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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사회/북대와 청화

북경대졸업생의 몰락

by 중은우시 2007. 4. 4.

글: 명천(明天)

 

1988년 8월, 우창(牛創)은 북경대학에 합격했다. 이것은 현지 농촌에서는 폭발적인 뉴스였다. 교육을 담당하던 부현장(副縣長)은 친히 그의 집으로 와서 장려금을 주고 갔다. 그의 집은 사실 그의 형과 형수의 집이었다. 그가 중학교에 다닐 때, 부모는 차례로 세상을 떴다. 그는 그래서 형과 형수와 함께 있었다. 형과 형수는 착실한 농민이었고, 자식이 둘 있었다. 그리고 우창의 학비, 생활비까지 부담했다. 그래서 아주 힘들게 생활했다. 부현장은 그이 집을 보고는 우창의 어깨를 두드리며, "젊은이, 잘 공부하게. 우리는 네가 공부를 마치고 돌아와서, 고향에 보답하게." 우창은 이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금방 4년이 지났다. 우창은 졸업을 앞두었다. 철학과의 학생들은 많은 사람들이 연구소나 학교로 갔다. 이 두가지 업무는 우창이 다 싫어하는 것이었다. 그는 이미 머리처박고 공부하는 재미없는 생활은 싫증이 났다. 그는 생활방식을 바꾸고 싶었다. 이때, 그는 고향의 부현장이 말했던 것을 생각했다.

 

북경에서 4년을 공부하고, 다시 가난한 고향산골로 돌아가는데, 그는 처음에는 별로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다. 그러나, 돌아간 후 고향사람들로부터 칭찬과 후배들의 숭배를 계속 받을 수 있고, 다른 사람들보다  유리한 조건하에서 관료로 성공할 수 있다는데서 그는 마음을 놓았다.

 

그의 고향으로 돌아와서 보답하겠다는 행동은 고향사람들로부터 대단한 칭찬을 받았다. 그는 현위원회 판공실에서 공업을 담당하는 부서기의 비서로 발령났다. 사람들의 눈에는 부서기의 비서는 부서기 바로 다음이라고 생각했다. 처음에 그는 아주 자랑스럽게 이 일을 했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그는 그는 그저 '시종'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매일의 업무라는 것이 부서기를 위하여 가방을 들고, 차문을 열고, 조금 수준있는 일이라면 그저 강연원고를 쓰는 것이었다.

 

우창은 이 자잘한 일들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그리고 부서기도 이 고집스럽고, 잘난 젊은이를 좋아하지 않았다. 1994년 5월, 우창은 부서기를 대동하고 어느 향판기업(鄕辦企業)을 시찰했다. 우창은 그들이 가져온 보고자료가 아주 불만족스러웠다. 공장장은 웃으면서 말했다. "우리가 일을 적게 한 것은 아닌데, 그저 우비서처럼 능력있는 사람이 없지 않습니까?" 공장장의 치켜주는 말에 우창은 아주 기뻤다. 그는 웃으면서, "그렇다면 왜 나를 초빙하지 않습니까" "감히 그런 생각을 할 수 있겠습니까. 만일 우비서가 와주시기만 한다면 저희야 가마를 보내서 모시고 오지요"

 

누구도 생각못하게, 우창은 진짜 공무원직을 버렸다. 그리고 그 향판기업으로 갔다. 공장장은 감동해서 그에게 "부공장장 겸 공장판공실주임"이라는 직위를 주었다. 그래야 어느 정도 대우가 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우창이 실망한 것은 이 공장장은 기업관리가 무엇인지를 몰랐다. 더구나 현대화관리라는 것은 개념이 없었다. 그리고, 공장장도 머리속에 온통 논리관계뿐이고 정신물질개념이 없는 '인재'를 금방 귀하게 여기지 않게 되었다. 우창은 자기의 가치가 다시 농락당했다고 느꼈다.

 

공무원을 사직하고 공장으로 온 것은 자기가 선택한 길이었다. 그는 이렇게 빨리 후회하고 나갈 수는 없었다. 그래서 억지로 참고 계속 해나갔다. 공장장이 이 "보배"를 데려왔고, "꽃향기가 나비를 불러왔다'는 소문은 금방 퍼져갔다. 게다가 우창은 사람됨이 충후하고 일도 성실해서 그는 우창을 힘들게 하지는 않았다. 우창은 이 곳에서 3년을 일했다.

