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당)

중국역사상의 여영웅 : 평양공주(平陽公主)

by 중은우시 2006. 12. 13.

남북조가 통일되었지만, 난세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얼마되지 않아 중국대륙은 다시 분열상태에 들어갔다. 이번 분열기간은 매우 짧았다. 수문제의 외조카인 이연(李淵)이 7년이라는 짧은 기간에 여러 군웅을 물리치고 다시금 천하를 통일한 것이다. 이렇게 짧은 시간내에 천하통일을 이룬 것은 역사상 한고조 유방만이 이연보다 빨랐을 뿐이다. 그러나, 한고조가 항우를 격파하고 황제에 올랐지만, 천하는 여전히 어지러웠었다. 한고조는 죽기 얼마전까지 친히 반란집압에 나서야 했었다. 그러나, 당나라는 이런 문제가 없었다. 이렇게 될 수 있었던 이유중에 중요한 것은 당고조 이연에게는 일군의 걸출한 자녀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 자녀들중에서 공적이 뛰어난 것은 태자 이건성(李建成), 차남 이세민(李世民) 그리고 삼녀 평양공주(平陽公主)였다.

 

평양공주는 당고조 이연의 딸이다. 당연히 성은 이(李)씨이다. 그러나 그녀의 이름이 무엇인지는 정사에 기록이 없다. 중국의 사서에서 여자를 대하는 태도는 오대(五代)를 깃점으로 확연히 변한다. 오대 이전에는 어떤 여자이건 사서에 그녀들의 이름을 남겼었다. 전진의 모황후와 같이 전진이 존재했던 시간이 극히 짧았으므로 역사기록이 완전하지 못하여 성명을 남기지 못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그러나, 송나라 이후에는 여자의 성명을 더 이상 공개적으로 기록되는 사서에 남기지 않았다. 평양공주의 사적을 기록한 <<구당서>>와 <<신당서>>는 하나는 후진(後晋)에서, 하나는 북송에서 만들었는데, 평양공주의 이름이나 나이에 대하여는 한 마디 언급도 없다. 그래서 후세에 무협소설을 쓰는 황역(黃易)과 같은 경우에는 할 수 없이 아무렇게나 그녀의 이름을 이수녕(李守寧)이라고 붙여 버리기도 했다.

 

당고조는 모두 19명의 딸을 두었다. 평양공주는 셋째딸이다. 이 19명의 딸은 당연히 동모소생은 아닐 것이다. 평양공주의 모친은 이연의 본부인인 두(竇)씨이다. 즉, 이건성, 이세민, 이원길의 모친이다. 이 두씨를 얘기하자면 또한 기녀(奇女)라고 할 수 있다.

 

두씨는 경조 평릉(현재의 섬서 흥평) 사람이다. 부친인 두의(竇毅)는 북주(北周)의 팔대원수중의 한 명이다(두의의 관직은 상주국에 이르렀다. 이 관명은 현재는 대응하는 관직이 없다. 북주에서는 8명의 주국대장군이 전국의 관병을 통솔하였다. 억지로 번역하자면 방면군사령관정도가 될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이런 관직은 명예적이고 실권이 있는 자리는 아닌 경우가 많았다.). 모친은 북주 무제의 누이인 양양장공주(襄陽長公主)이다. 두씨는 어려서부터 매우 총명했고, 무제의 사랑을 받았다. 그래서 그녀를 궁중에 남겨놓고 자기딸처럼 길렀다. 당시 천하는 셋으로 나뉘어 있었는데, 북주가 가장 약했다. 외부의 지원을 얻기 위해 무제는 돌궐공주를 황후로 삼았다. 그러나, 무제는 이 정치혼인에 불만이었고, 돌궐공주에게 차갑게 대했다. 두씨는 자주 외삼촌에게 참으라고 권했고, 돌궐과의 혼인이 북방의 위협을 제거하고 남방의 진과 동쪽의 북제와 전면전을 벌이는 것이 중요하다고 일깨워주었다.

