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민국 후기)

갈건호(葛健豪) : 위대한 혁명가들의 모친

중은우시 2007. 4. 9. 20:44

중국공산당의 역사상 한 위대한 혁명가들의 모친이 있다. 그녀의 가정에는 일찌기 중국공산당중앙위원 4명이 포함되어 있다. 즉, 아들 채화삼(蔡和森), 며느리 향경여(向警予), 딸 채창(蔡暢), 사위 이부춘(李富春)의 모친인 갈건호이다.

 

갈건호(1865-1943): 원래 이름은 난영(蘭英)이며, 호남 쌍봉현 하엽(荷葉)의 계림당(桂林堂) 사람이다. 그녀는 공산당 초기의 지도자인 채화삼과 중화전국부련 주석인 채창의 모친이다. 그녀는 자손 3대사람을 이끌고 장사로 가서 공부한 바도 있고, 다시 자녀를 이끌고 프랑스로 유학을 떠나기도 했다. 당시 1600여명의 프랑스유학생중 나이가 가장 많았었다. 그녀는 일찌기 상향과 장사에서 여자직업학교를 열기도 했다.

 

갈건호가 출생할 때, 그 지방에는 3대명문집안이 있었다: 청나라때의 증국번 가족, '감호여협(鑑湖女俠)'으로 불리우는 추근(秋槿)의 모친집안인 왕씨가족 그리고 갈건호의 친정인 갈씨가족이 그들이다. 그들은 서로 혼인으로 얽혀있고, 그 지방의 최상층을 형성하고 있었다.

 

갈건호의 부친은 원래 상군의 참장(參將)이었으며, 나중에 염운사(鹽運使), 안찰사(按察使)를 지냈고 증국번과는 인척관계이다. 갈건호는 어려서부터 총명하였다. 그녀는 5,6세때 오빠인 갈망흠(葛望欽)과 함께 책을 읽고 글을 배웠으며 <<사서>>등 경전을 외었다. 당시 하엽에서 30여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영풍(永豊)이라는 곳이 있었는데, 그 곳에는 채수숭(蔡壽嵩)이라는 큰 집안이 있었다. 그는 갈건호의 부친과 함께 상군에서 근무했으며, 일찌기 자녀들의 혼사를 정해두었다. 갈건호가 16살때, 부모의 명을 받아 영풍으로 시집간다. 채수숭의 아들인 채용봉(蔡蓉峰)과 결혼한다.

 

결혼후에도 그녀는 단순히 현모양처로 만족하지 않고, 사회문제와 민생문제에 관심을 가진다. 그녀는 6명의 자녀를 두는데, 자녀들에게 빈곤한 백성에 관심을 가지고 남을 도우라고 가르치곤 했다. 여혁명가인 추근의 모친집이 계림당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갈건호는 추근이 문무에 능한 여자기인이라는 말을 듣고, 여러번 그녀를 찾아간다. 그 곳에서 그녀는 많은 새로운 사상을 접하게 되며, 이때부터 자주 추근의 일을 얘기해준다. 추근은 위대한 혁명당 사람이고, 그녀가 여학교를 연 것은 부녀를 일깨우기 위한 것이며, 그녀는 우국우민의 혁명선구자라고 가르켰다. 채화삼과 채창은 어려서부터 모친의 입에서 '혁명'이라는 말을 듣고 자랐다. 1907년 추근이 살해당하였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갈건호는 매우 비통해 한다. 그녀는 아이들을 데리고 그녀의 영령을 몰래 애도하기도 하였다.

 

갈건호는 자녀를 공부시키려고 할 뿐아니라, 그녀 스스로도 공부를 하고자 한다. 그래서, 갈건호의 3대가 동시에 학당에 들어가는 당시로서는 재미있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1913년, 상향현립 제1여학교가 학생을 모집했다. 갈건호는 이 소식을 듣자, 그녀가 시집올 때 가지고 온 패물을 팔아서 비용을 마련해, 채화삼, 채창, 그리고 장녀 채경희와 채경희의 딸 유앙을 데리고 함께 상향으로 간다. 학교에서는 갈건호의 나이가 48세로 너무 많다는 이유로 그녀의 입학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러자, 그녀는 현아(縣衙)에 이를 고발한다. "이름이 무엇인가?" "원래 이름은 갈난영이나 지금은 갈건호로 개명하였습니다. 건은 바로 사회의 건장이 되겠다는 뜻이고, 호는 바로 봉건을 타도하는 호강이 되겠다는 것입니다" "왜 공부하려 하는가?" "구국의 도리를 배우려면 남자나 여자나 다 배워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자 현관은 "그 뜻이 가상하다"고 하여 그녀의 입학을 허락한다. 이리하여 갈건호는 무시험으로 상향현제1여학교에 입학한다. 아들 채화삼과 함께 고소반(高小班)에 입학해서 같이 수업을 듣는다. 당시 채창은 초소반(初小班)에 들어간다. 장녀 채경희는 봉인반(바느질반)에 입학한다.

