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는 쉽게 눈물을 흘려서는 안된다고 한다. 그러나, 2년여의 고생끝에 인텔공장을 얻어낸 사람들은 모두 사나이의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다.
인텔이 대련에 공장을 짓는다는 소식이 전하는 기자회견장에서 하덕인은 감격하여 두 눈에 눈물을 흘렸다. 이틀 후, 당충덕이 기자들과 2년동안의 상세한 배경을 이야기 해주면서, 목소리는 울먹였다. 스트레스와 기끔이 이 순간 한꺼번에 분출되었다.
"그 기간의 스트레스는 사상유례없는 것이었습니다. 특히 협상과정의 가장 힘든 시절에는 더욱 그러했습니다" 당충덕은 심지어 그 때를 되돌아보고 싶지 않다고 한다. 아마도 너무나 힘든 기억이기 때문일 것이다.
수십억의 투자협상이 이루어져야 하고, 대련의 이익도 충분히 보호해야 했다. 프로젝트의 핵심단계인 협상은 모든 참여자들에게 하나의 시험이었다.
모든 중요한 비지니스협상과 마찬가지로, 2005년 11월 17일부터 시작된 대련프로젝트협상은 기승전결이 있었다.
8개월간에 걸친 이 협상에 쌍방은 모두 강력한 협상팀을 파견했다. 협상대표는 63명에까지 이르렀다. 대련시는 대옥림 부시장이 친히 나섰다. 인텔은 두 명의 글로벌 부총재로 하여금 수석대표를 맡게 하였다. 그들은 글로벌부총재인 낸시 파만드리와 스티브 그란트였다.
대련은 각 부문에서 33명의 정예팀을 만들어 협상단을 구성하였지만, 어쨌든 정부공무원으로 구성된 팀이었다. 인텔의 협상전문가들과 비교하면, 전문성에서 손색이 많았다. 인텔의 협상팀 안에는 IC회로의 전문가뿐아니라, 인프라, 교통, 물류, 인력자원, 재정세무 및 법률측면의 전문가가 곳곳에 포진해 있었다. 이런 팀과 겨루다보니 협상은 어려움이 한두개가 아니었다.
당충덕에 의하면 '협상이 시작되자마자, 우리는 어찌할 바를 모르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비록 인텔과 오랫동안 접촉했지만, 프로젝트를 최종적으로 가져올 수 있을지는 자신이 없었습니다."
협상팀의 핵심인원들의 사기를 진작시키기 위하여, 11월 17일, 하덕인은 홀로 샹그릴라 4층의 방에 앉아서, 협상팀의 소식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랫층에서는 대련프로젝트의 첫번째 협상이 비밀리에 진행중이었다.
인텔은 정식협상때 어떤 조건을 제출할지, 사람들은 전혀 감을 잡지 못했었다. 이전에 절반은 자문하는 식의 외곽협상때, 인텔은 대련에 대하여 이스라엘과 아일랜드에 공장을 지을 때, 현지정부가 부여한 지원책을 설명했다. 그리고 중국국내의 다른 지방에 공장을 지을 때, 지방정부가 부여하겠다고 말한 우대정책을 설명했다.
이러한 정책은 모두 대련의 입장에서는 모두 한도를 넘는 것들이었다.
상대방의 제안을 접수할 것인가? 아니면 단연히 거절할 것인가? 수석협상대표인 대옥림은 아주 곤란에 빠졌다. 각 나라의 경제발전상황이 서로 다르므로, 각지역의 재정실력도 모두 다르다. 그리고 동일한 기준으로 서로 다른 도시를 비교형량할 수는 없다. 대옥림은 이러한 방식이 대련에게 불공평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자기의 마음을 안정시킨 후, 대책을 생각했다. 한잔의 물, 또 한잔의 물. 연속하여 물은 네잔 들이킨 후 대옥림은 화장실을 다녀오겠다고 협상장을 빠져나왔다. 화장실에서 그는 점프를 몇 번 하면서 냉정을 되찾으려 하였다.
