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삼은 1884년 2월 사천성 광안현(廣安縣)의 용태사향에서 태어났다. 그는 부친의 영향을 받아 어려서부터 무술에 관심을 가졌고, 청나라말기 순경부(順慶府, 지금의 남충)중학을 졸업한 후, 사천육군속성학당을 다녔다. 여기서 유상(劉湘), 당식준, 반문화등과 함께 공부한다. 디들은 나중에 유상, 양삼을 우두머리로 한 "속성계"를 구성하며, 사천군벌집단의 핵심인물이 된다.
양삼은 사천군벌중에서 매우 특이하고 재미있는 인물로 활동공간이 가장 넓고, 경력이 가장 복잡하고, 수명이 가장 길었던 인물이다. 국민당육군상장이며 20군군장을 지냈다. 그는 신해혁명, 호국전쟁, 군벌혼전, 항일전쟁등의 역사시기를 거치면서 원세개를 토벌하는데 참여하기도 하고, 영국함대에 포격을 가하기도 하고, 주덕, 진의, 호지명등을 보호해주기도 하고, 오패부와 결탁하여 혁명을 파괴하기도 했으며, "평강참안"을 조성하기도 했고, 적극적으로 장개석을 추종하여 내전에 참여하기도 했다. 마지막으로는 대만으로 도망쳐 96세의 나이로 사망한다.
그리고 그는 국민당군벌중에 처첩이 많기로 유명한 사람이다. 처첩과 자식이 얼마인지는 아무도 모른다는 말이 있을 정도이고, 심지어 첩이 30명이상, 60명이상이라고 보는 사람까지 있다. 공개된 그의 처첩은 모두 12명이고, 자녀는 모두 43명이다.
첫째부인, 장씨(張氏)
전형적으로 부모의 명에 따라 결혼한 경우이다. 결혼초기에 두 사람의 감정은 매우 좋았다고 한다. 장씨는 시부모를 잘 모셨고, 시동생, 시누이와도 잘 지냈으며, 근검하고 집안일을 잘했다. 그래서 양씨집안에서 평이 아주 좋다. 나중에 양삼이 육군속성학당에 들어간 후 장씨는 병으로 급사하는데, 양삼은 젊어서 처를 잃고 매우 슬퍼한다. 나중에 그는 처남인 장원배를 20군으로 데리고 와서 군수관을 시킨다. 그리하여 장원배도 상당한 재산을 축적할 수 있게 해준다.
둘째부인, 담정덕(潭正德)
1908년 양삼은 군관학교를 졸업한 후, 부모의 뜻에 따라 광안의 고향사람인 담정덕을 후처로 맞이한다. 담씨는 장남과 장녀를 낳는다. 그러나 양삼에게 첩이 많아진 후 냉대를 받아 홀로 광안의 고향집을 지킨다. 1976년 9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다.
셋째부인, 유곡방(柳谷芳)
운남성 녹봉사람이다. 1913년 양삼이 전군(滇軍, 전은 운남성을 말함)에 있을 때, 장관인 황유성을 위하여 곤명의 안녕온천에 별장을 짓고 있었다. 유곡방의 부친인 유주경(柳柱卿)은 시공현장의 십장 정도의 인물이었다. 그는 양삼이 군인기질이 농후하고, 몸이 건장하며, 일을 거침없이 처리하는 것을 보고는 자기 딸을 그에게 첩으로 준다. 이 유주경의 투자는 성공적이어서, 양삼이 성공한 후 유주경은 20군 주무한, 성도판사처의 처장 겸 군장대표를 맡아 돈을 많이 끌어모은다. 그러나, 딸은 그다지 운이 좋지 못해서, 항전시기에 폐병으로 사망하고 만다.
넷째 부인, 전형추(田衡秋)
그녀는 양삼의 처첩들중에서 지위가 가장 높고, 집안 환경이 가장 좋았으며, 양삼으로부터 가장 사랑받았던 여인이다. 1920년, 양삼이 전군의 이익을 배반하고, 유상의 지지하에 사천으로 되돌아와서 천군 제9사의 사단장을 맡는다. 한번은 그가 부대를 이끌고 랑중으로 갔는데, 길거리에서 전형추와 마주친다. 한눈에 반해서 그녀를 뒤쫓아가서 신분을 확인하고 중매인을 보낸다. 이 때, 전형추는 이미 혼약이 되어 있었고, 전씨집안은 사업을 오래 해서 집안도 아주 부유했다. 그래서 딸을 첩으로 보내려고 하지 않았으며, 전형추의 부친은 한마디로 거절한다. 그러나, 양삼은 포기하지 않고, 한편으로 전형추에게 접근하면서 또 한편으로는 전씨집안에 강경온건수단을 모두 쓴다. 다음 해 양삼은 북양정부에 의하여 호영진수사로 임명받아, 더욱 거리낌없이 달려들었다. 전씨집안에서는 어쩔 도리가 없어 딸을 노주의 양삼에게 보내고 만다. 그러나, 이 일로 전형추의 부친은 분함을 참지 못하고 죽고 만다.
