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손황후(長孫皇后)는 어릴 때 이름이 관음비(觀音婢)이고, 당태종 이세민의 정실 황후이다.
이세민과 장손황후의 애정문제에 대하여는 많은 사람들이 의문을 가지고 있다. 이유는 아무렇게나 만든 텔레비전 연속극들 때문이다. 그러나, 이 문제를 논하자면, 몇몇 사람에 대하여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한 사람은 연속극에서 아주 잘나가는 양비(楊妃)이고 또 한 사람은 역사상 이세민이 "하늘에서 온 사람이 아닌지 놀랐다"는 위귀비(韋貴妃)이다. 그리고, 이세민의 원수인 음덕비(陰德妃), 후기의 재녀(才女) 서혜(徐惠), 이외에 제왕비(齊王妃) 양씨(楊氏)도 빠뜨릴 수 없다.
먼저 연속극에서 명성이 자자한 양비부터 살펴보자
1990년대초, <<당태종이세민>>이라는 연속극이 중국에서 인기를 끌었다. 그 안에는 수양제의 딸과 이세민의 애정이야기에 대하여 많은 시청자들이 좋아했다. 그리하여 적지 않은 양비팬이 생겨나게 되었고, 이세민이 가장 사랑한 것은 양비라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다른 사람들은, 장손황후마저도 곁으로 밀려나게 되어 버렸다.
이후 많은 연속극들은 이를 본떠서 이세민만 출현하면, 그에게 공주를 어레인지하는 것은 필수로 되어 버렸고, 장손황후는 그저 조연으로 출현하게 되었다. 심지어 어떤 양심없는 연속극의 편집자에 의해서는 장손황후를 아주 폄하하는 내용까지 등장하게 되었다. 연속극 안에서 아주 웃기는 점은 제왕비의 신분과 수나라 공주의 신분을 하나로 만들어 버렸다는 점이다. 제왕비에 대한 총애의 정도에 수나라 공주라는 혁혁한 신분을 더해서 양비는 연속극안에서 이세민이 가장 사랑하는 여자로 되어 버린 것이다.
양비에 관한 어떤 연속극도 나오기만 하면 인기였다. 연속극 작가들은 양비를 욹궈먹는데 이제 싫증도 나지 않는가? 양비는 이제 아주 엉망으로 변해 버렸다. 장손황후를 무시하는 것에 대하여는 별다른 이견이 없지만, 중국 작가들의 현재의 수준은 아직까지 고아하고 뛰어난 장손황후의 이야기를 써낼 만큼에 이르지 않았다고 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위귀비나 음덕비만 해도 양비보다 얘기꺼리가 더 많은데, 왜 죽어라 양비만 붙잡고 있는 것일까?
사실 이세민에 대한 연속극은 양비의 얘기만 꺼집어내면 그것은 '역사정극'이라고 보기 힘들다. 왜냐하면 이세민이 천하를 얻고 정관지치를 연 것은 근본적으로 양비와는 아무 상관없기 때문이다. 양비가 나온다는 것은 그저 편집작가들이 더 이상 쓸 거리가 없다는 것과 꾸며대는 이야기가 수준이 너무 낮다는 것을 말해줄 뿐이다.
양비에 관한 연속극은 <<당태종이세민>>으로 이미 충분하다. 그 안에서 그려낸 "양길아(楊吉兒)"의 이미지는 이미 사람들에게 깊이 박혔고, 경전이 되어 버렸다. 나중에 만들어낸 양비는 이미 이미지도 별 것이 아니지만 이야기로서도 수준이 말이 아니며, 그저 구미속초(狗尾續貂)라고 할 수밖에 없다. 많은 사람들은 연속극의 양비를 싫어한다. 그중 많은 원인은 꾸며낸 양비에 관한 이야기가 너무 사실과 동떨어지고, 조성하는 이미지가 예전의 "양길아"만 전혀 못하기 때문이다.
연속극 속의 양비는 역사상의 양비가 전혀 아니다. 그녀의 이름을 빌려오다보니, 전혀 관계없는 이야기까지 그녀에게 덧붙여 버렸다. 역사상의 양비는 매우 불쌍하다. 자신의 진실한 이야기는 전혀 알려지지 않고, 편집자들이 아무렇게나 만들어버린 이야기만 후세에 전해지고 있으니.