국내의 일부 1급도시들이 1년에 700-800억위안의 재정수입이 있는 것과 비교하면, 대련정부는 동등한 우대정책을 부여할 능력이 되지 않았다. 우대정책이 다시 한번 협상의 촛점이 되었을 때, 대옥림시장은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당시 그는 아주 간절한 어조로 말했다: "대련은 북방의 명주입니다. 3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도시이며, 처음에는 관광으로 유명했습니다. 그러나, 1인당소득은 전국 42위이고, 인구는 590만입니다. 도시인구는 250만 내지 260만입니다. 농촌에는 대량의 빈곤인구가 존재합니다. 대련은 이것을 먼저 해결해야 합니다"
이어서 그는 협상상대방에게 물었다: "당신은 우리 농촌에 얼마나 많은 초등학교가 건물조차 완비되어 있지 않은지 아십니까? 대련에 얼마나 많은 빈곤층이 살고 있는지 아십니까. 대련이 전세계에서 현대화된 도시이기는 하지만, 얼마나 많은 농촌아이들이 돈이없어 학교를 못다니는지 아십니까. 우리의 아이들이 어떤 건물에서 공부하는지 아십니까. 얼마나 많은 임산부들이 돈이 없어서 초음파사진을 찍지 못하는지 아십니까. 인텔은 사회책임을 중시하는 회사입니다. 이런 것들을 모두 무시해서는 안됩니다."
아주 날카롭게 따지는 인텔의 협상전문가들도 이 때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협상장에 있던 중국인들은 모두 이 말에 깊이 감명받았다.
진실, 솔직, 인텔은 상대방이 이런 방식으로 자신의 우대정책에 대한 입장을 표시할 줄 몰랐다. 그러나, 이런 성의있는 발언은 인텔사람으로 하여금 대련에 대한 좋은 인상을 남겼다. 인텔의 수석협상대표인 낸지 파만드리는 "당신들은 아주 우수한 팀입니다"라고 평가했다.
시간을 오래 끈 이 협상은 외부의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무슨 감동적인 시간이 아니었다. 협상은 아주 힘들었고, 쌍방은 모든 분야에서 모든 내용에 대하여 수십번 수백번 협의했고, 각자의 이익을 가지고 첨예하게 부딛쳤다.
중국측의 이익을 보호하면서도 협상을 깨뜨리지는 말아야 했다. 이 가운데에서 중심을 잡는 것이 아주 중요했다. 인텔은 인프라에 대한 요구가 가혹하기로 유명하다. 약속한 어느 하나의 인프라가 기준에 미달하는 경우에도 대련은 상대방의 신뢰를 잃어버릴 수 있었고, 협상은 언제든지 중단될 수 있었다.
미국측이 제기한 요건을 맞추기 위하여, 대련시가 들여야 할 인프라설비비용은 만만치 않았다. 그중 전력망개조만 하더라도 수억위안이 드는 것이었다. 오수처리장의 건설, LNG파이프의 건설에도 엄청난 자금이 투입되어야 했다.
협상이 중단되면, 이전에 투입한 노력은 모두 수포로 돌아간다. 협상단이 그 책임을 부담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모든 사람은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고, 모든 조항의 협상에 더더욱 조심했다.
물류통관은 인텔이 가장 관심을 가진 문제였다. 그리고 쌍방의 협상과정에서 가장 논쟁이 되던 것이었다. 협상은 길고도 힘들었다. 인텔의 전세계고객에 대한 약속이므로 인텔은 그들의 전세계에 적용하는 기준에 따라 통관하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여기에는 1일 24시간, 1주 7일, 언제든지 통관서비스를 제공해주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인텔의 통관신청서를 세관창구에 내면, 두 시간내에 화물이 나갈 수 있도록 해달라고 요청했다. 대련해관통관후에 산업관련이 있는 후방산업소재도시(상해, 성도)에도 직접 물건이 나갈 수 있게 해달라고 하였다.
