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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당)

중국역사상 가장 싱거운 전쟁

by 중은우시 2007. 5. 22.

글: 맹헌실(孟憲實)

 

고창(高昌)은 옛날의 지명이다. 구체적인 위치는 현재의 신강에 있는 투루판(吐魯番)이다. 이곳은 서역지역에 위치한 한족의 지방정권이었다. 그렇다면, 왜 고창국은 마지막에 당나라와 서로 싸웠는가? 왜 겨우 3만의 인구를 지닌 고창국을 치는데, 당나라는 그렇게 중시하여, 20만의 병사를 이끌고 가서 치게 되었는가?

 

당태종시기의 고창국에 있던 국왕은 국문태(麴文泰)였다. 국문태는 처음에 중원의 당나라 중앙정부와 양호한 관계를 유지했다. 정관4년, 국문태는 부인과 함께 장안을 갔다. 당태종은 높은 격으로 국문태를 접대했고, 그의 부인을 "공주"로 봉했다. 그이후, 쌍방의 관계는 급속히 가까워진다. 서역의 모든 움직임에 대하여 국문태는 적극적으로 당나라에 보고한다.

 

그러나, 하나의 거대한 그림자가 서역의 상공에 확산되고 있었고, 누구도 이 것이 향후 고창국과 당나라의 관계에 영향을 미칠 줄 몰랐다. 그것은 무엇인가? 문제는 서돌궐(西突厥)에서 나타났다.

 

서돌궐의 두목인 통엽호(統葉護)가 병사한 후, 그의 후계자들은 서로를 인정하지 못하고, 마침내 두 파로 나뉘어 전쟁을 벌였다. 이 전쟁은 수년을 끌게 되어, 정관2년부터 정관6년까지 하게 된다. 모든 서역의 나라들이 화를 면하지 못했다. 그들은 서돌궐의 양파투쟁에 반드시 선택을 해야 했다. 당연히 선택의 여지가 없는 경우가 더 많았다. 어느 일파가 자신들을 통제하게 되면 그 쪽을 따르는 것이다.

 

서돌궐의 양파는 동시에 당나라의 지지를 획득하기 위하여 노력했다. 정관12년에 이르러, 당나라에서 가장 원하지 않는 일이 발생했다. 당태종이 지지하던 서돌궐의 일파는 세력이 점점 약해졌고, 당태종이 지지하지 않던 일파는 반대로 세력이 갈수록 강해졌다. 그 두령인 욕곡설(欲谷設)은 상대방을 무너뜨렸을 뿐아니라, 서역을 대통일하려는 기세를 보여주고 있었다. 욕곡설의 일파가 세력을 증가시킴과 동시에 점차 당나라와 마찰이 발생했다. 당나라가 예전에 자기의 상대방을 지지했다는 것으로 인하여, 욕곡설은 고창을 통제하였고, 고창국과 연합하여 함께 언기(焉耆)를 쳤다. 언기는 천산남쪽에 있었고, 고창과는 천산 하나를 사이에 두었다. 이와 동시에 욕곡설은 서역과 당나라의 왕래를 막아버렸다. 이것은 소위 공물을 바치는 길을 막아버린 것이다. 일부 중원인들이 서역으로 도망쳤다가 지금 다시 중원으로 돌아가고자 해도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언기를 공격한 일은 당나라에 큰 충격을 주었다. 왜냐하면 언기와 고창은 모두 당나라의 부속국이었기 때문이다. 당태종은 사자를 보내서 조정하려고 있고, 고창에게 언기사람들을 돌려보내라고 요구하였다.