 

1914년에는 갈건호의 남편이 500은원을 얻기 위하여 당시 10여세에 불과한 채창을 동양식(童養)으로 팔아넘기려하자, 갈건호는 극력반대한다. 그리고 장사에서 공부하고 있던 장남 채화삼도 이를 듣고, 극력 반대한다. 세사람은 채창을 빼돌려서 이 혼인을 거부한다. 1916년 채화삼은 호남성고등사범학교에 입학하여 공부하고, 채창은 주남여학교에 입학하여 공부한다. 채화삼이 도와주어서 갈건호는 다시 딸 채경희와 외손녀 유앙을 데리고 장사로 공부하러 간다.  갈건호는 여자교워냥성소에서 문화를 배우고, 채경희는 장사자치여학교에서 바느질과 자수를 배운다. 유앙은 주남여학교 유치원에 입학한다. 그리하여, 채씨집안의 조손 3대는 한꺼번에 장사로 와서 공부를 하게 된다.

 

갈건호는 장사로 간 후, 더욱 배움에 목말라 했다. 아들 채화삼이 모택동과 알고난 후에 갈건호는 바로 이 청년들의 적극적인 지지자이며 열정적인 참여자가 된다. 모두 그녀를 "채백모"라고 불렀다. 그녀의 집은 시정을 논하고 사상을 교류하는 집회장소가 되었다.

 

갈건호는 영풍으로 돌아온 후 여자직업학교를 하나 창립한다. 그녀는 부녀해방을 위하여는 부녀들이 자립자강할 수 있어야 한다고 믿었다. 채화삼은 방학때 모친을 위하여 학교설립관련사무를 처리해주고 현정부의 동의를 받아낸다. 그녀는 영풍에 제2여자학교를 설립하여 그녀가 교장이 된다. 첫학기에는 종합반 50여명을 뽑고, 다음 학기에는 문과, 바느질, 직업의 삼개반 100명을 뽑는다. 당시 생활이 곤란한 학생들에게는 갈건호가 매월 생활비를 보조해주기도 했다. 그러나, 이 학교는 너무 급진적으로 여성해방을 주장하여, 당시 관청의 불만을 사고, 결국 3학기가 지나서 학교는 폐교당하게 된다.

 

1919년 5.4운동이후 프랑스근공검학운동이 고조에 달했다. 향경여, 채창등은 호남여자프랑스유학근공검학회를 조직해서 신민학회가 조직한 프랑스유학근공검학운동과 서로 호응한다. 당시 경비가 곤란하여 갈건호는 증국번의 외손자인 섭운태를 통하여 유풍사창에서 은양600위안을 빌려서 일부 사람의 경제적인 곤란을 해결해준다. 얼마 되지 않아. 채화삼은 모친도 프랑스로 가게 한다. 그리하여 이해 12월 25일 갈건호는 채화삼, 채창, 향경여등 30여명의 학생들과 상해를 출발하여 프랑스로 가게 된다. 35일간의 항해를 거쳐, 갈건호 일행은 1920년 1월 30일 프랑스에 도착한다. 그녀와 함께 깐 6명의 여자는 몽다니여학교에 입학한다. 갈건호는 프랑스에 4년간 머물렀다. 그녀는 초등학생처럼 열심히 프랑스어를 배웠다. 나이가 많고, 기억력은 감퇴되었고, 어떠한 외국어기초도 없었지만, 그녀는 완강한 의지력으로 단어 하나하나부터 시작하여 매일 제일 일찍 일어나서 가장 늦게 잠드는 사람이었다. 프랑스유학기간중에 그녀는 아들 채화삼과 향경여, 딸 채창과 이부춘이 서로 가깝게 지내는 것을 적극 지지해주고, 그들이 자유결혼하도록 지지한다. 그때, 갈건호는 채창, 향경여와 함께 낮에는 공부하고 밤에는 자수를 시작하였다. 갈건호의 자수는 아주 뛰어나서 프랑스여자들이 좋아했다. 하나를 만들면 수십프랑에서 백여프랑까지 받았다. 이 돈으로 그녀는 자녀들의 학비로 쓰고, 남으면 다른 사람을 도와주었다.

