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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당)

비수지전(淝水之戰) : 초당(初唐) 역사가들의 허구인가?

by 중은우시 2007. 3. 18.

기원383년, 동진(東晋)의 사현(謝玄)은 8만의 군대를 이끌고 비수(淝水)에서 전진(前秦)의 부견(苻堅)의 100만대군을 격파했다. 이것이 중국역사상 유명한 "비수지전"이다. 동진은 적은 수로 많은 적을 이겨서 천하를 안정시켰을 뿐아니라, 이 전쟁은 후세사가들에 의하여 중화문명이 생존하고 계속될 수 있는지의 여부를 가리는 관건적인 전투였다고 말해지고 있다.

 

그런데, 미국의 역사학자인 Michael C. Rogers는 이 전쟁에 대하여 회의적인 견해를 나타내고 있다. 그는 "비수지전"은 그저 <<진서>>편찬자들의 두찬(杜撰)이라는 것이다. 그는 <<부견재기: 정사(正史)의 한 사건>>라는 글의 서문에서 현대적인 시각과 방법을 운용하여, <<진서. 부견재기>>의 사료, 논사방법, 사가의 동기, 전진역사중의 인물(부생, 부견등)의 수당역사에서의 원형, 비수지전의 날조와 그 동기등의 측면에서 시스템적으로 풀이하고 있다. 이에 대하여 Chen Shi-Hsiang은 이 글에 쓴 서문에서 이를 높이 평가하고 있다: "중대한 의미를 가진 역사사건일수록, 아마도 더욱 전설적으로 되는 것같다. 일단 전설적인 이야기가 성립되면, 진실로 발생한 이야기는 더 이상 사람들의 관심을 끌지 못한다. 전설이 바로 진실한 역사로 되어버리는 것이고, 사실을 초월하고, 역사사건이 되어버리며, 사학사상의 역사로 확립된다. 그러나, 우리가 역사를 이해하고, 한 민족의 문화를 이해하는 것은 모두 글로 쓴 역사(written history)에 의지할 수밖에 없다.  바로 이렇게 글로 쓴 역사가 우리의 역사연구를 좌우하고, 우리의 역사를 보는 눈에 영향을 준다. 그리하여, 이런 역사를 쓰는 행위를 뚫어보고, 역사서의 제작과정과 그 관련배경을 고찰하는 것이 우리가 역사를 연구하는데 상당히 중요하다. <<부견재기: 정사(正史)의 한 사건>>는 바로 이의 대표적인 것이다"

 

미국 캘리포니아대학의 동아시아사 교수인 Rogers의 주요한 업적은 한국사에 대한 연구이고, 여러부의 한국사에 대한 저작을 출판했다. 그러나, 이것은 그의 <<진사. 부견재기>>에 대한 연구와 번역에 조금도 영향을 끼치지 못하였다. Rogers가 <<진서>>를 선택한 것은 바로 <<진서>>가 중국정사에서 아주 특수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첫째, 그것은 유일하게 황제가 친히 편찬한 편장을 가진 정사이다.

둘째, 그것은 후세에 관방에서 역사서를 제작하는 모범을 수립했다.

셋째, 진나라는 중국역사상 관건시기로 취급된다. 만일 진나라가 전진의 공격을 막지 못했다면, 중국은 일찌감치 유럽과 마찬가지로 야만화된 "암흑시대"로 진입했을 것이라고 본다.

 

그래서, <<진서>>를 분석대상으로 하는 것은 아주 의미가 있다.  이왕의 <<진서>>에 대한 평가도 거기에는 너무나 괴이하고 황당한 사건을 많이 기재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Rogers는 <<부견재기>>는 <<진서>>에서 아주 특별한 예라고 한다. <<부견재기>>가 반영하는 것은 부견본인 및 전진의 진실한 역사가 아니라, "정통성을 만들기 위하여, 신화와 문학적인 묘사는 기본적인 수단이 되었다"는 것이다. 더 아나가 <<부견재기>>를 "하나의 교활한 여우"로 보는 것이다. 자세히 분석하지 않으면 그 진실을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다. Rogers의 <<부견재기>>에 대한 분석은 아주 뛰어나서 감탄을 금치 못하게 한다. 그는 중국역사에 대하여 큰 우스개를 던졌을 뿐아니라, 중국의 전통적인 정사의 편수에 대하여도도전하였다.