 

오래지 않아. 수문제 양견이 북주의 황위를 찬탈한다. 두씨는 한스럽게 "내가 남자가 아닌 것이 한스럽구나. 삼천을 위하여 화근을 없앨 방법이 없구나"라고 하였다. 그러자 부친은 놀라서 얼른 그녀의 입을 막았다. "쓸데없는 소리마라. 멸문지화를 당할 수 있다" 그러나, 두의는 이때부터 딸을 보통으로 대하지 않았다. 두의는 대문에 두 마리의 공작을 그려놓고, 사위가 되고싶으면 반드시 백보밖에서 화살을 두 번 쏘아 적어도 1개가 공작의 눈을 맞히면 사위로 삼겠다고 하였다. 현재의 정사기록에 의하면, 이연은 상당히 평범한 사람이었던 것같다. 그는 다른 재주는 없었찌만, 화살을 아주 잘 쏘았다고 한다. 수십명이 응했지만 이연만이 두 발을 다 명중시킬 수 있었다.

 

두씨는 이연에게 시집간후 내조를 잘했다. 이연의 얼굴에는 주름살이 많았는데, 수양제가 이연을 보고 "아파(阿婆, 할미)"라고 놀렸다. 이연은 기분이 좋지 않아 집으로 돌아왔다. 두씨가 이유를 묻고나서는 금방 위로하며 말했다. "이것은 길조다. 너는 당국공이 아니냐. 당(唐)은 당(堂)과 발음이 같은데, 아파는 바로 한 집안의 주인이니 바로 당주(堂主)가 아니겠는가"라고 하였다. 당시 천자의 금란보전도 명당(明堂)이라고 불렀으니, 당주는 바로 명당의 주인 즉 천자가 된다는 것으로 교묘하게 해석해준 것이다.

 

궁중에서 자랐으므로, 두씨는 궁중정치에 대하여 아주 익숙하였다. 이연은 적지 않은 준마를 길렀는데, 두씨는 그에게 말을 수양제에게 바치라고 권했다. "황상은 말과 매를 좋아하는 걸 너도 알지 않느냐. 준마를 황상에게 바칠 때이다. 그러지 않고 남겨두다가는 모함을 받게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연은 처음에는 준마를 바치는 것을 아까워했다. 그러다가 나중에 진짜 수양제로부터 책망을 받게 되자, 얼른 준마를 바쳤다. 두씨는 45세에 사망하였는데, 이연은 이 때서야 죽은 처의 얘기를 곰곰히 생각해보고는 아주 이치에 맞는 것이었다고 깨닫는다. 그래서 자주 수양제에게 준마, 매, 개등을 바친다. 수양제는 과연 매우 좋아해서 이연을 장군에 봉한다. 이연은 눈물을 흘리면서 자녀들에게 "내가 만일 일찍 너희 어미의 말을 들었다면, 일찌감치 이런 관직을 얻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렇게 평범했던 이연이 어떻게 그렇게 뛰어난 자녀들을 둘 수 있었을까?

 

수양제는 사실 표준적인 망국의 군주는 아니었다. 그의 문재무략은 역사상 어느 명군에도 뒤지지 않았고, 적어도 이세민보다 나았다. 이 두 사람은 황제가 되기 전에 모두 태자였고, 모두 좋은 명성을 가졌었고, 개세무쌍의 공로들을 세웠으며, 모두 피를 부르는 정변을 통해서 황제가 되었다. 황제가 된 후에 초기의 문치무공은 비슷했다. 문제는, 수양제는 이세민에 비하여 의견을 허심탄회하게 받아들이는데서 부족했고, 큰 일을 벌이는 것을 좋아했다. 이것은 그가 국력을 돌보지 않고 대운하를 파고, 고구려를 정벌하게 하였다. 결과적으로 천하대란을 가져왔고, 그 자신의 목도 날아가게 된 것이다.

 

이처럼 전란이 분분할 때, 이연이 승리를 거머쥘 기회는 그리 크지 않았다. 그의 땅은 머나먼 산서변경에 있었고, 수도 장안이나 동도 낙양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다. 수하의 병력도 부족해서 겨우 만여명이었다. 그리고 매일 돌궐의 진공에 대비해야 했다. 가장 중요한 것은 그의 가족들이 모두 장안에 있었고, 곁에는 차남 이세민만 따르고 있었다는 점이다. 만일 그가 반란을 일으킨다면, 가족들은 즉시 목숨을 보전하기 힘들어졌다. 그러나, 황위의 유혹은 다른 어떤 것보다 컸다. 이세민을 포함한 주위의 권유와 종용에 따라 이연은 수나라 대업13년(617년) 5월에 병사를 일으킨다.