연속극의 영향은 매우 크다. 연속극안의 양비를 좋아하는 어떤 사람은 이세민과 합장한 것이 양비이고 장손황후가 아니라고까지 말하였다. 이 지경에까지 이르렀으니 더 말할 나위가 없을 것같다.
역사는 진실로 그러하였는가? 이세민은 양비를 가장 총애했는가?
아니다. 양비는 그저 이세민의 아주 보통의 평범한 후궁이었다. 역사서를 뒤적여보면, 그녀가 오왕(吳王)을 낳지 않았다면, 신구당서에서는 그녀에 대하여 글자 하나 남기려고 하지 않았을 것을 알 수 있다. 만일 아주 총애받았던 후궁이라면, 당서에서 그녀에게 별도의 열전을 마련하지 않았을리가 없다. 그녀는 신분이 아주 난감했던 제왕비도 아니고, 그녀는 이세민이 아주 정당하게 취한 후궁이었다. 전황조의 공주라는 신분은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았다. 그 시대에 망국의 공주를 첩으로 취하는 것은 매우 정상적인 일이었다. 여러가지 예가 있다. 수문제의 선화부인도 그 예이다.
역사가 양비에게 남긴 묵적은 아주 적다. 그녀가 수양제의 딸이라는 점, 두 아들을 낳았다는 점을 빼면 아무 것도 없다. 많은 사람들이 가진 양비에 대한 인상은 연속극에 한정되어 있을 것이고, 역사서는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역사서만을 뒤져보면 그녀에게는 그다지 특별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양비는 소황후의 딸도 아니다. 그러나, 수양제의 취향을 보면 양비의 모친도 미녀임에는 틀림없을 것이고, 양비 본인도 매우 예뻤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양비는 장손황후보다 먼저 죽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녀의 둘째아들 촉왕은 무덕연간에 태어났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치는 아홉째 아들이었고, 정관2년경에 태어나는데, 촉왕은 여섯째 아들이었으므로 더 빨랐을 것이다. 양비가 두 명의 아들을 낳았다는 것에 비추어보면 그녀는 출산능력은 갖추고 있었고, 그래서 그녀가 정관년간에 아들이나 딸을 낳지 못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그녀가 당태종의 총애를 받지 못하였거나, 일찍 사망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아미년 그저 평범하게 일생을 마치고, 무슨 굴곡도 없었을지도 모른다. 어뗳게 죽었던 간에, 그녀는 소릉에 묻히지 못했다. 소릉에 묻힌 것은 조왕 복을 낳은 소양비(小楊妃)이고, 죽어서 '양귀비'에 봉해진 그녀이다.
또 다른 사람은 양비가 공주를 낳은 적이 없다고 본다. 왜냐하면 지위가 비교적 높은 후궁중에서(장손황후와 신분이 낮은 후궁이나 품계가 없던 궁녀), 위귀비의 딸만이 생모를 기재하고 있다. 위귀비를 기록하였으면 다른 비를 기재하지 않을 이유는 없을 것이다.
이외에 연속극은 역사와 전혀 다르다. 연속극에서 양비는 매우 활발한 여자로 그려지고 있고, 심지어 '엽기적인 그녀'오 ㅏ같이 그리고 있다. 그것은 현대인의 심미관이다. 고대인들은 아주 부드러운 여자를 좋아했다. 역사서에 기재된 이세민이 총애한 장손황후를 닮은 서혜의 예에서 볼 수 있듯이, 그가 좋아한 유형은 부드럽고 현명한 재녀형의 여자였다. 그래서 역사상의 양비도 분명히 부드럽고 선량한 여자였을 것이다.
이세민이 그녀를 가장 좋아했을 가능성은 없다. 그러나, 이세민이 그녀에게 애정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은 알 수 있다. 이세민이 촉왕에 대하여 계속 용서해주는데, 양비의 요소가 없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양비는 이세민이 가장 좋아한 후궁은 아니다. 그리고, 역사상 양비가 이세민을 사랑했었는가?