 

1. 당태종의 모형 및 초당 역사의 반영

 

Rogers의 서문에서 간략히 <<진서>>의 관련자료내력과 전진의 건립과 역사개황을 소개한 후, 전력을 다하여, <<부견재기>>의 몇몇 내원(來源)과 모식을 분석한다. Rogers는 <<부견재기>>에는 진나라가 스스로 만든 함정이 있고, 여기에 수, 당 두 왕조의 구체적인 역사를 반영했다는 것이며, 이것은 진정한 전진의 역사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본다.

 

첫째, 가장 중요한 것은 당태종의 모형과 초당역사의 반영이다.

 

부견 본인에 대한 서술 및 부생과 부견의 관계를 설명하면서, Rogers는 이것은 실제로 초당역사가들의 당태종에 대한 기술이라고 본다. Rogers가 보기에, 비록 방현령등의 사람들이 명을 받아 <<진서>>를 편찬했지만, 그들은 전문적인 사관(史官)이 아니었고, 역사학에 대한 수양은 의심스러웠다. 그들은 조정에서 가장 중요한 대신이었고, 그래서 진실한 역사를 기술하는지 아닌지는 그들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오히려 역사편찬이라는 핑계를 들어 황제에 간하는 것이 그들의 진정한 의도였다. 그들은 비록 조정의 정사를 손바닥 보듯이 잘 알고 있었지만, 군신이라는 신분차이로, 당태종과 같은 개명한 군주라 하더라도, 그들이 하고 싶은 말을 다 할 수는 없었다.

 

정관17년(643년) 정월, 위징이 죽은 후, 조정신하중에는 더 이상 위징처럼 직언을 할 사람이 없었다. 당태종에게 감히 비판하는 사람은 갈수록 줄어들었고, 당태종의 전횡은 갈수록 심해졌다. <<진서>>의 편찬은 바로 이 때 이루어졌다. 그래서, <<진서>>의 편찬자들은 "부견을 하나의 특수한 영웅으로 그리고, 또한 당태종 본인의 형상과 밀접한 관련이 있도록 하였다" <<진서, 부견재기>>중에서 "그들은 7세기에 발생한 일들은 아주 교묘하게 전진의 역사기재속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이렇게 "집어넣는데"에는 먼저 부견이전인 부생의 시기부터 집어넣었다. <<부견재기>>의 전편은 <<부홍, 부건, 부생재기>>이다. 즉, 부견이 흥성하기 이전의 전진의 여러 군주에 대한 것이다. 부홍은 부견의 조부이고, 전진정권의 창립자이다. 부건과 부웅은 부홍의 두 아들이다. <<부홍, 부건재기>>에 대하여 Rogers는 참위와 신화 및 그 배후의 의미에 대하여 논술하였다. <<부생재기>>에 대하여도 시스템적인 분석을 하였다. 부생은 부건의 아들이며, 부견의 당형이다. 재위 2년만에 부견이 일으킨 정변으로 하야하게 된다. 이때 겨우 23세였다. 그러나 <<진서. 부생재기>>에는 부생을 아주 악랄한 폭군으로 그리고 있다.