이는 대련세관에는 중대한 문제였다. 특히 통관직접운송모델은 대련이 반드시 다른 세관과 협조해야만 했다. 하나하나의 조항은 처리되어야 했고, 계속 찾아다니고 만났다. 2005년 6월부터 2006년 7월까지, 1년의 시간동안, 통관에 필요한 각종 문제가 일차적으로 해결되었다. 이런 예는 계속 등장했다. 물류의 효율을 보증하기 위하여, 인텔은 대련에서 북경, 대련에서 화북등의 고속도로에 일정한 수치에 도달해줄 것을 요구했다. 모든 도로의 너비제한, 높이제한, 중량제한, 대련시는 1주도 안되는 시간에 각 고속도로의 각 구간의 구체적인 데이타를 뽑았다. 업무강도가 어느 정도였는지는 충분히 이해가 될 것이다.
인텔의 대련프로젝트 협상의 매 단계마다 엄청난 조항이 포함되었다. 쌍방이 하나하나 협상하여야 했다. 다시 대련은 하나하나 실현시켜야 했다. 5만자에 달하는 계약서가 8차례의 수정을 거쳐서 완성되었다. 그 동안 3번의 대규모 협상과 수백의 소규모 협상이 있었다. 어느 하나의 협상도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2005년 8월의 어느 날, 상품검사협상이 교착상태에 빠졌다. 중고설비수입의 상품검사문제에서, 서로 많은 차이가 나타났다. 인텔회사의 대표인 Allen Lu는 만일 대련이 인텔의 중고설비수입에 대하여 강제적으로 통제한다면, 프로젝트는 다시 고려해야 한다고 했다. 대련상품검사국도 전혀 양보하지 않았다. 인텔은 반드시 중국정책을 집행해야 한다고 하였다. 결국 쌍방은 책상을 치고 일어서서 자리를 떠났다.
Allen Lu는 당시 적극적으로 전화를 걸어 당충덕에게 연락했고, 사정은 호전될 수 있었다. 대련협상단의 핵심인원인 당충덕은 협상팀에서 유일한 IC회로전문가였다. 소규모협상에서 문제가 나타나면, 당충덕은 자주 '소방관'의 역할을 담당하였다.
서로 입장을 확인하다가, 당충덕은 협상이 진행되지 못한 이유중에 가장 큰 것은 중국측이 반도체칩업종의 배경지식이 부족하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았다. 반도체칩제조영역에서는 반도체칩설비가격이 비싸기 때문에, 중고설비를 수출입하는 것이 아주 보편적이었다. 그런데, 대련의 상품검사국의 협상인원은 반도체칩제조설비를 다른 일반설비와 비슷하게 오인하고, 인텔이 도태설비를 처리하려는 것으로 이해해서, 엄격히 통제해야 한다고 말했던 것이다. 인텔은 전세계에서 통용되는 설비수입이 왜 안된다는 것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고, 왜 대련에서만 엄격한 통제를 받아야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쌍방은 격렬하게 논쟁하면서 양보하지 않았고, 결국 협상은 중단되었던 것이다.
당충덕은 상품검사국의 협상인원에게 상세하게 반도체칩산업의 특수성을 설명했다. 그제서야 긴장되었던 현장의 분위기가 풀렸고, 협상은 계속 진행될 수 있었다.
2006년 7월 11일, 대련과 인텔은 정식으로 협력계약을 체결했다. 그러나, 인텔의 공장건설이 즉시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대련이 계약에서 요구한 조건을 맞추지 못하면, 계약은 그저 종이에 불과하게 되는 것이었다.
특히, 수출가공구의 심사허가문제에 있어서, 인텔회사는 최종적으로 경제개발구를 선택했다. 중요한 원인은 개발구의 수출가공구계획이었다. 인텔은 대련반도체칩공장을 장래 대련경제기술개발구의 우대정책을 향유할 뿐아니라, 국가의 수출가공구의 세금환금정책까지도 받고자 했다.