전형추는 역시 상인집안출신이어서인지, 집안 재산관리에 뛰어난 재주를 보였다. 그리고 양삼의 마음을 잘 읽어서 금방 양삼집안의 재산관리를 맡게 되었다. 1949년에는 전형추는 양삼이 여러해 모은 재산을 가지고 먼저 대만으로 간다. 이로써도 양삼이 그녀를 얼마나 신임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전형추는 몇 년이 지나지 않아, 홍콩으로 친척방문을 갔다가 뇌일혈이 발작하여 반신불수가 된다. 20여년간 투병생활을 하는데, 양삼은 점차 그를 멀리 하게 되고, 미국에 가있던 딸이 그녀의 마지막 병수발을 든다.
다섯째 부인, 소방경(蕭邦瓊)
양삼이 노주에 주둔할 때, 자기 부하의 딸인 그녀를 수중에 넣는다. 소방경의 부친은 원래 양삼이 전군에서 단장을 맡고 있을 때, 비서였다. 한번은 양삼의 집에서 연회를 베푸는데, 그가 딸을 데리고 왔었다. 술을 따를 때, 양삼의 눈빛이 반짝이고, 어른이 딸에게 하듯이 소방경의 머리를 만지면서 "몇년간 못봤더니 어린애가 벌써 이렇게 컸구나 아주 예쁘게 자랐다"고 하였다. 양삼의 내심을 잘 읽는 다른 부하가 이런 모습을 보고는 소방경의 부친에게 권해서 그녀를 양삼의 첩으로 주도록 한다. 소방경은 원래 생긴 것도 예쁘고, 신식학교에서 공부도 했으며, 교사직도 하였다. 전형추와 비교하여, 그녀는 더욱 교묘했고, 잘 처리했으며, 일처리가 분명했다. 전형추처럼 가식적이거나 세상물정을 다 아는 것처럼 하지 않아서, 양삼에게는 아주 순수하게 보였다. 당연히 그녀를 많이 아낀다. 불행히도 1931년 소방경이 노주에서 배를 타고 갈 때, 배가 뒤집혀 익사하고 만다.
여섯째 부인, 진순용(陳順容)
그녀는 눈썹이 두껍고 눈이 큰 전형적인 광동여인이었다. 원래 셋째 부인의 유곡방의 시녀였는데, 양삼이 그녀가 15세때 첩으로 삼아버렸다. 언어와 성격문제로 인하여 진순용은 항상 소극적이고 양삼에게 환심을 사지 못했다. 조금만 잘못하면, 양삼은 말채찍으로 그녀를 때리곤 하여 피부가 성할 날이 없었다. 진순용은 결국 정신병을 얻고, 양삼이 사람을 시켜 그녀를 쇠사슬로 묶어 광안의 고향집으로 보낸다. 해방후에 중경에서 병으로 죽는다.
일곱째 부인, 증계지(曾桂枝)
귀주 필절 사람이다. 그녀는 양삼의 처첩중에 몸매가 가장 뛰어났다고 한다. 원래는 양삼의 양녀였다. 일찌기 양삼이 군대를 이끌고 귀주로 들어갔을 때, 필절에서 오갈데없는 어린 여자아이를 양녀로 삼았다. 그리고는 부하에게 대신 기르게 하였다. 몇년후 옛날 때묻고 엉망이던 여자아이는 이미 예쁜 처녀로 자라 있었다. 나중에 유곡방의 시녀를 하다가, 이름을 양가계로 바꾸었다. 양삼은 마침내 전형추등의 도움을 받아 당시 14세이던 그녀를 첩으로 삼아버린다. 증계지는 천성이 기민하고 배움에 대한 욕심이 많았다. 양삼은 그녀를 위하여 가정교사를 붙여주고, 몇년후에는 상해, 북경등으로 보내어 공부하게 해준다. 그러나, 증계지는 상해에서 공부할 때, 대담하게 신생활을 추구하고 같은 반의 진씨성의 남학생과 사랑에 빠져버린다. 양삼은 이를 알고는 크게 분노하여, 두 사람을 거현의 교외에서 총살시켜버린다.
여덟째 부인, 왕덕방(汪德芳)
성도사람이다. 그녀는 처첩들중 대담하게 양삼과 결별하고 독립한 사람이다. 왕덕방의 부친은 양삼의 20군의 비서였다. 사람됨이 소심하였다. 어쩔 수 없이 딸을 양삼에게 바치게 된다. 왕덕방의 당시 나이 겨우 15살이었다. 결혼후 양삼은 그녀에게 계속 공부하도록 허락한다. 그리고 상해국립음악학원에 보내어 공부시킨다. 왕덕방은 공부를 마치고 돌아온 후, 양삼이 만든 성도천부중학에서 교장이 되고, 사회의 유명인사가 된다. 그리고, 국민당의 국민대회대표로 선출되기도 한다. 그러나, 양삼과는 관계가 좋지 않아서 거의 왕래가 없었고, 낳은 자식마저도 성을 왕(汪)씨로 고쳐버릴 정도였다. '문혁'기간중에 양삼과의 관계로 인하여 그녀는 낙산에서 자살한다.