 

"부생은 조회를 할 때 마구잡이로 화를 내고 살육을 했다. 어떨 때는 몇달을 술에 취해있었다. 간신의 말을 들어, 상벌이 균형을 잃었다. 좌우에서 폐하의 성명으로 태평성대를 이루었다고 하면 '나에게 아부하는 구나'라고 하면서 참했고, 혹은 폐하의 형벌이 너무 과합니다라고 하면, '나를 비방한다'라고 하여 역시 참했다. 처첩이 조금이라고 뜻을 거스리면 죽여버렸고, 시신을 위수에 흘려보냈다. 궁인과 남자를 나체로 대전앞에서 교합하게 하고, 산채로 소 말 당나귀 말의 껍질을 벗기고, 산채로 닭, 돼지, 거위를 삶았다. 혹은 사형수의 얼굴껍질을 벗기고 춤추게 하였으며, 여러 신하들을 불러 같이 보며 즐겼다. 종실, 훈구, 친척, 충량들이 거의 모두 죽었다. 왕공들로 관직에 있던 자는 질병을 핑계로 물러났다...."

 

부생은 재위기간이 2년도 안되었는데, 나쁜 짓을 한 것은 이루 수를 헤아릴 수 없었다. 천하폭군의 모든 죄행은 부생에게 귀속되었다. 걸, 주의 잔폭함도 전혀 이에 미치기 힘들 정도였다. 유지기는 <<사통. 곡필>>에서 "옛날 진나라 사람들이 죽지 않았다면 부생이 무고를 당했음을 증명했을텐데"라고 한탄했을 정도이다.

 

부생을 극력 폄하하는 동시에, 부견에 대하여는 더욱 찬양했다. <<부견재기>>에는 먼저 부견의 출생을 신격화한다. 그가 출생할 때 '신광이 하늘에서 그 정원으로 비추었다'는 것이다. 그 조부인 "부홍이 기이하게 여기고 그를 사랑했다"는 것이다. 그의 형인 부법이 정변을 일으켜서, 부생을 시해한 이후에, 부법이 황제가 되었다. 그런, 부견은 다시 그의 형인 부법을 죽이고 스스로 황제가 되었다. 편찬자는 이 사건을 서술하면서, 그의 모친을 끌어들여서, 부견이 인자함을 그리고 있다. 그러나, 부견이 인자하였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왜냐하면, 인자하다면 부법을 사지로 몰아넣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후, 부견의 정치가 아주 뛰어났음을 극력 칭송하고 있다. 이것은 부생의 폭군이미지와는 전혀 상반되는 것이다.

 

Rogers는 부생을 폄하하는 것은 간단한 폭군의 전형을 만들어내는 것에 의미가 있을 뿐아니라, 심각하고 내재적인 반풍자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본다. 진정한 역사는 그저 편단(片斷)이다. 왜냐하면, 부생의 이름은 당나라이전에 계속 견책받는 대상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방현령등은 <<진서>>를 편찬하면서 이 기회에 그들의 허구를 삽입한 것이다. 이로써 부견을 칭송하였다. 이것도 역사학자들의 정치적인 목적이 있는 것이었다. Rogers가 보기에, 방현령등이 부생을 이건성과 이원길과 동등시하고, 부견은 이세민에 비유했던 것이다. 왜냐하면, 부견이 부생의 자리를 빼앗는 정변은 626년에 벌어진 현무문지변과 같고, 부생과 부견의 관계는 이건성과 이세민의 관계와 아주 흡사하다. 사서의 기재에 의하면 부견도 일찌기 국사를 파기시켰고, 이세민도 역사를 새로 고쳐썼다. 당태종이 황제에 오른 후 역사서를 고쳐썼기 때문에, 당나라초기의 역사는 그 모습이 전혀 다르게 바뀌었다.

 

Rogers가 보기에, <<부견재기>>는 부생을 마귀화하고, 부견을 신격화하였다. 실제로는 당태종이 이건성, 이원길을 마귀화하면서 자기를 신격화한 현실을 반영한 것이다. 당나라초의 역사는 당태종이 즉위한 후, 거의 전부 새로 썼다. 그리고 부견도 마찬가지로 역사를 새로 고쳐쓴 바 있다. <<부견재기>>에는 "처음에, 부견의 모친은 어려서 과부가 되었다. 장군 이위와 관계가 있었다. 사관이 이를 기재하였다. 이때 (382년), 부견이 기거주와 저작에서 이 내용을 보았다. 화를 내면서, 그 책을 불태우고 사관들을 점검하여 죄를 가하였다. 저작랑 조천, 차경등은 이미 죽어서 그만두었다" 사관이 피살당하고 사서도 고쳐썼다. 부생의 잔폭한 이미지는 바로 부견이 고의로 만들어낸 것이다.