그러나, 호사다마였다. 쌍방의 계약에 따르면, 국가수출가공구의 심사허가는 9월에 완성되어야 했다. 그러나, 9월이 끝나도록 허가서를 받지 못했다. 협의서가 유산될 위기에 처하자, 쌍방은 협상을 거쳐, 인텔이 다시 2개월의 기간을 주기로 결정되었다. 11월, 국가는 정식으로 승인했고, 마지막 관문을 넘어서게 된 것이다.
대련공장은 68호공장으로 명명되었다. 인텔은 이 아라비아숫자를 써서 아시아시장을 중시한다는 결심을 보여주고자 했다. 1968년은 인텔이 탄생한 해이고, 6과 8은 모두 중국에서 좋아하는 숫자이다. 이는 발전과 번영을 의미한다.
인텔은 대련반도체칩공장프로젝트의 투자가 결코 25억달러에 머물지 않을 것이라고 한다. 국무원의 "동북판공실"의 웹사이트에 올려진 소식에 의하면, "미국인텔공사는 대련수출가공구내에 투자건설하는 반도체칩프로젝트는 1기투자가 25억달러로 12인치칩제조라인을 건설한다. 2009년에 생산개시되며, 연판매수입이 200억인민폐에 이를 것이다. 2기투자는 35억달러가량이며, 다시 12인치칩제조선과 4개의 테스트공장, 1개의 R&D센터 그리고 1개의 판매회사를 둘 것이다. 2009년 중엽에 건설을 시작한다. 두 기의 프로젝트가 모두 완공되면, 연판매액은 500억인민폐에 이르고, 제품의 70%는 수출할 것이다."
이것은 총액 60억달러에 이르는 거대한 투자인 것이다.
인텔의 공장이 대련으로 낙착되자, 하덕인이 가장 감격해 한 것은 과거 다국적기업의 중국과 대련에 대한 태도가 조금씩 변화될 조짐이 있다는 것이었다. 대련이 최종적으로 승리한 것은 실제로 중국의 종합국력이 증가되었기 때문이었다.
2004년, Barret는 공개적으로 미국의 수출제한정책을 비난했다. "만일 내가 중국에 300밀리, 90나노의 칩공장을 건설하려면, 미국정부는 절대로 안된다고 할 것이다" 일찌기 10년전에, Barret는 중국에 반도체칩공장을 건설할 생각을 가졌었다. 그러나 엄격한 수출제한정책때문에 이루어질 수가 없었다.
현재, 인텔은 결국 미국정부의 수출허가증을 받았다. 비록 90나노제조기술이 최선진기술을 아니지만, 미국정부가 정면으로 허가한 것은 이미 상당한 의미가 있다.
서방매체의 평가에 따르면, 인텔의 아시아반도체칩공장이 대련에 생기는 것은 "Made in China"의 승리라는 것이다. 오랫동안 중국에 대하여 기술수출제한을 해온 미국이 처음으로 인텔의 대련프로젝트를 허용한 것은 획기적인 사건이라는 거시다. 바로 최근 한국의 Hynix회사, 미국의 Micron 반도체, 유럽의 ST Microelectronics는 모두 중국에 대한 투자를 강화하고 있고, 국제적으로 유명한 반도체기업이 약속이나 한 듯이 밀려오고 있는데, 이는 전세계 반도체산업의 새로운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전세계 반도체칩의 거두인 인텔의 전략적투자는 아마도 하나의 풍향계가 될 것이다. 1980년대, 인텔이 이스라엘에 반도체칩공장을 건설했을 때, 이스라엘 국내의 반도체칩산업을 진흥시키는데 역할을 했다. 2007년, 인텔이 중국에서 여러가지 활동을 벌이는데, 먼저 2007년 1월 1일부터 인텔중국지구는 아시아태평양지구에서 분리하여 독립된 하나의 지구로서 판매와 마케팅을 하게 되었다. 이어서 인텔의 아시아최초의 공장을 대련에 짓겠다고 발표하였다. 이것은 대련뿐아니라 중국의 반도체산업에도 커다란 영향을 미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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