 

1997년 8월, 현에서 우창을 잘 보았던 상사가 현위원회 상임위원으로 승격된 후 인근 현에서 직위를 맡았다. 그는 우창을 매우 아까워하면서, "너는 그들과 같은 수준의 사람이 아니다. 국가기관에 와서 일을 맡아라"고 했다. 우창은 일찌감치 이 질식할 것같은 환경에서 벗어나고 싶었는데, 부현장은 그를 새로맡은 현에서 현위원회 선전부로 배치해주었다. 재정편제로는 직위를 준다고 바로 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우창은 잠시 편외인원이 되었다.

 

우창은 현위원회 영도자가 잘 본 사람이고 북대를 졸업한 인재였다. 단위의 지도자들도 그를 아주 중시했다. 우창도 그러한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얼마되지 않아. 연이어 지도자에게 여러편의 좋은 글을 올렸고, 성의 잡지에도 발표했다. 지도자는 성에서 상을 받았다. 돌아와서 우창에게 상을 주었다. 비록 이것은 정신적인 것이지만 우창은 만족스러웠다.

 

우창의 재정편제는 여전히 처리가 되지 않았다. 그는 오래지 않아 편외인원과 편내인원의 차이를 실감했다. 임금, 복지대우는 우창이 그리 따지지 않았다. 가장 기분나쁜 것은 매번 평가하여 표차을 할 때마다 우창은 모두 열외가 되는 것이다.

 

우창은 화도 나고 자괴감도 들었다. 이렇게 복잡한 심정때문에 인간관계가 아주 미묘해졌다. 그는 자주 다른 사람과 다투었고, 누구와도 다투었다. 모두 아주 자잘한 일들 때문이었다. 그의 입에서는 아주 큰 이유가 되어 나타났다: "네가 나를 무시했다"

 

이런 일을 거치면서 우창은 다시 자신을 인식하고, 자세를 낮추고 다른 사람과 적극적으로 융합해야 했으며, 환경에 맞추어야 했다. 그리고 그가 일찌기 표방한 "그저 열심히 일을 하였어야 했다" 그랬다면, 그의 인생길은 넓게 열렸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창은 여전히 길들여지지 않았다. 하루는 그가 머리를 박박 밀고 사무실에 나타났다. 나는 깜짝 놀라서 말했다. "이곳은 정부기관인데 어떻게 이렇게 하고 나타나느냐?" 그러자 그는 "어느 법률에 공무원은 머리를 박박밀면 안된다는 것이 있는가? 이건 내 자유다"

 

2002년 2월, 우창의 재정편제는 여전히 처리되지 않았다. 내가 듣기로 현위원회 조직부의 친구에 따르면, 그들은 우창의 일을 회의에서 토론한 적이 있었는데, 많은 사람들이 그의 처세에 대하여 좋지 않은 말을 하여 이 일이 미뤄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2002년 6월, 우창은 나에게 전화를 했다. "사직했다. 남쪽에 가서 일하겠다" 나는 놀라서 금방 말했다. "좋다. 우리가 언제 송별식을 하면 좋겠나?" "괜찮습니다. 나중에 내가 금의환향하면 그 때 해주세요" 그의 말투는 자신감으로 차 있었다.

 

연말에 나는 전화기 옆에서 친구들에게 새해인사를 하고 있었고, 우창의 전화번호를 눌렀다. 우창은 고향에 돌아오지 않았다. 그는 심천에 있었다. 그의 심정은 그다지 좋지 않았고, 목소리도 낮았다. 나와 여러 말을 하였다. 원래, 그는 지금 적당한 일을 잡지 못하고 있다고 했다. 나는 그에게 권했다. "그냥 보통 일을 찾아봐라. 먼저 먹는 문제부터 해결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후에 좋은 곳으로 가면 되지 않느냐" 그는 "나는 먹는 문제를 해결하려고 나와서 일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자신의 가치를 실현하고 싶고, 사업을 발전시킬 기반을 찾고 싶다" 이어서 그는 갑자기 목소리를 높이면서 흥분해서 말했다. "설날이 지나면, 나는 하문으로 갈 것이다. 그곳에 민간이 연 대학이 있는데, 나를 부총장으로 초빙했다." "부총장. 너는 경험이 없잖아..." "봐라봐라. 또 나를 이상하게 본다. 나는 북경대학에서 철학을 배웠고, 어쩌면 철학가가 될 수도 있었다. 학교를 운영하는 것정도야 우습지 않겠는가" 우창의 흥분은 나까지 전염시켰다. 그래서 나는 그에게 행운을 빌어주었다.

 

누가 알았으랴. 1달이 지난 후, 그가 자살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그 때 나는 오랫동안 말을 하지 못했다. 그의 자신에 찬 목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생생하다. 내 생각으로 그가 하문의 일자리를 받아들인 것은 막다른 선택이 아니었나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