 

당태종은 현무문의 변에서 형과 동생을 죽이고, 부친을 핍박하여 퇴위하게 하는 일련의 사건은 금기였다. 그래서 사관들이 이 사건을 기재하면서 매우 조심하였다. 그리하여 사서를 대거 수정하게 된다. 기거주는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다 기재"하므로 당태종이 꺼리는 바가 있었다. 어쨌든 현무문의 변은 당태종에게는 하나의 부담이었다. 그래서 그는 갖가지 방법을 동원하여 실록을 보았다. 정관14년(640년) 당태종은 방현령에게 <<고조. 태종실록>>을 가져오게 한다. 현무문의 변에 대한 기재에 쓸데없는 말을 많이 적어놓은 것을 보고 방현령에게 "예전에 주공이 관, 채를 죽이고서야 주황실이 안정되었고, 계우가 숙아를 독살한 후에 노나라가 평안해졌다. 짐이 이렇게 한 것은 그 뜻이 같은 것이다. 모든 것이 사직을 안정시키고 만민의 이익을 위함이다. 사관이 붓을 듬에 어찌 감춤이 있을 쑤 있겠는가. 쓸데없는 글들은 삭제하고 그 일을 그대로 적어라" 기거주와 실록은 원래 군주가 볼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은 불문율이다. 그러나, 당태종은 이 규칙을 깼다. 사사로이 대신들에게 실록을 보여달라고 했다. 그리소 사관들의 기재에 대하여 많은 불만도 표시했다. 자기의 생각대로 고쳐쓰라고 명령하기도 했다. 사관이 그 일을 그대로 적을 수가 없었다. 당태종이 당고조, 당태종의 실록을 본 일은 바로 <<진서>>를 편찬하기 6년전에 있었던 일이다.   이 때 당태종은 직접 방현령에게 말한 바 있다. 현무문의 변에 관하여, 당태종은 주공이 관, 채를 주살한 것처럼 사관들은 이 원칙에 따라 기술하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역사의 진상은 이로써 매몰되고 만다. 이후의 <<신당서>> <<구당서>>는 이처럼 현무문의 변을 기록하고 있다. 원래 이세민 형제간의 황위쟁탈전인 궁정투쟁이, 이세민 본인의 간여 및 즉위후의 정통성을 확보하게 되면서 진상은 이처럼 모호하게 바뀐 것이다. 이세민이 황제가 되자, 그는 바로 정의의 화신이 된 것이다. 당태종은 관청에서의 사관보호제도를 파괴했다. "실제증거로 정사를 규정하는 것에서 황제가 정한 방향에 맞추어 정사를 쓰는 방향으로 변질되게 된다" 위진이래 사학에서의 강렬한 "역사로 황제를 견제한다"는 전통에 따라, 실록과 <<진서>>의 편찬자들(방현령등)은 이런 전환에 강력한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하여 곡필하는 방식으로 역사를 서술하였다.

 

