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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당)

이승건(李承乾) : 당태종의 불운한 황태자

by 중은우시 2007. 5. 28.

이승건 묘비 

 

 

일대의 명군인 당태종은 태자교육에 아주 신경을 많이 썼다. 그러나, 결과는 그의 생각과 달라졌고, 그가 처음에 세웠던 황태자는 그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후보자가 아니었다. 그리하여 정관말년이 되면서, 태자를 폐위하는 일과 새로 태자를 세우는 일이 당태종의 정치역정에서 가장 골치아픈 일로 등장했다.

 

황당한 태자

 

이승건은 당태종의 적장자이고 모친은 장손황후이다(당태종과 장손황후사이에 세 아들을 두었는데, 태자 이승건, 위왕 이태, 진왕 이치가 그들이다). 무덕2년(629년) 장안의 승건전(承乾殿)에서 태어났으므로, '승건'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무덕9년(626년) 10월, 태종이 즉위하면서, 나이 겨우 8살인 이승건은 태자의 자리에 올랐다. 어릴 때의 이승건은 아주 총명하고 영리했다고 하며, 태종도 그를 아주 아꼈다. 그리하여 덕있는 대신들을 그의 스승으로 삼게 하여 엄격하게 가르쳤다. 처음에는 이승건도 열심히 배우고 진전이 있었다. 그리하여 태종과 조정대신들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았다. 태종이 장안을 비울 때에는 자주 그를 대리하여 정사를 돌보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승건은 궁중에서 오랫동안 여인들의 손에서 자라다보니, 어려서부터 나쁜 습관이 적지 않게 들었고, 생활도 황당하고 퇴폐적이었다.

 

사서의 기재에 의하면, 태자 이성건은 사람을 시켜 근 2미터 높이의 청동로(銅爐)를 만들게 하고, 아가리가 큰 솥도 만들도록 하였다. 노비들을 시켜 백성들의 가축을 훔쳐오게 하여서, 친히 훔쳐온 가축들을 솥에 넣고 끓인 후, 수하들에게 나누어주고 먹게 하였다. 이승건은 돌궐말을 배우는 것을 즐겼고, 돌궐옷을 입는 것을 좋아했다. 그는 특별히 돌궐인과 비슷한 인상의 시종을 두었으며, 5명으로 하나의 부락을 만들고, 머리에는 변발을 하게 하고, 몸에는 양가죽옷을 입게 하였으며, 초원으로 가서 양을 기르게 했다. 어떤 때는 '가짜로 죽는 놀이'를 즐겼는데, 그는 자기의 수하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내가 죽은 칸이라고 생각해라. 그리고 현재 죽었다. 너희는 돌궐의 풍습에 따라 장례절차를 해라" 그후 죽은 사람처럼 땅바닥에 누웠다. 모든 주변사람들은 함께 곡을 하고, 말을 타고, 시체를 둘러싸고 달렸다. 이것은 돌궐의 풍습을 따른 것이었다. 그리고, 칼로 자기의 얼굴을 긋기도 했다. 이승건은 이런 놀이로 시간가는 줄을 몰랐다. 그리고 이렇게 말하기도 하였다. "언젠가 내가 제국을 통치하게 되면, 반드시 수만의 기병을 이끌고 금성(지금의 난주시)의 서쪽으로 가서 사냥하리라. 그리고 머리카락을 풀어헤치고, 돌궐인이 되리라. 그리고 아스나스마(阿斯那思摩)에게 의탁할 것이다. 만일 그가 내게 장교직이라도 준다면, 내가 다른 사람보다 절대 못하지 않을 것이다"

 

이승건이 말한 아스나스마는 돌궐 아스나부의 추장이었다. 이승건은 당나라의 황태자가 되어서, 공공연히 천하를 얻은 후 돌궐추장의 부하가 되겠다고 말한 것이다. 비록 이 말이 농담이라고 하더라도, 너무 한도를 벗어났다. 적어도 황태자의 신분이기 때문에, 당태종이 대노할 일이었다.