비록 그들 사이에는 친척관계에 있었다. 아마도 이세민의 사촌누이는 그녀 하나뿐이 아니었을 것이다. 관계가 밀접했는지 소원했는지 혹은 전혀 몰랐었는지는 좀 더 고증을 해보아야 한다. 현존하는 역사의 흔적으로 보면, 양비는 양광을 따라 강도에 가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즉, 그녀는 어린 남동생(이연에 의하여 허수아비 황제로 옹립되는)은 함께 장안에 남았었다. 이씨가 장안을 함락시킨 후, 이연은 그녀의 동생을 허수아비황제로 옹립했다. 양비는 이 모든 것을 보았을 것인데, 그녀가 이씨에 대하여 미움이 없을 수 있을 것인가? 이세민에게 시집간 것이 그녀가 원해서일까? 그녀가 이세민에게 시집간 것은 아마도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 것이다. 그녀는 약한 여자로서, 공주라고 하더라도 어찌하겠는가? 이미 수나라는 망했고, 그녀는 살아야 했는데, 이씨에게 의탁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녀가 이세민을 사랑했는지 아닌지, 진정으로 행복한 여자였는지 아닌지는 고증이 더 필요하다. 그녀와 이세민이 진정한 사랑을 키웠을 가능성은 크지 않다고 본다. 아마도 오래 생활하면서 부부간의 정은 생겨났을지 모른다. 그 당시는 전란이 빈번하였고, 이세민은 자주 전장터로 나갔으며 집안에서 부부간 자식간의 감정을 기를 시간이 없었을 것이다. 역사는 연속극이나 언정소설과는 다르다. 양비와 이세민간의 '굳은' 사랑이야기와 같은 것은 아마도 연속극이나 소설에서나 가능한 일일 것이다.
역사상의 진실한 양비는 매우 불행했다. 그녀는 황궁에서 태어나서, 황궁에서 자라고, 황궁에서 죽었다. 일생을 황궁에서 살았다. 이 여자는 자기 스스로 이루 말할 수 없는 비애을 가지고 있었다.
위비(韋妃), 즉 위귀비는 역사성 기록된 이름이 위규(韋珪)이다. 자는 택(澤)이다. 그녀는 이세만보다 두 살정도 많았었다.
무덕4년, 이세민은 동도(낙양)에서 처음 위씨를 만났다. 그 때 "하늘에서 내려온 사람이 아닌지 깜짝 놀랐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래서 그녀를 비로 취했다. 이 점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위비의 용모가 매우 뛰어났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아름다운 그녀에 대하여 왜 관심을 가지는 사람이 적은 것일까?
정관원년에 위비는 처음으로 황후 바로 다음가는 "귀비"에 봉해진다. 당나라의 제도에 의하면 황후의 아래에 "귀비" "숙비" "덕비" "현비"의 사부인(四夫人)을 둘 수 있으며, 이들은 정1품이다. 그녀는 사부인의 우두머리인 귀비에 봉해졌을 때, 슬하에 이세민의 아들도 없었고, 그저 딸만 있었을 뿐이다. 이로써 이세민이 그녀를 매우 총애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고, 그저 그녀가 나이가 많아서 연장자 순으로 귀비에 봉해진 것은 아님을 알 수 있다. 만일 그녀가 나이가 많아서 귀비가 되었다면 이세민은 그녀를 비로 받아들이지 않았을 것이다. 나중에 그녀가 전남편과의 사이에 낳은 딸도 현주(縣主)로 봉하고, 아사나충에게 시집보내니, 잘 시집보낸 것일 것이다. 이세민은 그가 낳지 않은 딸에 대하여도 이렇게 했다는 것을 보면, 위귀비에 대하여 얼마나 잘 대해주었을지는 상상이 간다. 그래서, 장손왕후가 죽기전에 이세민의 그녀에 대한 총애는 장손황후의 바로 다음이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음덕비의 부친은 음세사(陰世師)로 이세민의 철천지원수이다. 그는 수양제 휘하의 한 장군이다. 이세민의 어린 동생인 이지운(李智雲)이 그의 손아래 죽었다. 그는 이로도 모자라, 이씨의 조상묘를 파헤쳤고, 이씨의 가묘를 파괴했다. 이것은 큰 일을 꿈꾸던 이씨부자에게는 참을 수 없는 일이었다. 더구나 이세민은 이지운이라는 막내동생을 매우 아꼈었다. 이씨가 장안을 얻은 후, 바로 그를 죽여버렸다. 동시에 음씨도 진왕부의 노비로 들어온다. 나중에 이세민은 음씨를 첩으로 삼는다. 이세민이 음씨를 첩으로 삼은 것은 위비나 제왕비(동생의 처)를 취한 것보다 더욱 재미있다. 먼저 음비는 이세민의 원수이다. 음비의 부친은 이지운을 죽이고 이씨의 조상묘를 파헤쳤다. 그리고 이가는 다시 음세사를 죽였다. 양쪽 모두 불공대천의 원수인 것이다. 그러나, 결국은 함께하고 아들도 낳았다. 음씨는 정관원년에 덕비에 책봉되고, 정1품이 된다. 이세민은 그녀를 매우 아꼈다. 비록 불공대천의 원수이지만, 여전히 그에게 아주 높은 지위를 부여했다. 그러나, 정관17년, 음비의 아들인 이우(李祐)가 반란을 일으켜 피살된다. 음비는 음빈(陰嬪)으로 강급되었다(소릉에는 음빈묘가 있는데, 음씨가 비교적 드문 성씨라는 것을 보면 음덕비가 음빈으로 강급되었다고 추정할 수 있다).