Rogers가 보기로는 다음과 같다: 기원643년에 방현령이 실록을 올리고, 당고조실록이 거의 전부 고쳐쓰여졌다. 이 일이 발생하고 얼마되지 않아, 당태종은 다시 방현령등에게 <<진서>>를 편찬하라고 명령한다. 당태종의 방식은 부견의 방식과 유사하였으므로, 신하된 방현령등은 감히 당태종의 명을 거역할 수 없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진서>>를 편찬하면서 그들의 계획을 실행시킨 것이다. 그래서, 부생을 더욱 잔폭하게 그리고, 부견을 거의 성인처럼 그렸다. 실제로, 이것은 부견의 진면목이 아니다. 오히려 당나라의 현실에 대한 반풍자였다. Rogers는 방현령등이 이렇게 한 것은, 사실 일거양득을 노린 것이었다. "그는 황제에 대한 불만과 원망을 배설하는 동시에, 일정한 정도에서 역사가의 실패를 보충한 것이다. 왜냐하면 역사가들은 일종의 신념이 있는데, 즉 당안의 진실성은 신성불가침이라는 것이다. 동시에 그는 일련의 부호를 삽입해서, 후세인들이 당나라 초기의 역사에 대하여 후세인들이 의심하는 태도록 갖게 암시하는 역할을 했다.

 

이러한 분석에 기초하여, Rogers는 나아가 부견의 중신인 한인 왕맹을 당나라 초기의 선비의 대표로 본다. 왕맹과 전진의 여러 호족들과의 투쟁은 당나라초기 선비들과 당시 세습가족간의 다툼으로 본다. 부견은 왕맹을 중용하여, 다른 귀족들의 반대에 부닥치는데, 부견은 이련의 조치를 취하여 왕맹의 권력을 강화시켜준다. Rogers가 보기에 이것은 진실의 역사가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당나라초기에 발생한 유사한 사건을 의미한다는 것이며, 당나라초기에 문인과 세습귀족간의 갈등을 반영한 것이라는 것이다. <<부견재기>>에는 전진에 대한 어떠한 일은 얘기해주지 않으므로 우리가 아무렇게나 추측할 수는 없다. 그가 우리에게 얘기해주는 것은 그가 생활한 시대(당나라초)에 본 유사한 사건이다. 380년에 부견이 영지를 나눠주어, 그의 가족구성원 및 친척들을 제국내의 가장 중요한 도시로 보내어, 남하하여 동진을 공격하는데 대한 준비의 일환으로 삼는다. Rogers는 이것은 실제로 637년 당태종이 가족 20여명에 봉지를 주었던 역사를 반영하는 것이며, 이것도 당나라 초기의 역사라는 것이다. 그래서, Rogers는 초기당나라역사에 대한 반영이 바로 <<부견재기>>의 진실한 목적이라고 본다.

 

2. 신화, 참위 및 상상

 

Rogers가 보기에 <<부견재기>>전편은 신화와 상상으로 점철되어 있다. 정통관념은 처음부터 부견이 동진을 치러 출정한 것이 실패할 운명임을 보여주고 있다. 이 모든 것은 Rogers가 <<부견재기>>를 해석하는 중요한 수단이다. 확실히, <<부견재기>>의 여러가지 신화이야기, 참위전설은 역사인물들에게 신비로운 색채를 더해준다. 그리고 역사의 전진에 대한 일종의 숙명감을 더한다.

 

Rogers는 신화모델을 몇 가지로 분석한다. 그는 먼저 하나의 지명, 곡옥(曲沃)과 하나의 관직명, 용양장군(龍將軍)인데, 이 두개의 명사는 부견의 운명과 전진제국의 흥망성쇠를 암시한다고 한다. 상징의 하나로서의 곡옥은 부견의 운명변화에 대한 하나의 부호이다. Rogers는 부견시기의 곡옥에서 춘추시대의 곡옥(曲沃)을 연상한다. 당시에는 진나라 태자 신생(申生)의 영지였다. 그래서, Rogers는 신생과 부견의 운명이 연결되는데, 이것은 초당 사가들이 고의로 지어낸 거이라고 본다. 신생은 부견의 그림자이고, 신생의 운명은 부견의 운명을 암시한다. 춘추시대, 진헌공은 여희를 총애하였고, 여희는 아들 해제를 낳는다. 이후 태자 신생을 모함한다. 먼저 헌공의 자식들을 헌공의 주변에서 멀리하게 한다. "태자 신생을 곡옥에 거주하게 하였고, 공자 중이는 포에 거주하게 하고, 공자 이는 굴에 거주하며, 헌공은 여희의 아들 해제와 강에 거주하였다. 진나라는 이 때부터 태자를 세우지 않았다." 그 후, 여히는 다시 신생을 부추겨 생모 제강을 제사지내게 한다. 신생은 모친 제강을 곡옥에 제사지내는데, 제사지낸 고기를 진헌공에 바쳤다. 마침 진헌공이 사냥중이어서, 고기를 궁중에 놔두게 되는데, 여희가 사람을 시켜 독약을 고기에 넣는다. 진헌공이 돌아와서 고기를 먹으려 할 때, 여희가 이를 제지하며, 개에게 주니 개가 죽고, 소신에게 주니 소신이 죽었다. 이 기회에 여희는 태자를 무고하였고, 신생은 이 사건을 알고 난후 신성으로 도망쳤다가, 결국 신성에서 자결한다. 신생과 교묘하게 맞는 것은 부견도 곡옥에서 일어나 신성에서 망했다는 점이다.