아홉째 부인, 채문나(蔡文娜)
노현 사람이다. 그녀는 가장 아름다웠고, 양삼이 가장 사랑했고, 또한 가장 미워한 여인이다. 동시에 운명이 가장 비참한 여인이기도 하다. 채문나는 노현여자중학에 다닐 때, "교화(校花)"로 이름을 날렸다. 그녀의 기품과 요염함은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찬탄할 수밖에 없었다. 양삼이 그 소문을 듣고는 가서 한번 만나보았다. 그리고는 아주 마음에 들어했다. 바로 사람을 보내어 결혼을 요청하게 된다. 채문나의 부친은 낙방서생으로 딸의 행복을 따질 여유가 없었으며, 바로 승락해버린다. 14살의 어린 여자아이가 호랑이 입으로 들어간 것이다.
그녀는 아주 예뻣고, 양삼이 그녀를 데리고 다닐때마다 다른 사람들의 주의를 끌었다. 이로써 양삼의 허영심은 만족되었다. 나중에 그녀도 증계지와 마찬가지로 성도에서 대학을 다닐 때, 여모라는 남학생과 사랑에 빠지며, 양삼에 의하여 잔인하게 살해된다.
열째 부인, 정문여(鄭文如)
중경남안의 유화사창의 보통여공이었다. 양삼이 국민당 귀주성주석을 맡고 있을 때, 부하중에 의사가 정문여의 먼 친척이었다. 그는 자기가 군의처 처장이 되고 싶었다. 그리하여 양삼이 첩을 구한다는 것을 알고는 중경으로 돌아와서 정문여의 가족을 설득한 후, 정문여를 귀양으로 데려가서 곱게 화장을 시킨 후 양삼에게 보낸다. 양삼은 매우 기뻐하여, 바로 그를 군의처 처장으로 승진시킨다.
정문여는 당시 17살이었다. 채문나, 증계지의 변고를 겪은 후, 양삼은 그녀를 신변에 두고 다른 곳으로 가지 못하게 하였다. 정문여는 나중에 폐병을 앓아, 용모가 상하게 되었으며, 결국 양삼은 그녀를 멀리한다. 해방후 정문여는 중경에 남아서, 보통노동자와 결혼한다.
열한째 부인, 호결옥(胡潔玉)
그녀는 양삼의 가복(家僕)의 딸이었다. 호결옥의 부친인 호응충은 양삼의 광안 고향집을 수십년 지켜준 사람이고, 서로간의 정이 깊었다. 호결옥이 14살이 되었을 때, 중경으로 공부하러 갔는데, 양삼의 집에 머물렀다. 양삼의 많은 자녀들은 그녀를 호누이라고 불렀다. "사람은 늙어도 마음은 늙지 않고, 늙은 소는 연한 풀을 좋아한다"는 것처럼 이미 60여세된 양삼은 호결옥을 첩으로 취하려 한다. 호응충은 당연히 거절했고, 딸을 데리고 고향으로 돌아간다. 양삼은 고향집까지 쫓아와서 호결옥을 강제로 중경으로 데리고 가서 당당하게 첩으로 맞이한다. 호응충은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동네사람들의 손가락질을 견디지 못해, 고향을 떠났으며, 어디로 갔는지는 아무도 모른다고 한다. 호결옥은 양삼이 대만까지 데리고 간다. 그녀는 처첩중 전형추를 제외하고 유일하게 대만으로 데려간 경우이다. 양삼이 86세때 그녀는 딸 하나를 낳는다. 나중에 딸을 데리고 미국유학을 떠났으며, 지금 미국에서 살고 있다.
열두째 부인, 장영봉(張靈鳳)
대만 신죽사람. 양삼이 90세때, '비서'를 뽑는다는 명분으로 17살된 중학생을 집안으로 끌어들인다. 원래 그의 90회생일날 고향사람인 국민당원로 장군이 그를 방문하러 왔을 때, 양삼은 '나는 젊은이와 같이 있는게 좋은데, 그래야 기운이 난다'는 말을 듣고, '그럼 하나 더 얻지 뭐'라고 답변한다. 이렇게 해서 장영봉은 그의 마지막 첩이 된다. 생각지도 못하게 1년만에 장영봉은 딸을 하나 낳는다.
1977년 3월, 양삼은 필리핀방문을 마치고 돌아와서 타이페이 3군총의원에서 폐암으로 진단을 받고, 두 달후에 96세인 양삼은 목숨을 거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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