 

이승건은 숙부 이원창(李元昌)과 관계가 매우 좋았다. 자주 함께 놀러나가곤 했다. 어떤 때에는 이승건이 좌우 시종을 두 팀으로 나눈 후, 두 사람이 각각 한 팀씩을 통솔하여, 모두 털로 만든 갑옷을 입고 손에는 죽창과 죽도를 들고 진열을 가다듬어 서로 전쟁놀이를 하곤 하였다. 창으로 찌르고 칼로 내리쳐서 피가 흐르는 놀이를 오락처럼 즐겼다. 명령을 듣지 않는 자가 있으면, 나무에 묶어놓고 심하게 때려서, 적지 않은 위사들이 목숨을 잃었다. 이승건은 자주 이렇게 말하곤 했다: "내가 황제가 되면, 어화원에 1만명이 머물 병영을 만들 것이다. 그리고 한왕(漢王, 이원창)과 각각 지휘하여 사병들의 육박전투를 구경할 것이다. 즐겁지 않겠는가?" 그리고는, "내가 황제가 되면, 반드시 모든 즐거움은 다 누릴 것이다. 누군가 하지 말라고 권하면, 바로 죽여버리겠다. 수백명을 죽이고 나면, 아마도 사람들이 더이상 하지 말라고 권하지 않지 않겠느냐"

 

이승건의 언행은 황당할 뿐아니라, 당태종의 기대와 점점 더 멀어져 갔다. 이씨가족은 무력으로 천하를 얻었다. 그러나, 역취(逆取)했으나 순수(順守)해야 했다. 말등에서 천하를 얻었지만, 말등에서 천하를 다스릴 수는 없었다. 이 이치를 당태종은 너무나 잘 알았다. 그래서, 정권을 잡은 이래로 그는 문무를 정비하고, 예약을 만들고, 현명한 선비들을 불러모았으며, 백성들을 기르는데 힘썼다. 그런데, 이승건은 태종의 이러한 조치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였고, 좋아하는 것은 여전히 오랑캐의 풍속과 전쟁놀이였다.

 

재미있는 일은 이승건은 거짓 이미지를 만들어 조정신하들을 속이는 나쁜 습관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는 자주 태자궁 밖에 있는 관리들 앞에서는 충효의 도리를 말하곤 하였다. 그리고, 중요한 대목에서는 심지어 눈물을 흘려가면서 말했다. 그러나, 궁으로 돌아오면, 그의 심복들인 비열한 소인배들과 함께 놀면서는 온갖 악행을 서슴지 않았다. 만일 대신이 그에게 권하러 오면, 이승건은 그들이 온 뜻을 알아차리고 아주 감격함을 표시하고 친히 나가서 절을 하며 맞이하였고, 아주 간절한 태도로 자기의 잘못을 인정하였다. 그리하여 그에게 권하러 온 사람이 할 말이 없도록 만들었다. 침궁내의 비밀은 외인은 알 수 없었다. 그리하여 당시 대신들은 이승건을 아주 잘 보았고, 일치하여 그가 현명하고 능력있는 황태자라고 칭송했다. 이승건의 "잘못을 감추는" 습관은 결국 그의 정치적 앞날을 가로막아 버렸다.

 

부친과의 불화

 

이승건이 위조한 가짜이미지는 당태종의 눈을 벗어날 수 없었다. 당태종은 이승건의 나쁜 습관을 발견한 후, 처음에는 그를 포기하지 않았다. 이승건이 나이가 어렸으므로, 개조될 수 있다고 보았고, 좋은 스승이 가르침을 주면 아주 좋은 황태자로 배양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정관7년, 당태종은 이승건을 위하여 뛰어난 스승을 한 사람 물색한다. 황제에게 직언하기로 조야에 이름난 중서시랑(中書侍郞) 두정륜(杜正倫)과 또다른 스승인 우지녕(于志寧)으로 하여금 태자교육을 담당하게 하였다. 두정륜이 태자의 스승으로 막 임명될 때, 당태종은 이렇게 당부했다: "태자는 어려서부터 깊은 궁궐에서 자라, 백성의 고통을 귀와 눈으로 듣고 보지 못했으니, 교만하고 놀기 좋아하지 않겠는가. 경들이 잘 간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 당태종으로서는 이승건을 위하여 여러가지로 생각하였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이 때, 이승건은 각질(脚疾)을 앓았다. 그리하여, 조정에 나와 당태종을 알현할 수 없었고, 이로써 당태종이 직접 교육시키고 훈계할 기회가 없었다. 그리하여 비열한 소인들이 그 틈을 뚫고 접근했고, 이 젊은 황태자를 방종의 길로 들어서게 하였다. 우지녕, 두정륜의 직간으로도 이를 만회할 수 없었다.