 

그러나, 고창은 말을 듣지 않았다. 왜냐하면 고창은 이미 서돌궐 욕곡설의 지배를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욕곡설은 부하를 보내서 고창을 감독했는데, 아사나구(阿史那矩)라는 자였다. 그는 명목적으로는 고창의 일개 장군이었지만, 실제로는 욕곡설을 대리하여 고창을 지배하고 있었다. 당나라도 상황을 이해한 것같다. 당태종은 바로 아사나구를 지명하여 장안으로 오라고 했다. 고창은 당연히 그렇게 할 능력이 없었고, 그저 사자를 장안에 파견하여 이런저런 변명을 할 수밖에 없었다.

 

쌍방 사자의 왕래는 사실상 쌍방의 입장을 의사소통하는 길이고, 피차의 배경을 이해하는 길이었다. 당나라의 사자가 고창에 도착하자, 국문태의 입장은 아주 강경했다. 사자가 그에게 왜 언기를 쳤느냐고 묻자, 국문태의 회답은 "매는 하늘에 있고, 꿩은 갈대밭에 숨는다. 고양이는 집에서 놀고, 쥐는 구멍속에서 편히 쉰다. 각자 자기가 있을 곳을 얻으면 되는 것이 아닌가?" 그 뜻은 결국 서로 다른 사람에 대하여 어찌할 수 없다는 의미였고, 이는 명확히 당태종의 중앙정부를 무시하는 말이었다.

 

고창왕 국문태는 왜 이렇게 담량이 컸을까? 감히 당태종에 대항하려 한것일까?

 

국문태는 일찌기 그의 심복에게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그는 수나라에도 가보고, 당나라에도 가봤는데, 그는 이전에는 수나라가 당나라보다 강대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강대한 수나라도 서역에 병사를 보낼 여력이 없었는데, 당나라에서 출병하더라도 별로 규모가 크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병사를 많이 보내려면 군수물자측면의 준비가 아주 어려울 것이기 때문이다. 만일 3만이하를 파병한다면 고창을 이기기 힘들 것이다. 당나라병은 하연적(고비사막)을 넘게 되면, 분명히 피로에 지칠 것이므로 고창은 그저 이일대로(以逸待勞)하면 된다. 당연히 국문태에게 있어서, 그는 또 하나의 믿는 바가 있었다. 서돌궐의 욕곡설은 가한부도성(지금의 신강 지무사르)에 주재하고 있었고, 고창과 가까웠다. 서돌궐은 고창의 가장 중요한 패였다. 바로 고창이 당나라의 중앙정부에 대항할 수 있게 만드는 결정적인 역량이었다.

 

이때, 당나라 조정은 어떠했는가?

 

평화를 위한 모든 노력은 실패했고, 당태종에게는 전쟁이냐 아니냐의 선택만 남았다.

 

당나라 내부에는 두 가지 서로 다른 견해가 있었다. 주전파는 당나라의 인내는 이미 한계에 다달았다. 서역문제는 마음대로 놔둘 수가 없다. 장기적인 전략에서 볼 때, 출병이 시급하다는 것이었다. 또 다른 일파는 서역에 병사를 보내는 것에 반대했다. 그들의 견해는 먼길을 떠나려면 부담이 너무 크다는 것이었다. 서역에 대하여 너무 큰 댓가를 치르는 것은 가치가 없다는 것이다. 후자의 주장을 한 사람들은 명확한 기록을 남기지 않았지만, 관점을 볼 때, 위징의 일관된 사상과 부합한다.

 

그렇다면 원정을 보낼 것인가? 말 것인가? 보내지 않으면 문제는 해결되지 않고, 결과는 심각하다. 보내려면, 국문태가 말한 문제가 확실히 있었다. 먼 길을 보내려면 곤란이 한 둘이 아니다. 자연환경도 열악하고, 군대의 군수물자공급도 곤란하다. 출병병사수를 적게 한다면, 문제를 해결하기 어렵다. 출병병사수를 많이 한다면, 국가재정부담이 문제된다.

 

계속 참을 것인가, 도전을 맞이할 것인가? 당태종은 도전을 맞이하여 싸우기로 결정한다.

