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중국과 문학/중국의 전설

진세미(陳世美)와 진향련(秦香蓮)

by 중은우시 2007. 6. 11.

중국의 희극무대에서 쉬지 않고 공연되는 것은 <<찰미안([金+則]美案)>>또는 <<진향련(秦香蓮)>>이라고 불리우는 극이다. 이 극에서 진세미(陳世美)는 "다른 여자를 보면 마음이 바뀌고, 배은망덕한(見異思遷, 忘恩負義)" 사람의 대명사가 되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어떤 남자가 자기의 조강지처를 버리는 것을 보면 바로 "진세미"라는 세 글자가 튀어나온다.

 

그렇다면, 역사상 진세미라는 사람이 존재하긴 했었는가? 그는 과연 정말 부귀를 위하여 진향련을 버렸던가?

 

전통희극에서의 진세미는 스스로 자기의 집안을 "호광(湖廣) 균주(均州) 사람"이라고 하고 있다. 고대에는 현재의 호북성, 호남성을 합쳐서 호광행성(湖廣行省)으로 불리운 것은 명나라와 청나라초이다. 송나라때까지는 성급 지방단위가 "로(路)"였다. 호북은 형호북로(荊湖北路)였고, 호남은 형호남로(荊湖南路)였다. 진세미가 호광사람이라면, 그 연대는 분명 명,청시기가 되어야 할 것이고, 포청천(包靑天)이 살아있을 송나라 때는 아니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의문이 드는 것은 명청시대의 진세미가 어떻게 송나라의 포청천에게 붙잡혀 혼나느냐는 것이다. 200년동안 <<찰미안>>이 비록 중국인의 가가호호에서 다 아는 이야기가 되었고, 진세미의 악명은 천하에 넘치게 되었지만, 공식자료들을 살펴보면, <<찰미안>>이라는 것은 결국 연극무대에서 일어난 역사상의 "억울한 사건"이다.

 

재미있는 일의 하나는 원래의 호북 균현(均縣, 지금의 丹江口市)에는 지금까지도 이런 말이 전해져 온다. "북문가(北門街)에서는 진세미를 누래하지 않고, 진가루(秦家樓)에서는 진향련을 노래하지 않는다" 강구시의 동덕륜(童德倫) 노인이 수십년간 고증한 바에 의하면, 진세미는 역사상 존재했었다는 것이다. 그의 원형(原型)은 진년곡(陳年谷)이라는 사람인데, 호가 숙미(熟美)이고, 균주사람이며, 청나라초기에 진사를 지냈다. <<균주지. 진사편>>에 의하면, "순치12년, 을미과...진년곡, 관직은 귀주사석도겸안찰사부사, 포정사참찬에 이르렀다"고 되어 있다. <<호북역사인물사전>>에도 "진세미. 청나라 관리. 원명은 년곡, 다른 이름은 숙미, 균주사람, 관료집안에서 태어났다. 청나라초에 북경에 유학오고, 순치8년(1651년) 신묘과의 진사가 되었다. 처음에 하북 어느 곳의 지현을 지냈고, 나중에 강희제의 발탁을 받아 귀주분수사인부 겸 석도안철사를 지내고, 포정사 참정을 지냈다"

 

현지의 민간전설과 1992년 단강구시에서 별견된 진숙미의 비문에도 모두 이렇게 기재되어 있다. 진숙미는 청렴한 관리이고, 강직하며 아부하지 않았고, 백성을 잘 살피는 청백리였다. 이같은 청백리가 어떻게 "가난을 싫어하고 부귀를 쫓으며, 처를 죽이고 아들을 없앤"인물로 묘사되게 되었을까? 여기에는 확실히 연유가 있다.

 

진숙미가 관료로 있을 때, 동향동학(同鄕同學)들이 몰려와 관직을 얻으려 앴다. 그는 여러차례 접대하면서 열심히 공부해서 진사가 되어 관직에 나서라고 하였다. 나중에 찾아오는 사람이 더욱 많아지자, 더이상 응대하기 힘들었다. 그래서 모두 사절하게 된다. 균주성 교외에 있는 진가파(秦家坡)에 살고 있던 동창인 호몽접(胡夢蝶)은 예전에 그가 북경으로 과거치러갈 때, 돈을 주면서까지 도와준 적이 있었다.호몽접도 또다른 동창인 구몽린(仇夢麟)을 데리고 진숙미를 찾아와서 약간의 관직을 얻으려고 하였는데, 거절당하자, 보복하려는 마음이 생겼다.

 

원한을 품고 돌아온 호몽접과 구몽린은 하남 남양으로 왔는데, 마침 현지에서 희곡 <<비파기>>를 공연하고 있었다. <<비파기>>는 중국 고대 희곡사상 유명한 비극이며, 원나라때 창작되었다. 내용은 하남의 서생 채백해(蔡伯楷)가 부모와 처자를 이별하고 북경으로 가서 과거를 치는데, 여러번 응시한 끝에 장원이 되었다. 이후 우승상(牛丞相)의 눈에 들어, 우씨집에 데릴사위로 들어가고, 승상의 아끼는 사위가 된다. 채백해는 부귀영화를 탐하여 일찌감치 부모와 처자를 깡그리 잊어버렸다. 고향이 연속 가뭄이 들어, 부모가 모두 죽고, 처인 조오랑(趙五娘)이 생활할 방법이 없어, 그저 비파를 끌어안고 길거리에서 노래를 부르면서 구걸하며 연명한다는 이야기이다.