 

1922년 채화삼과 향경여가 먼저 귀국하여 중공중앙에서 일한다. 채창은 1923년 2월 프랑스에서 아이를 낳는다. 갈건호는 한편으로 공부하면서 한편으로 손녀딸을 키운다. 가을이 되어 채창과 이부춘은 소련으로 공부하러 떠나고, 그녀는 어린 외손녀를 데리고 귀국한다.

 

갈건호는 귀국후 장사에 먼저 머문다. 대혁명실패후 그녀는 무한, 상해로 가서 자녀, 며느리, 사위와 혁명사업을 수행한다. 1928년 그녀의 둘째아들 채녹선(蔡仙)과 셋째며느리 향경여가 차례로 희생당한다. 채화삼 및 채창과 상의한 후 노모 갈건호는 고향인 호남 영풍으로 보낸다. 1931년 채화삼도 광주에서 장렬히 희생된다. 그러나, 그녀가 알면 상심할 것이 두려워 아무도 그녀에게 그 사실을 알리지 않았다.

 

그녀는 고향으로 돌아왔지만, 고향에는 남은 재산이 없어 남편과 장녀 및 손자녀를 데리고 남의 집에 세들어 살았다. 1932년, 남편 채용봉이 사망한다. 갈건호는 영풍에서 10여리 덜어진 석판충에 자리잡는다. 생계를 위하여 농사를 짓고 그녀와 딸 채경희, 손자 채박, 외손녀 이특특은 아주 청빈한 생활를 보낸다.

 

1938년 주은래, 섭검영이 장사로 왔을 때, 사람을 석판충으로 보내어 갈건호를 데려오려 하지만, 그녀는 당에 부담을 주기 싫다는 이유로 시골에 남아있겠다고 한다. 1938년 당에서는 사람을 보내어 이특특을 데려하고, 1939년에는 채막을 데려간다. 당조직에서는 분기마다 그녀에게 돈을 보내주었다.

 

1943년 3월 16일 갈건호는 석판충에서 사망한다. 향년 78세이다. 임종전에도 그녀는 아들이 이미 희생된 것을 몰랐다. 그녀는 장녀 채경희에게 "화삼과 함희(咸熙, 채창)로부터 편지가 있느냐?"고 물었다. 그리고 장녀에게 그들에게 편지를 써서, "모친은 너희들 사업이 성공하는 것을 보지 못하고 죽는다. 그러나, 혁명은 반드시 성공할 것이다"라고 한다.

 

이 위대한 혁명모친이 남긴 네 사람의 중국공산당의 혁명가는 다음과 같다.

 

채화삼, 그녀의 아들. 중국공산당 창건자의 한 사람. 당의 초기 걸출한 마르크스주의 이론가. 선전가. 당의 "2대" 에서 "6대"까지의 중앙위원이며 제5기, 제6기 중앙정치국위원, 상임위원, 중앙선전부 초대부장을 역임했다.

 

향경여. 그녀의 며느리. 중국부녀해방운동의 선구. 중국공산당의 첫번째 여자 중앙위원. 모택동은 그녀를 "모범부녀영수"로 칭찬한 바 있다. 1925년 5월 중앙집행위원 및 중앙국위원에 보선된다.

 

채창. 딸. 국제진보부녀운동의 저명한 활동가. 일찌기 중국공산당 제7기 내지 제11기의 중앙위원, 제4, 5기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 부위원장, 중화전국부녀연합회 제1.2.3기주석 및 제4기명예주석을 지낸다.

 

이부춘. 사위. 국가계획위원회주임, 국무원 부총리, 중공제8기 내지 제11기 중앙위원, 제8기 중앙정치국위원, 상임위원, 중앙서기처 서기를 역임하였다.

 

 

 

 

 

그녀는 1924년 6월 9일 호남성여계연합회의 '회복성립대회'에 참가한다. 1925년 여름, 그녀는 장사 안자묘에서 평민여자직업학교를 설립한다. 처음에는 2개반이었으나, 나중에는 4개반으로 늘어난다. 이 학교는 공산당과 관계가 깊었고, 실제로 혁명가를 양성하는 장소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