 

가족들이 장안에 인질로 잡혀 있으므로, 이연은 내놓고 황제를 칭하지는 않았다. 겉으로는 자기의 방어지를 벗어나는 것은 강도(양주)로 가서 거기에 갇혀 있는 수양제를 구하기 위한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그의 진공노선은 동남쪽의 강도가 아니라 완전히 반대인 서쪽의 장안이었다. 이렇게 하는 것은 이연 스스로도 믿지 않았을 것이고, 당연히 장안을 지키던 수나라 관리들을 속이지도 못했다. 장안에서는 즉시 이연의 가족들을 체포했다. 체포명단에는 이연의 셋째딸 평양공주와 그녀의 남편 시소(柴紹)가 들어 있었다.

 

이 시소는 당나라 능연각 24공신중 14번째를 차지한다. 모략이 출중했고, 적은 인원으로 많은 인원에 승리를 거두었으며, 설거, 유무주, 왕세충, 두건덕을 소멸시키는데 그의 공로가 있었다. 당나라의 마지막 적수인 양사도를 격파할 때는 그가 주장(主將)이었다. 그러나, 대업13년때, 시소는 영웅의 기개가 있지는 않았고. 그를 체포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는 말을 듣고는 그는 즉시 도망친다. 도망치기 전에 처에게 "네 부친이 반란을 일으켰다. 나는 그를 만나러 가겠다. 우리가 함께 도망치면 도망치기 힘들고, 너를 남겨놓고 가자니 네가 위험해질 것같다. 어떡하면 좋겠는가?"라고 한다. 그의 뜻은 처가 이씨집안 여자이므로, 그녀를 데려가면 추적목표가 될 것이며, 그 혼자 도망치는 것이 추격을 피할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평양공주는 총명한 여자이니 당연히 그 속에 품은 뜻을 알아차렸다. 그러나 그녀의 담량은 오히려 남편보다도 컸다. 즉시, "너는 혼자 가라. 나는 여자이니, 숨기도 쉽다. 때가되면 다 방법이 있다" 그렇게 시소를 안심하고 혼자 도망치게 해주었다.

 

평양공주는 그녀가 스스로 여자이니 숨기 좋다고 시소를 위로했지만, 그녀는 스스로의 계획이 있었다. 시소가 떠난 후에, 평양공주는 즉시 길을 떠나 현재의 섬서 호현에 있는 이씨장원으로 간다. 남장을 하고 스스로 이공자라고 하면서 집안재산을 팔고, 병사를 모으고 말을 사서, 공개적으로 조정과 대항했다. 당시 천하는 어지러워서, 장안이 비록 수나라 황실이 장악하고 있었지만, 주위의 주현에는 토비들이 도처에 있었다. 그 중에 가장 큰 비적의 수령은 서역에서 온 호상 하반인(何潘仁)이었고, 수하에 수만명이 있었다. 평양공주는 가동인 마삼보를 보내어 하번인에게 투항을 권했다. 마삼보가 어떤 수단을 썼는지 세력이 평양공주보다 훨씬 컸던 하반인은 평양공주의 수하가 되겠다고 하였다. 이것은 모택동이 정강산에서 왕좌, 원문제를 받아들인 것과도 비슷했다.

 

평양공주가 하반인을 받아들인 다음에 다시 이중문, 향선지, 구사리등의 토비를 받아들여 세력을 크게 키웠다. 이 기간동안 조정은 계속 병사를 파견해서 평양공주를 쳤다. 평양공주는 매번 진공을 물리쳤을 뿐아니라 기회를 보아 전과를 확대했고, 연속으로 호현, 무공, 주지, 시평등의 현을 빼앗았다. 무리를 7만여명으로까지 확대했다. 평양공주가 받아들인 이들 수하는 모두 사람을 죽여도 눈하나 깜짝않는 강도들이었다. 능력이 없었다면 남자라도 이들을 다스리기 힘들었을 것이다. 더구나 이들은 서로 계통이 달랐었다. 짧은시간내에 오합지졸을 모아 백전백승의 부대로 만들고 전적을 얻은 것을 보면 평양공주의 조직능력, 지휘능력이 발군이었음을 알 수 있다.