 

당태종은 연속하여 조정의 중요한 대신들을 태자 이승건의 스승으로 파견했다. 이승건에게 학식과 책략을 전수할 뿐아니라, 더욱 중요한 것은 고굉대신들의 명망을 이용하여 이승건을 핵심으로 하는 무리를 구성하게 하려는 것이었고, 이로써 황위계승의 기초를 삼고자 함이었다.

 

아쉽게도, 이승건은 이런 기회를 이용하여 자기의 재주를 늘이지 못하였고, 자신의 조정에서의 위신을 드세우지 못했다. 그는 이런 원로대신들과 친밀한 관계를 맺고자 시도한 적은 있다. 예를 들어, 이강(李綱)이 태자소부를 지낼 때, 각질을 앓아서, 신발을 신고 걸을 수가 없었는데, 이승건은 위사를 보내서 그를 가마에 태워 전내로 모시고 왔고, 친히 절을 하고 가르침을 받았다. 그러나, 이승건의 나쁜 버릇은 바로 나타났고, 스승들과의 관계도 계속 긴장되었다. 스승들의 직언에 그는 불편해 했고, 스승들이 뒤로 당태종에게 고하는 것에 대하여도 고민했다. 나중에는 이승건이 심지어 자객을 보내어 스승을 암살하려고 하기도 했다. 이승건의 스승인 우지녕은 하마터면 자객의 손에 목숨을 잃을 뻔했다.

 

이승건은 평소에 연회를 베풀기를 좋아했고, 동성애도 즐겼다. 10여세의 용모가 아름답고 춤과 노래를 잘하는 사내아이 칭심(稱心)과 이승건은 함께 잤다. 이런 소문은 금방 퍼졌다. 당태종도 이 소식을 듣고 화를 억제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칭심을 주살했고, 이승건을 호되게 나무랐다. 그러나, 이승건은 전혀 회개하지 않았고, 태자궁의 한 방에 칭심의 조각상을 모셔놓고, 밤낮으로 제사를 지냈다. 그리고 몸이 좋지 않다는 핑계를 대고 몇달간 조정에 나가지 않기도 하여, 부친과 대립각을 세웠다.

 

이승건은 병으로 인하여 다리를 절었다. 이것만으로도 당태종의 호감은 많이 떨어졌다. 거기에 이승건의 성격상의 결함은 더더욱 당태종의 실망을 깊게 하였고, 나중에는 싫어하는 정도에 이르렀다. 역사서적을 뒤져보면, 정관초기에 당태종은 자주 동궁에 갔고, 이승건의 학업진전을 체크했었다. 정관 7년에 부자는 때때로 얼굴을 마주하였다. 그러나, 이 이후에는 당태종이 동궁을 찾아갔거나, 이승건과 얘기를 나누었다는 기록이 없다. 부자간에 날로 더 소원해 졌고, 이는 이승건이 나중에 황태자위를 놓고 다툴 때, 아주 불리한 지경에 처하게 만든다.

 

모반과 폐위

 

당태종이 이승건을 멀리하다가 폐위하기에 이르는 과정은 대체로 다음과 같다. 대체로는 정관7년부터 소원해진다. 이해 정월, 그는 자제들 17명을 다시 조정하여 왕으로 봉한다. 2월에 5명이 나이가 어려서 봉지로 가지 않은 것을 제외하고는 나머지 12명은 조서를 내려 각주 도독으로 가도록 한다. 다만, 상주도독인 위왕 이태만은 봉지로 내려가지 않고, 장량(張亮)이 상주도독의 권한을 대리한다. 태종은 이태를 신변에 남겨두었는데, 이는 이미 태자를 폐위하겠다는 생각이 있다는 의미이다.