 

두 사람은 이 극을 보면서 바로 배은망덕한 이야기를 읊은 것이라는 것을 알고, 바로 떠오르는 바가 있어서, 희극단에 자기의 뜻을 정하고, <<비파기>>의 원래 이야기를 약간 고쳐서, 극중의 배은망덕한 남자주인공을 자기들이 원한을 품은 진세미(진숙미)로 바꾸고, 여자주인공은 진향련으로 바꾸게 된다. 이리하여 <<비파기>>보다 뛰어난 새로운 극을 만들어내고, 나중에 <<새비파(賽琵琶)>> 또는 <<진향련포비파(秦香蓮抱琵琶)>>라는 이름으로 전해진다.

 

극의 내용은 비슷하나, 이름을 바꾸고, 진세미를 부마(駙馬)로 만들었으며, 개작후의 <<비파기>>는 하남, 섬서, 호북일대에서 인기리에 공연되었다. 그리고 관중들의 동정과 공감을 샀다. 나중에 이 극은 다시 송나라때 포청천이 청나라때의 진세미를 혼내주는 이야기로 되고, 다시 고사는 송나라때 발생한 것으로 변경되며, 극의 명칭도 <<철미안>>으로 바뀌게 된다.

 

전해지는 바에 의하면 청나라때 한 희극단이 <<진향련포비파>>를 공연했는데, 극을 보는 사람이 아주 많았다. 사람들은 극이 너무 짧다고 느끼고, 반나절이 되지 않아 끝났는데, 돌아가려 하지 않았다. 그래서 단장은 할수없이 정극의 앞부분에 <<진주방량(陳州放糧)>>의 짧은 극을 끼워넣었다. 극은 정오가 되어서, 진세미의 가장(家將)인 한기(韓琪)가 명을 받아 진향련을 추살하려 하다가, 다시 진향련을 풀어주고, 한기는 자결한다. 진향련은 자녀를 데리고 피눈물속에서 통곡하면서 극이 끝난다. 극이 또 끝난 것이다. 그러나, 극을 보던 사람들은 그래도 돌아가지 않았고, 모두 소리쳤다: "진세미를 죽여라" 돌맹이, 기와조각이 연극대위로 던져졌다. 단장은 급히 뒤로 도망치고, <<진주방량>>을 연기하던 "포청천"이 아직 못을 벗지 않은 것을 보고는, 바로 임기응변으로 그를 내보내서 다시 계속하게 하였다. "포청천"은 "나는 송나라때의 사람이고, 진세미는 청나라때 사람인데, 서로 수백년이 떨어져 있는데, 어떻게 함께 올라서 창을 한단 말입니까"라고 한다. 단장은 "진세미는 부마인데, 누가 감히 죽이겠습니까. 그저 포공께서만이 철면무사하시니 죽일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리하여 백성의 분을 풀고 극을 끝내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래서 포청천이 다시 옷을 정리해서, 왕조, 마한, 장룡, 조호와 함께 올라갔다. 그가 진세미를 죽이는 장면에 이르자, 관중석에서는 환호성이 울렸다. 그 이후, 소극 <<진향련포비파>>는 대극 <<찰미안>>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균주에서는 <<찰미안>>을 공연한 적이 없다. 청나라 말기에 하남의 극단이 균주에 와서 이 극을 공연할 때, 진씨의 후손들이 보고는 화가나서 그 자리에서 피를 토했다고 한다. 진숙미의 8대손은 집안 사람들을 조직하여 그 자리에서 극단의 옷가방을 부궈버리고, 연기가 몇 명을 죽이거나 다치게 해서 연극은 할 수 없이 중단되었다고 한다.

 

옛날에 문인들간에 직접 그 이름을 부르는 경우는 드물었고, 대부분 자(字)나 호(號)로 불렀다. 그래서 진숙미는 동창들이나 친구들이 진년곡을 부르는 이름이다. 그리고 진숙미와 진세미는 1글자가 다르다.

 

진향련에 대하여는 그녀의 생활원형은 진형련(秦馨蓮)이라고 본다. 진숙미의 두번째 처이다. 부부는 서로 공경했고, 백년해로했다. 극에서 나오는 것과 같은 장면이 발생한 바 없다. 편극하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이목을 감추기 위하여 진형련을 진향련으로 바꾸었을 뿐이다. 현재 단강구시의 육리평진에는 진가루촌이 있는데, 바로 진형련의 고향이다. 그러나, 희곡 <<찰미안>>의 영향을 받아서인지, 진형련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고, 진향련을 아는 사람은 많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