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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당)

당나라 말기의 황제들은 왜 황후를 두지 않았는가?

by 중은우시 2007. 5. 10.

무엇을 하든 다 나름대로의 고충은 있다. 일반인의 생각에, 황제는 주변에 여자가 무지 많으니 분명히 재미있게 살 것이고, 염복이 터졌을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누가 알겠는가. 황제에게도 황제의 고충이 있는 것을. 예를 들면, 자기가 좋아하는 여자를 마음대로 사랑하는 것은 보통사람들에게는 아무 것도 아닌 일이다. 그러나, 황제라면 그것도 쉬운 일이 아니게 된다. 수백쌍의 눈이 지켜보고 있고, 특히 황후가 눈이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다면, 마음대로 자기가 좋아하는 여자를 총애하는 것이 아주 골치아픈 일이 되고 만다. 이런 골치아픈 일은 거의 모든 황조의 황제들에게 존재했다. 당헌종(唐憲宗) 이순(李純)에게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러나, 당헌종은 당헌종이었다. 그는 치국에도 한가락했을 뿐아니라, 무슨 일을 하든 능력을 발휘했다. 안사(安史, 안록산과 사사명)의 난이후에, 당나라제국은 이미 바람앞의 등불이었다. 그러나, 당헌종이 황제가 된 후에, 잠시 중흥의 국면을 맞이할 수 있었다. 능력없는 사람이라면 절대 하지 못했을 성과이다. 이 뿐아니라, 또 한가지 음미할만한 점이 있는데, 위에서 말한 것과 같은 '여자문제'의 골치아픈 일에 대하여 그는 아주 독특하게 대처했다. 바로 황후를 두지 않은 것이다.

 

<<후당서. 후비전>>에는 당헌종이 황후를 두지 않은 고충을 직접적으로 설명해주고 있다. 즉, 당헌종이 황후를 두지 않은 것은, 세력있고 기가센 황후가 질투를 해서, 그가 다른 여인을 총애하는 것을 방해할까봐 두려웠기 때문이다. 즉, 황후를 세우지 않은 것은 자기 마음대로 좋아하는 여인들과 놀기 위한 것이었던 것이다. 이것이 가져온 간접적인 효과는 황후의 자리를 노리는 여러 후궁들이 암중으로 서로 싸우면서, 그 결과로 이들이 황제를 둘러싸고 총애를 받기 위해서 경쟁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이것은 일거양득의 효과를 거두었다. 당헌종의 잔머리는 아주 뛰어났던 것이다.

 

당나라때 황후를 두지 않은 황제는 당헌종이 처음이었다. 이 방면에서 그는 선구자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이후에 목종, 경종, 문종, 무종, 선종이 연이어 그를 따라서 황후를 두지 않았다. 이 시기에 사서에서 '황후'라고 기재되어 있는 여인은 모두 아들이 황제가 된 연후에 봉해진 것이다. 황후를 세우지 않는 장점은, 당헌종 및 그의 아들, 손자가 모두 맛보았다. 그러나, 이에는 장점이 있는 반면 치명적인 약점도 있었다.

 

사서의 기재에 의하면, 당헌종은 자주 장생불로약과 강장약을 먹었다고 한다. 이렇게 하다보니 신체가 갈수록 허약해졌고, 허약해질수록 약을 더 먹었다. 이런 악순환으로 그의 몸과 마음은 크게 해를 입었고, 성격은 더욱 포악하고 변덕이 심해졌으며, 무고한 사람을 함부로 죽이게 되었다. 주변사람들이 모두 전전긍긍하기에 이른다. 그러다가 결국에 그는 태감에게 독살당한다. 그의 두 아들, 세 손자, 예를 들어, 목종, 경종, 무종황제도 그보다 심했으면 심했지 덜하지 않았다. 궁녀를 많이 두고, 즐기기 위하여 자주 방사(方士)들이 제조한 금단(金丹)을 먹었다. 목종은 약을 먹다가 죽었다. 경종도 황음무도하여 환관에게 피살당하였다.

 

그들이 죽을 때 나이도 그리 많지 않았다. 당헌종과 경종은 피살되었으니 빼더라도, 목종은 30살까지 살았고, 문종은 33살까지, 무종도 33살까지 살았다. 당선종은 아주 능력있는 황제였고, 나이도 상대적으로 많았다. 그러나 50세까지밖에 살지 못하였으니, 그다지 장수했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들이 이처럼 장수하지 못한 것은 그들이 욕망을 제대로 제어하지 못하였던 것과 많은 관련이 있다.

 

그러나, 이는 문제의 단지 한 측면일 뿐이다. 비록 당헌종과 당나라말기의 몇몇황제들이 방종하다가 요절하였으나, 우리는 이로 인해서 이렇게 결론을 내릴 수는 없다. 황후를 세우지 않은 것이 유일한 원인이라고 보면 안된다. 황후를 세우고도 황음했던 황제들이 많기 때문이다. 문제의 핵심은 황후를 세우지 않은데에는 더욱 깊은 위기가 잠복해 있다는 것이다. 이런 위기는 바로 황권의 방치이다. 이점은 방종보다 더욱 무섭다. 왜 이렇게 얘기할 수 있는가?

 

봉건종법제도에서 황후를 세우고, 태자를 세우는 것은 표리의 관계이다. 이는 종법제도를 유지해가는 중요한 구성요소이다. 당헌종은 자신의 염복을 위하여, 당나라에 황후를 두지 않는 선례를 세웠다. 바록 자기 개인의 욕망은 만족되었지만, 후궁은 주인자리는 비었고, 황자들의 위신도 서지 못했으며, 누구든지 황제가 될 수 있었다. 

 

뭘하든 그 나름의 고충이 있다. 이것은 맞는 말이다. 그러나, 한 남자의 고충은 한 황제의 고충과는 다른 것이다. 비록 이 두가지가 어떤 때에는 떼어놓고 말하기 어렵지만. 아마도 황후를 세우지 않음으로써 당헌종은 남자로서 염복은 충분히 누렸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것은 소탐대실하고 작은 복을 위하여 큰 화를 부르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는 남자로서의 속성 밖에 생각하지 않았지만, 그는 또한 만인의 군주였던 것이다. 아쉬운 것은 그가 죽을 때까지 이 이치를 깨닫지 못하고, 그의 자손들도 그를 따라했다는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