 

이승건은 부황이 자신을 점점 멀리하는 것을 잘 알고 있었고, 위왕 이태를 좋아하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이 이미 총애를 잃었고, 태자의 지위가 위험하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당시의 이승건은 악명을 멀러 떨쳤을 뿐아니라, 병도 들었고, 태종의 신임도 잃고, 대신들의 지지도 없었다. 그리하여 아주 곤란한 지경에 처하게 된다. 이런 곤란한 상황하에서 그는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된다.

 

이승건은 사람을 시켜 이태의 집에 있는 관리라고 하면서, 당태종에게 "친계밀주(親啓密奏)"를 올리게 한다. 그리고는 이태의 각종 악행을 지적한다. 그러나, 당태종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닫고 고발한 자를 붙잡는다. 그리고 조사를 시작한다. 고발계획이 실패하자, 이승건은 다시 심복인 흘간승기(紇干承基)를 보내어 이태를 암살하게 한다. 결과적으로 이것도 실패한다. 그래서, 이승건은 암중으로 정치상 실의에 빠져 있던 숙부 이원창(李元昌) 및 대신 후군집(侯君集)등과 연락하여, 피를 뽑아 맹세하고 정변을 일으켜 태종을 퇴위시킬 것을 계획한다. 부마인 두하(杜荷)가 이승건에게 내놓은 방안은 "하늘의 기상에 변화가 있을 때, 즉시 행동으로 옮겨야 한다. 네가 갑자기 중한 병에 걸려서, 생명이 위독하다고 하면, 황제는 친히 너를 보러 올 것이니, 우리의 책략이 성공할 수 있을 것이다"라는 것이다.

 

정관17년(643년) 2월, 이승건이 정교하게 정변을 계획하고 있을 때, 당태종의 다섯째 아들인 제왕(齊王) 이우(李祐)가 제주(齊州, 지금의 산동성 역성)에서 반란을 일으킨다. 이승건은 이 소식을 들은 후, 득의양양하게 흘간승기에게 말한다. "태자궁의 서쪽 담장은 황궁과 스무보밖에 떨어져 있지 않다. 나와 함께 일하는 것을 제왕과 어찌 비교할 수 있겠는가?"

 

제왕 이우의 반란은 곧바로 진압되고, 반역사건에 대한 심문과정에서, 이승건의 심복인 흘간승기가 연루되었음이 드러난다. 4월 1일, 흘간승기는 심문과정에서 이승건의 밀모과정을 고변한다. 태종은 크게 놀라고, 즉시 사도인 장손무기, 사공인 방현련, 특진인 소우, 병부상서인 이세적을 모아서 대리사, 중서성, 문하성이 공동으로 특별법정을 구성하여 심리를 진행한다. 이 특별법정은 거의 모든 조정의 대신들이 모인 곳이었다. 이를 보면 당태종이 이승건의 밀모사건에 대하여 얼마나 중시하는지를 알 수 있다. 특별법정은 조사를 거쳐, 모반의 증거가 확실하다고 결론짓는다. 태종이 시종관리들에게 물었다. "어떻게 이승건을 처리하는 것이 좋겠는가?" 아무도 감히 이에 대하여 대답하지 못한다. 통사사인인 내제(來濟)가 이렇게 건의한다: '폐하는 여전히 자부(慈父)입니다. 태자로 하여금 천수를 다하게 하는 것이 가장 좋은 결말일 것입니다' 태종도 이 건의를 받아들인다.

 

4월 6일, 당태종은 명을 내려 이승건을 태자에서 축출하고, 평민으로 만들고, 우령군에 감금시킨다. 그리고 정관 17년 9월 7일 이승건을 검주(黔州)로 유배보낸다. 이승건은 검주에 도착한지 얼마되지 않아 돌연 사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