 

<<부견재기>>에는  "부건이 꿈속에 천신이 사자 주의적관을 보내 부견을 용양장군에 명하라고 하였다. 부건은 다음 날 곡옥에 단을 세우고 부견에게 용양장군을 내렸다" 곡옥에서 용양장군을 수여받는 것은 부견이 역사무대에 등장하는 것이었다. Rogers는 용양장군도 하나의 부호로 본다. 부견의 조부인 부홍이 최초에 부여받은 것도 용양장군이었고, 부견도 이 관직을 얻었는데, 이는 그가 나중에 황위대통을 이을 것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이후, 그는 날로 세력을 얻어 결국 황위에 오른다. 그러나, 그가 동진으로 출정하기 전에, 용양장군의 칭호를 선비족 장군인 요장에게 부여한다. "부견이 요장에게 용양장군을 주면서 말했다. 짐은 용양으로 기업을 세웠다. 용양의 호는 일찌기 헛된 사람이 없었다. 오늘 특히 이를 그대에게 주니, 산남의 일은 그대에게 맡기겠다" 부견의 좌장군 두충은 진언하여 아뢰기를 "황제의 말에는 희언이 없습니다. 이것은 불상의 징조입니다. 폐하께서 굽어 살피소서"라고 하였다. Rogers는 출정전에 용양장군을 요장에게 넘긴 것은 전진제국의 앞날이 얼마남지 않았음을 말해주는 것이라고 본다. 그리고 붕괴후 요장이 천하를 이어받을 것이라는 것을 나타낸다고 본다. "비수지전"후 부견의 대부분의 부대는 궤멸되고, 오로지 요장이 이끄는 선비족 부대만이 보존된다. 마침내 요장의 군대는 부견을 오장산에서 포위하고, 부견을 신평에서 잡아 불사에서 목을 매달고, 과연 전진 부견의 정권을 대체한다. <<부견재기>>에는 "부견이 강성할 때, 동요에서 '강물이 다시 맑아지면, 부견은 신성에서 죽는다'는 것이 있었는데, 그대로 되었다"

 

Rogers가 보기에, 용양장군은 부건이 부견에게 부여한 관직이고, 부견이 정권을 장악할 것을 예시했으며, 전국을 통일시킬 수도 있었다. 왜냐하면 중국역사상 용양장군은 처음에 서진의 무제가 왕준(206-286)에게 내린 관직인데, 왕준은 280년 군대를 이끌고 오나라를 멸망시키며 서진의 통일천하를 이루었다. 부견이 이 호를 계승한 것은 그가 남정하여, 그의 전국통일의 야심을 이룰 수도 있었다는 것을 나타낸다. 그러나, 그는 전쟁을 일으키기 2년전에, 용양장군의 칭호를 요장에게 주어버린다. 이것은 그의 치명적인 잘못이었고, 남정의 실패를 암시한다. Rogers는 "신생은 부견의 성격을 나타내고, 왕준은 그의 웅심을 나타낸다" 곡옥과 용양장군은 초당의 사가들이 삽입한 상징부호이고, 부견의 흥망성쇠를 암시하는 것이다.