제왕비 양씨, 이 양씨는 무측천(측천무후)의 먼 친척이다. 구체적으로 어떤 친척인지 해석하기는 아주 골치아프다. 많은 사람들은 수양제의 딸과 제왕비를 혼동하고 있다. 주요한 이유는 연속극에서 두 사람의 신분을 합쳐버렸기 때문이다. 사실 그녀들은 전혀 상관없는 두 사람이다. 양씨는 처음에는 제왕비였다. 현무문의 변이 있은 후에는 입궁하여 이세민을 모신다. 이세민은 원래 그녀에게 봉호를 주려고 했으나, 그러나, 그녀는 동생의 처였으므로 신분이 아주 민감했다. 그래서 아무런 봉호도 주지 않게 된다.
신당서와 자치통감에는 모두 이런 기재가 있다. 장손황후가 죽은 후, 이세민은 그녀(제왕비)를 황후로 삼으려고 했다(당태종이 황후로 삼으려 했던 사람은 바로 이명-李明-을 낳은 제왕비인 양씨이지, 이각-李恪-을 낳은 수양제의 딸인 양비가 아니었다), 그러나, 위징등이 극력 간하여 포기하게 된다. 그러나, 이 것은 역사서에서 잘못 기재한 것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왜냐하면, 이세민의 양씨에 대한 은총은 역사서에 나와 있기는 하다. 그녀의 신분은 제왕비였고, 그녀는 봉호조차 받지 못하였는데, 어찌 그녀를 황후로 올릴 수 있겠는가? 그리고, 당태종과 제왕비 사이에 낳은 아들 이명을 이미 죽은 제왕 이원길(李元吉)의 후사를 잇게 사후양자로 보냈는데, 만일 그녀를 황후로 삼으려 했다면, 아들인 이명을 동생의 양자로 보내어 후사를 잇게 하지는 않았을 것이고, 당연히 태자로 기르려고 했을 것이다. 이러한 점을 고려하면, 제왕비를 황후로 하려고 했다는 것은 아마도 사실이 아닐 것이다. 만일 황후를 세운다면 위귀비였을 것이다. 그러나, 장손황후가 죽은 후, 이세민은 아무도 황후로 세우지 않는다.
서혜, 그녀는 정관후기에 이세민의 총애를 가장 많이 받은 여인이다. 그녀는 재인부터 시작하여, 나중에 후궁중 비어있는 봉호만 있으면, 그 봉호를 받는 것은 반드시 서혜였다. 그녀는 장손황후와 닮았고, 이세민의 일에 대하여 조금만 잘못이 있으면 바로 간하였다.
이세민의 그녀에 대한 애정은 지기에 대한 것과 같았고, 부녀와 같았다, 심지어는 장손황후의 그림자를 대하는 듯했다.
정관23년, 이세민이 죽었다. 서혜는 치료를 거절하고 영휘원년에 사망한다. 이 때 그녀의 나이 겨우 24세였다. 이치는 그녀를 서현비(徐賢妃)로 추존한다. 장손황후이외에 그녀는 태종에게 가장 가까이 있던 후궁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태중의 후비들 중에서 장손황후와 함께 열전에 오른 유이한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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