 

617년 9월, 이연의 주력부대는 황하를 넘어 관중으로 들어왔다. 이 때 그는 평양공주가 관중에 기반을 잡고 있는 것을 보고 매우 반가웠다. 그는 시소를 보내어 평양공주를 맞이하게 한다. 부부가 서로 만나고, 처가 이렇게 위엄있는 것을 보고 시소는 얼굴이 빨개졌을 것이다. 이어서, 평양공주는 1만여명의 정예병사를 모아서 이세민과 위하북안에서 회합하고, 같이 장안을 친다. 시소는 이세민의 수하였고, 평양공주와는 동급이었다. 부부는 각각 군대를 몰고 각자의 지휘부에서 지휘했다. 평양공주의 이 1만정예군은 낭자군(娘子軍)이라고 불렀다. 11월 9일에 장안을 함락시킨다.

 

장안전투후에 평양공주의 사적은 다시 사서에 나타나지 않는다. 이후 6년후인 무덕6년(623년) 2월초의 사서에 갑자기 그녀가 죽었다는 기록이 나온다. 이것을 기록한 이유는 그녀의 장례가 다른 경우와 달랐었기 때문이다. 즉, 군례(軍禮)로 장례를 지냈다. 왜 이렇게 했을까? 앞에서 이미 분석한 바와 같이, 중국의 사서는 여자를 무시했다. 특히 병사를 이끌고 전투를 하는 여자는 그냥 보아넘기지를 않았다. 고적은 모두 실제 역사기록에서 계속 삭제시키고 남은 것들이다. 평양공주의 사적은 아마도 이렇게 사라졌을 것이다. 그러나, 각종 사적에 그 흔적은 남아 있다. 이 6년의 상황에 대하여 우리는 개략적인 것은 유추해볼 수 있다.

 

먼저 확실한 것은 장안함락후에, 평양공주는 계속 병사를 이끌고 당나라를 건립하는데 공을 세웠다는 것이다. 이연은 비록 장안을 함락시켰지만, 아직도 관중의 절반도 통제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의 주위는 모두 적이었다. 장안함락후에 이연은 즉시 농서지방에 있는 설거와 양주(지금의 감숙성 무위)지방에 있는 이궤를 맞이해야 했다. 당나라 무덕 원년 7월에 설거는 병사를 파병하여 당나라 군사를 천수원에서 패배시킨 때로부터 2년 2월, 이궤를 점하서쪽 오군에서 체포할 때까지 이연은 겨우 관중과 서쪽을 안정시킬 수 있었다. 이후에야 비로소 안도할 수 있었고, 유무주는 이연의 후방을 끊고, 이연의 근거지인 산서를 점령했다. 이연은 이세민에게 명하여 정벌하게 하였다. 이세민은 거의 2년의 시간을들여 유무주로부터 산서를 되찾아올 수 있었다. 이씨의 당나라를 세울 수 있는 기초를 세운 것은 왕세충을 격파시킨 전투였다. 이 전투는 당나라군은 성을 포위하고, 왕세충을 지원온 두건덕까지 한꺼번에 제거해버린 것이었다. 이 몇개의 전투에 시소는 모두 참가한다. 만일 평양공주가 이 때 장안에서 그냥 놀고 있었다고 한다면 그녀의 성격과 전혀 맞지 않는다. 걸출한 장수로서 그녀도 당연히 대당의 운명을 결정하는 전투에 참가했을 것이다. 두건덕을 멸망시킨 후, 남은 부대는 유흑달을 주인으로 모시고 무덕4년(621년) 7월 장남(하북 고성)에서 반당반란을 일으킨다. 서원랑, 고개도도 역시 병사를 일으켜서 그에 호응한다. 그들은 북으로 돌궐과 연합하여, 반년도 안되어 두건덕의 옛땅을 차지한다. 평양공주의 이때의 주요한 임무는 바로 이씨집안의 본거지인 산서를 지키는 것이었다. 그녀가 지키는 곳은 바로 낭자관(娘子關)이었다.