 

3. 비수지전: 사실과 상상의 결합

 

부견의 전진제국의 운명을 결정하는 비수지전에 대하여, Rogers는 초당 사가들이 하나의 자그마한 사실을 빌려서, 수나라의 고구려정벌실패의 교훈과 일부 허구를 섞어서 무한히 확대하여 날조한 것이라고 본다. 이렇게 한 의도는 당태종이 고구려를 정벌하는 전쟁을 반대하기 위한 것이었다. Rogers는 부견제국의 흥망성쇠를 당태종시기에 대입시켰고, 비수지전 및 부견의 패망을 또한 수양제의 그림자로 보았다. 수양제가 고구려정벌의 실패로 인하여 초당 사가들은 수양제를 부견의 또 하나의 원형으로 인물을 만들어냈다. 비록 당태종은 수나라 멸망을 친히 겪었지만, 수나라가 고구려의 정벌로 인하여 망하였다는데에는 방현령등 신하의 견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여전히 고구려를 자기의 목표로 삼았고, 신하들은 그의 고구려정벌을 저지하기 위하여 다시 하나의 모델을 만들어낸 것이다.

 

Rogers는 612년의 수양제의 고구려정벌이 실패한 살수대전(薩水大戰)과 383년 부견남정의 비수지전의 관련사료를 대비한 후, <<수서. 우문술전>>과 <<진서. 사현전>>에 기재된 두 번의 전쟁이 세부적인 부분까지 놀랄 정도로 같다는 것을 발견했다.

 

첫째, 두 전쟁이 발생한 지점이 모두 큰 강변이다. 수양제의 군대와 고구려는 살수변이었고, 전진과 동진은 비수변이었다.

둘째, 한 선두부대가 진영에서 출발하여, 급히 행군하여 적군의 퇴각을 저지하였으며, 이것은 일거에 적군을 소멸시키려는 의도였다. 우문술을 대군을 요하변에서 잃었고, 자기는 군대를 이끌고 고구려경내로 깊숙히 들어간다. 부견은 스스로 선봉부대가 되어 동진부대를 비수변에서 추격하였다.

셋째, 침략군은 스스로 적군장수의 건의를 받아들여 실시한다. 수나라 우문술은 고구려장군 을지문덕의 가짜항복을 받아들이고, 부견은 동진장군으로부터 약간만 퇴각하여주면 동진군대가 강을 건너겠다는 건의를 받아들인다.

넷째, 침략자는 하류의 앞에서 저격을 받는다. 그리고, 지류변에서 중요한 장수를 잃는다.

다섯째, 소수의 군대만이 도망치고, 대량의 물자를 남겨둔다. 살수대전에서는 수나라군대가 반쯤 강을 건넜을 때, 고구겨군대가 공격하고, 수나라중군인 신세웅이 피살된다. 30만이 요하를 건나왔는데, 겨우 2700명만 살아돌아간다. 비수지전은 진나라 100만대군이 하룻아침에 죽어버리고, 겨우 몇 천만 살아서 돌아간다.

여섯째, 수나라는 고구려정벌에 실패한지 얼마되지 않아 망해버리고, 전진은 비수지전이후 금방 망한다.

 

바로 이런 여러가지 비슷한 점으로 인하여 Rogers는 두번의 전쟁은 하나의 복사판이라고 보고, 이 두번의 전쟁은 따로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 의존하는 것이라고 본다. <<수서>>와 <<진서>>를 동일한 사가들이 편찬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Rogers는 두번의 전쟁이 비슷한 이유를 장영서의 <<진서>> 또는 최홍의 <<16국춘추>>가 먼저 <<수서>>의 편찬에 영향을 주고, 다시  <<진서>>의 편찬에 영향을 주었기 때문이라고 본다.

