을 받아서 이렇게 말했다. "신이 우둔해서, 그저 폐하 한 분만을 알 뿐이고, 태자가 있는 줄 몰랐습니다" 이 말을 보라. 얼마나 뛰어난가. 스스로 구질구질하게 하지 않으면서, 매우 충후한 모습을 보이면서 강직한 황제에 대한 충성을 잘 나타내고 있지 않은가.

 

또 한번은 당현종이 근정전에서 연회를 베풀어서 그를 초대했다. 양귀비도 자리에 있었다. 몇잔의 술이 들어가자, 당현종은 기분이 좋아졌다. 안록산과 양귀비에게 결의오누이를 맺으라고 하였다. 그러나, 놀랍게도 안록산은 양귀비를 모친으로 모시겠다고 하고는 그 다리에서 양귀비에게 무릎꿇고 절을 하며 인사드렸다. 그리고 이후 매번 궁에 들어올 때마다 양귀비를 먼저 만났다. 당현종은 의아하게 생각해서 한번은 이렇게 물었다. "천하에 어찌 모친이 먼저이고 부친이 나중인 경우가 있을 수 있는가!" 안록산은 바로 이렇게 대답했다. "신은 오랑캐이므로 오랑캐의 예절로는 모친이 먼저이고, 부친이 다음입니다. 저는 습관이 되다보니 당나라의 예절을 잊어버렸습니다" 사실 그는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당현종이 양귀비의 말이라면 뭐든지 들어준다는 것을. "곡경함유(曲徑含幽, 굽은 길이 그윽함을 품고 있다)"라고 양귀비에게 잘보이는 것이 직접 당현종에게 잘보이는 것보다 훨씬 함축적이고, 절반의 노력으로 배의 효과를 볼 수 있는 길이었다.

 

과연 그러했다. 안록산은 양귀비의 총애를 받았을 뿐아니라, 당현종의 신임도 얻게 되었다. 그리하여 얼마 되지 않은 시간내에 그는 평로(平虜), 범양(范陽), 하동(河東) 삼진의 절도사를 겸임하게 된다. 이 절도사는 보통이 아니다. 표면적으로는 직급이 군구의 최고사령관에 불과하지만, 실제로 이 절도사는 군사권을 장악할 뿐아니라, 동시에 행정권과 재정권까지 장악하게 되어, 지방의 토황제(土皇帝)라고 할 수 있다. 당현종때는 모두 10명의 절도사가 있었는데, 안록산 1사람이 3개 절도사를 독차지했다. 이때의 안록산은 병사 18만을 수하에 두었고, 당현종이 직접 관장하는 금위군은 6,7만에 불과했다. 그래서, 안록산은 "삼진절도사를 겸하면서, 상과 벌을 스스로 내리고, 날로 교만방자해졌다"(통감기사본말. 권31). 결국 당나라에 반란을 일으키니 어찌보면 필연적인 결과였다.

 

그렇다면, 안록산이 이러한 지위에 오르고, 당현종과 거의 맞먹을 정도의 실력을 갖추게 된 것은 단지 그가 자신을 잘 감추고, 당현종의 총애를 받았기 때문인가? 그건 아니다. 여기에는 심각하고 복잡한 역사적인 배경과 정치적인 요소가 있다. 그러나, 음미할만한 것은 안록산이 위로 올라가는 과정에서 그가 취한 행동은 그다지 고명한 것도 아니었는데, 정말 당현종이 전혀 눈치채지 못했을까? 그리고, 안록산에게 삼진절도사를 수여하면서 병력이 자기가 친히 지휘하는 것보다 많게 되었는데, 이처럼 병권을 거꾸로쥐게 되는 경우에 있을 수 있는 리스크를 당현종은 깨닫지 못했는가? 40여년간 황위에 있던 당명황이 어떤 자를 보지 못했으며, 어떤 일을 겪지 않았겠는가. 설마 정말 이런 간단한 문제를 눈치채지 못했던 것일까? 이는 정말 이해가 가지 않는 점이기는 하다.

 

당나라 사람인 조린(趙璘)이 쓴 <<인화록. 권1>>에 기재된 내용은 음미해볼만하다. 그리고 우리의 이런 의문을 푸는데 약간의 도움이 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안록산이 조정에 배알하러 왔을 때, 숙종(肅宗)은 여러번 그가 신하같지 않다고 얘기했지만, 현종은 아무 말도 없었다. 하루는 태자를 불러 여러 왕들과 격구를 하는데, 태자는 그를 말에서 떨어뜨려 상하게 하려고 했다. 비밀리에 태자에게 말하기를: "나도 의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 오랑캐는 꼬리가 없다. 너는 그냥 두어라."

 

이 내용은 무슨 뜻인가? 원래 안록산이 당현종을 만나러 왔을 때, 그여 여러가지 행적이 태자인 이형에게 발각되었다. 태자 이형은 바로 나중의 당숙종이다. 그리하여, 태자 이형은 안록산의 행동의 의심스럽고, 엉뚱한 마음을 품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 일을 부친인 당현종에게 말했다. 그러나, 당현종은 아무런 의사표시도 하지 않았다. 한번은 당현종이 태자와 여러 왕을 불러 격구(말을 타고 공을 치는 운동)를 하라고 했다. 안록산은 당시에 동평군왕이었으므로 역시 격구하는 사람에 들어 있었다. 태자 이형은 이 기회에 안록산을 제거하려고 생각했으나, 당현종이 동의하지 않았다. 당현종은 태자 이형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도 안록산에 대하여 의심을 전혀 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나는 일찌기 알아봤다. 그는 꼬리가 없으니 진룡(眞龍)이 아니고, 기세를 얻지 못했다. 그러니 잠시 그를 신경쓰지 말라"

 

안록산이 처음으로 조정에 들어온 것은 천보3년(744년)이었다. 이를 기준으로 추산하면, 당태종이 태자 이형에게 이 말을 한 시기에 당현종의 나이는 분명히 60세정도였을 것이다. 미신적인 요소를 배제하고 말하자면, 그의 말속에서 쉽게 알아차릴 수 있는 것은, 이 때의 당현종은 자부심이 강했다는 것이다. 단록산의 흑심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한 것이 아니라, 아예 안록산을 안중에 두지 않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고, 간단히 말하면, 안록산 정도는 별 것 아닌 것으로 치부했던 것이다. 이미 황제위에 30여년을 있었고, 개원성세를 이루고 천하가 태평하였으니, 대당제국이라는 큰 배가 좁은 강물에서 뒤집어지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당현종의 이런 심리는 전혀 근거없는 것은 아니었다.

 

이런 각도에서 보자면, 당현종이 안록산을 중용한 것과 최종적으로 안사의 난을 불러오게 된 것의 당현종측면에서의 이유를 살펴보자면, 역사학자들이 말하는 것과 같이 그가 말년에 갈수록 멍청해져서 그런 것이 아니라, 진정한 이유는 완전히 당현종의 '개원지치'의 창립자로서의 자리에 오래 앉아있었던 데서 오는 자부심때문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바로 이런 자부심으로 인하여 안록산은 위로 올라갈 수 있는 기회를 잡을 수 있었다. 그러나, 역사는 나름대로의 철칙이 있다. 자부심은 댓가를 치러야 한다. 위로 많이 올라갈 수록 떨어지면 더 아프다. 이 점에 대하여, 당현종 말년의 처지, 특히 안록산의 최후의 결말은 모두 아주 좋은 사례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