 

낭자관은 태행산맥의 서쪽 정형서쪽입구에 있다. 오늘날 산서성 정현 동북의 면산 위에 있고, 하북성과 경계이며, 산서로 드나드는 인후에 해당한다. 원래의 이름은 위택관(葦澤關)이었으나, 평양공주가 수만의 "낭자군"을 이끌고 주둔하면서 낭자관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정형"은 진중과 기중지구간에 가장 지름길인 통로이다. 진나라 말에 한신이 조나라를 멸할 때 걸어갔던 바로 그 길이다. 산서는 중원과 관중지구의 병풍과 같다. 산서가 없으면 중원과 관중은 안정될 수 없었다. 평양공주는 병사를 이끌고 낭자관에 주둔 했는데, 이는 적들이 "정형"을 통하여 산서로 들어오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이다.

 

유무주를 무리치고 산서를 회복하기 전에는 평양공주가 낭자관으로 가서 지킬 수 없을 것이므로, 평양공주가 낭자관으로 간 것은 아무리 빠르게 잡아도 무덕4년(621년)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그녀는 그 전에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당연히 전투를 했을 것이다. 하루도 전투를 하지 않고 지나지 않는 상황에서 이연은 어떻게 평양공주와 같은 좋은 장수를 3년간 버려두고 있다가 돌연 쓰거나 했겠는가?

 

평양공주가 어떻게 죽었는지는 역사서에 말이 없다. 이세민은 599년에 태어났다. 617년에 이연이 기병할 때 이세민은 18살이었다. 이건성은 이세민보다 10살이 많으니 28살 정도이다. 이원길은 이세민보다 2살이 어리니 16살이었다. 만일 평양공주가 이세민의 누이동생이라면, 맞지 않는 점이 많다. 그녀가 부친과 함께 관중에서 기반을 잡으려면 적어도 16살이상은 되었을 것인데, 이원길이 쌍동이는 아닐 것이고, 그녀가 이세민과 이원길 사이에 태어났다면 3년동안 매년 1명씩 낳았다는 것인데...가능성이 적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녀는 이건성과 이세민 사이에 태어났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즉, 이세민의 누나가 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연이 기병하였을 때 그녀는 20살에서 26살가량이었을 것이다. 이렇다면 623년에 그녀의 연령은 26세 내지는 32세가 된다. 만일 이세민의 누이동생이라면 이때도 22살에 불과할 것이다. 옛 사람의 수명이 길지 앟았지만, 이 정도 나이에 죽었다면 병으로 죽었을 가능성은 적을 것이다. 여기에 그녀가 죽은 후 군례에 따라 장례를 지낸 것으로 추정하자면 전사하였거나, 부상을 입어 장안으로 돌아온 후에 부상이 도져서 죽은 것일 것이다.

 

그녀의 전사상황은 아마도 두 가지 가능성이 있을 것이다. 하나는 돌궐과의 전투중에 죽은 것이다. 당시 중국내란에 이연을 비롯한 북방군벌은 모두 돌궐과 연맹을 맺고 있었다. 돌궐을 이용하여 적을 치려고 했던 것이다. 돌궐은 동맹을 그다지 중시하지 않아서 자주 침입하고 했었다. 산서는 바로 돌궐이 자주 침입하는 지역이다. 다른 하나는 유흑달을 소멸시키는 작전중에 사망한 것이다. 622년 11월 이연은 이건성을 파견하여 유흑달을 치게 하는데, 처음에는 서로 이기고 지고 하였다. 12월 25일에야 철저히 궤멸시킬 수 있었다. 평양공주가 지키던 낭자관은 최전선이었다. 당연히 병사를 이끌고 참전했을 것이다. 그래서 이 전투에서 사망했을 가능성이 매우 크가. 만일 이전투에서 죽었다면 장안까지 운구하는데 반달 정도는 걸렸을 것이고, 공주였으므로, 장례준비에 반개월정도 걸렸을 것이다. 이렇게 보면 날짜가 대충 맞는다.

 

당나라때는 여성으로 강한 사람들이 많았다. 공주중에서는 더욱 그렇다. 평양공주가 길을 열었고, 이후 태평공주, 안락공주등등이 뒤를 이었다. 그러나 재능이나 공적에서 모두 평양공주를 따라오지는 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