 

비수지전과 살수지전이 닮은 점이 많다는 점에 의문을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Rogers는 최소한 두가지의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본다.

 

첫째, 383년, 진나라군대는 수춘에서 확실히 북방전진의 군대에 항거한 적이 있다. 다만, 침입자들은 그저 수춘에 며칠을 머물다 회북으로 쫓겨났다는 것이다. 즉, 비수지전의 진실한 전쟁은 383년의 유뇌지의 군대와 전진군대간의 수춘부근에서 발생한 전투라는 것이다. 유뇌지의 전기에서 이 전쟁에 대한 기술이 있다. 그러나, 이것은 규모가 그리 크지 않고, 영향력도 크지 않았던 전투였다.

둘째, 이후 얼마되지 않아, 전진제국은 내분으로 붕괴되고 만다. 그러나, 진나라의 정통론자들은 이런 간단한 사실만으로는 만족하지 않았다. 그래서, 남조의 사가들은 이 사건을 무한히 확대하여, 유뇌지의 전적을 사씨가족의 공적으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왜냐하면, 유뇌지는 나중에 진나라를 배반하였고, 사씨가족은 동진의 정권을 계속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여러번을 거치며 이는 전설이 되었다. 그래서, Rogers는 비수지전은 사실과 상상의 결합으로 보는 것이고, 모호한 사실과 신화를 함께 결합하여 구분하기 어렵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주서(朱序)의 역할에 대하여는 Rogers도 의문을 가지고 있다. 주서는 동진이 성공한 주요한 요소이다. 그는 원래 동진의 장수이고, 양양에서 부견에게 포로가 되었다가 전진에 투항했다. 전투개시전에, 다시 부견의 사자로 동진을 방문한다. 그러나, 전진의 허실을 모두 동진장수 사석(謝石)에게 얘기해준다. 그리하여 동진장수들은 부견의 건의를 받아들인다. 부견이 건의를 받아들여 약간 퇴각한 후, 주서는 다시 군진에서 크게 소리친다 "부견이 졌다" 이로써 전진군대는 혼란에 빠지게 된다. Rogers가 보기에 이것 자체는 아주 의심스럽다. 아마도 허구의 인물일 것이라는 것이다. 팔공산의 초목개병도 전형적인 날조이다. 전쟁이 발생한 지점과 시간에 대하여도 Rogers는 의문을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서로 다른 역사서마다 서로 다르게 기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발생지점은 <<진서.사현전>>에는 비수의 남쪽, 그러나 어떤 사서는 비수의 북쪽이라고 하고 있다. 발생한 시간에서 <<진서>>는 11월 30일(기해) 즉, 돼지일이라고 하고 있다.  그러나, 부견이 돼지띠이다. 사마광의 <<자치통감>>에는 일자를 쓰지 않고 그저 평상적인 날이라고 하였다. Rogers는 이런 상호 모순되는 기록은 비수지전이 허구라는 것에 더욱 확신을 갖게 한다고 하였다.

 

Rogers가 보기에, 비수지전은 바로 383년 유뇌지의 전쟁을 원형으로 하고, 여기에 수나라가 고구려정벌실패한 살수지전을 집어넣어 날조해낸 것이라고 한다. 이 안에는, 진나라의 정통성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왜냐하면 진나라건 당나라건 모두 동진이 정통성을 가졌다고 믿었었고, 사안은 바로 이런 정통성을 보호하는 대표적인 인물이다. 이런 정통성은 <<부견재기>>에서 처음부터 드러난다. 왕맹이 부견에게 말하기를 쉽게 동진을 정벌해서는 안된다고 말하는데, 그 이유는 동진에 정통성이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Rogers가 보기에, 비수지전에서 동진의 승리를 만들어낸 것은, 중국문화의 승리를 만들어낸 것이고, 이로써 사가들의 심리상의 만족을 얻었다는 것이며, 중국문화가 오랑캐문화보다 우월하다는 자부심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