 

이 전쟁의 핵심은 당나라가 불손한 국가를 치는데 있는 것만이 아니었다. 만일 고창뿐이라면, 문제는 간단하다. 관건은 고창의 배후에 있는 서돌궐이었다. 당나라는 서돌궐과 전쟁을 벌일 것인지 여부도 결정해야 했다. 만일 전투를 벌인다면, 반드시 서돌궐의 참전에 대한 준비까지 마쳐야 한다. 서돌궐의 욕곡설은 막 승리를 이끌어냈고, 서역의 많은 나라들이 그에게 정복되었다. 당나라가 고창을 평정한다면, 최대의 준비는 바로 서돌궐과의 전투를 준비하는 것이었다. 전체전략으로 보건, 국제정치로 보건 모두 이 점은 고려해야 한다. 안싸운다면 그만이지만, 싸우려면 반드시 완승해야 한다. 고창배후의 서돌궐에 대하여는 요행을 기대하기 어려운 상대이다.

 

당나라가 출병했다. 당태종이 반포한 <<토국문태조>>의 전편에는 국문태의 죄행을 하나하나 열거하고 있다. 서돌궐은 그저 언급만 하고 있다. 결론은 국문태를 징벌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국문태를 토벌하는 것은 중국의 내정이고, 황제가 배신한 신하인 국문태를 토벌하는 것이며, 대외전쟁이 아니라는 것이다. 여기에 숨은 뜻은 외인들은 간섭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러나, 외인들이 간섭하면, 당나라는 무서워할 것인가? 당연히 아니다. 당태종은 전쟁준비를 다 마쳐두었던 것이다.

 

이부상서 후군집은 행군대총관이고, 우진달, 설만균등이 부대총관이다. 그외에 총관이 여러명이다. 참전한 군대는 부병(府兵) 외에 많은 민족으로 구성된 병사들이 참전하였다. 선봉의 설연타 군대, 그리고 아사나두르가 이끄는 돌궐군대, 계복하륵이 이끄는 철륵군대가 그것이다. 당나라는 도대체 얼마의 군사를 동원했는가? <<구당서.고창전>>에 의하면 총수는 개략 20만이라는 것이다.

 

고창의 인구는 얼마인가? 3만7천7백3십8명이다. 고창은 당나라군대의 주력공격목표가 아니었다. 당나라군대의 방대한 인원은 서돌궐 욕곡설을 위하여 준비한 것이다. 결과는 어떻게 되었는가? 욕곡설은 당나라군대의 역량을 보고는 당태종의 결심을 눈치챘다. 결국 당나라군대가 도착하기 전에, 욕곡설은 도망쳐버렸다. 한꺼번에 천리를 서쪽으로 도망친 것이다. 서돌궐의 가한부도성에 주재하던 장군은 항복해버린다. 국문태는 당나라군대가 이미 고비사막을 넘어서 이오(伊吾)에 출현했다는 말을 듣고, 긴장하여 그냥 죽어버리고 만다.

 

국왕이 사망하자, 신국왕인 국지성(麴智盛)은 후군집에게 서신을 보낸다. 죄를 지은 선대국왕은 이미 벌을 받아 사망하였고, 자신은 신국왕으로 아무 일도 모르니, 불쌍히 여겨달라고. 후군집은 회신을 보내어

'투항을 하면, 잘 보살펴주겠다'고 한다. 그러나, 국지성은 그렇게 투항하려고 하지는 않았고, 후군집은 진공한다. 후군집의 군대에는 기술자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먼저 하미(哈密)로 가서 천산의 나무를 재료로 하여 많은 공성무기를 만들어 놓는다. 이것을 사용하자, 국지성은 대항할 힘이 없어, 결국 항복한다.

 

역사는 어떤 때는 이렇게 황당하다. 당나라에서 만리를 넘어 온 원정병사들은 이처럼 별 힘들이지 않고, 우스운 결말을 보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