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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송)

해릉왕(海陵王) : 가장 가식적이었던 황제

by 중은우시 2007. 3. 25.

 

어떤 사람은 살펴보면 볼수록 재미있는 사람이 있다. 금나라의 황제였던 '해릉왕'은 바로 보면 볼수록 재미있는 사람이다. 왜 그런가? 그는 아주 가식적인 행동을 잘하는 사람이었다.

 

젊었을 때, 해릉왕은 다른 사람과 달랐다. 한번은 다른 사람의 부채에 대련(對聯)을 써주었다. 내용은 이랬다. "대병약재수, 청풍만천하(大柄若在手, 淸風滿天下, 큰 자루를 손에 쥔다면, 온 천하에 맑은 바람으로 가득차게 하련만)" 글 내용만 본다면 얼마나 높은 경지이고, 원대한 안목인가? 큰 뜻이 그대로 담겨져 있고, 천하창생을 위하여 좋은 일을 해보겠다는 포부가 그대로 드러나 있다.

 

그러나, 그가 정말 그렇게 생각했었겠는가? 아니다. 그는 그저 문자유희를 즐긴 것뿐이다. 그가 다른 사람에게 이런 글을 써준 것은 그저 '명예'를 추구하는 것에 다름이 아니고, '다른 사람의 존경을 이끌어내기 위한 것'에 다름이 아니다. 있는 그대로 말하자면,  명성을 얻기 위한 것이다. 그의 진정한 생각과 실제로 취했던 행동은 바로 황제가 되려는 것이었고, 자기의 야심을 실현하려는 것이었다.

 

당시 금나라의 희종황제는 황제위에 있은지 이미 10여년이 되었다. 아마도 황제위에 너무 오래 있어서 그런지, 막 즉위했을 때처럼 성실하지도 않았고, 궁중의 기풍을 어지럽히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자조 술을 마시고 주사를 부리고, 대신들도 때리거나 욕을 하고, 심지어 무고한 사람을 함부로 죽이는 경우도 있었다. 그리하여, 당시의 좌승상 당괄변(唐括辯)과 우승상 병덕(秉德) 그리고 해릉왕은 그를 폐위시키기로 공모한다. 그렇다면, 폐위시킨 후에는 누구를 옹립할 것인가? 이 문제를 놓고 한번은 당괄변이 여러 명의 이름을 제시했지만, 하나하나 해릉왕이 안된다고 하였다. 나중에는 더 이상 옹립할만한 사람이 없게 되었다. 당괄변은 그제서야 깨닫고 해릉왕에게 물었다: "혹시 당신이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러자 해릉왕이 바로 대답했다: "역시 어쩔 수가 없습니다. 나말고 또 누가 있겠습니까?" 보라. 찬탈하는 마음이 그대로 드러나지 않았는가? 사실, 어찌 해릉왕뿐이겠는가? 허위적인 사람들은 왕왕 모두 이렇다. 중요할 때 그 허위의 면사를 그 자신이 스스로 걷어내는 것이다.

 

황제위를 찬탕하기 전의 해릉왕은 아주 착실한 사람이었다. 한번은, 해릉왕과 희종황제가 한담을 하고 있었는데,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금태조 아구타가 아주 힘들게 나라를 세우던 때를 얘기하게 되었다. 희종에게는 아주 의외로 해릉왕은 주룩주룩 눈물을 흘렸다. 이것은 희종에게 아주 좋은 인상을 남겼다. 그는 자신에게 충성을 다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사실은 전혀 반대였다. 희종을 죽인 것이 바로 릉왕이었다. 바로 희종이 스스로 자기에게 가장 충성스러울 것이라고 생각했던 사람이었다. 이것만이 아니었다. 희종에게는 자식이 많고 또한 매우 강성했다. 황제위에 오른 후, 해릉왕은 참초제근(斬草除根, 풀을 뽑으려면 뿌리까지 제거해야 한다)을 위하여, 희종의 자손 70여명을 죽여버린다. 이로써 희종의 일맥은 제사가 끊기게 된다.

 

재미있는 일의 하나는 황제가 된 해릉왕은 마치 많은 깨달음을 얻고, 스스로 경계하려는 듯이, 이번 신하들과 얘기할 때면, 자주 고대의 현군을 모범으로 삼아 좋은 황제가 되고 싶다는 말을 많이 했다. 한번은 문무백관의 앞에서, 공개적으로 대신들에게 직언을 하고 간언을 해달라고 말했고, 자주 조정의 잘하고 잘못하는 점을 지적해달라고 하였다.

 

해릉왕은 말한대로 실천하였는가? 그가 몰래 혹은 드러내놓고 한 행위들을 살펴보기로 하자. 해릉왕의 숙부인 조왕(曹王) 아로보(阿魯報)의 처인 아랄(阿)이 매우 예뻤다. 해릉왕은 그의 숙부를 죽인 후 아랄을 소비(昭妃)로 삼았다. 해릉왕의 조카며느리인 나랄홀(奈剌忽), 태후대씨의 형수인 포로호지(蒲盧胡只)는 모두 남편이 있는 여자였다. 그러나, 그녀들이 예쁘다는 이유로 해릉왕은 그녀들을 모두 비빈으로 삼았다. 자기의 욕심을 채우기 위하여, 해릉왕은 배분이나 인륜은 모두 무시했다. 해릉왕이 이처럼 말과 행동이 달랐던 것은 바로 이런 속담이 들어맞다는 것을 말해준다: '잘 우는 닭일수록, 알은 못낳는다"

 

황제로서, 매번 용간, 봉뇌를 먹지는 못한다고 하더라도, 어쨌든 산해진미는 최소한 매일 먹었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해릉왕은 자신이 근검절약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하여 자주 거위고기(鵝肉)를 먹었다. 어떤 때는 바깥에 나가서 사냥을 하는데, 거위고기를 다 먹어서 남은 것이 없었다. 그래서 한마리를 사는데 수만전을 들였다; 어떤 때는 소 한마리를 주고 거위 한마리를 바꿔왔다. 그래서, 그가 사냥을 떠나면, 주변에 있는 백성들은 이 기회에 횡재를 하곤 하였던 것이다.

 

옷을 입는 것은 더 재미있다. 그는 자주 낡고 떨어진 옷을 입었고, 주변 사람들에게 이를 드러내기 좋아했다. 이로써 자신이 아주 근검절약한다는 것을 나타내고자 했다. 어떤 때에는 특별히 옷에서 구멍난 곳을 기우게 하고는 황제의 의식주행을 기록하는 관리에게 이를 기록하라고 하곤 했다.

 

해릉왕의 이러한 행위들은 아주 엄숙한 것이기는 하지만 역시 일부러 꾸며서 하는 것이었다. 양두구육인 것이다. 궁전을 만들기 위하여, 나무재료 하나를 운송하는 비용이 이천만에 달하기도 하였고, 궁전을 전부 황금으로 장식해서, 날아다니는 금가루가 마치 눈오듯하기도 하였다. 이런 궁전을 짓는데만 억만금을 썼음에도 충분히 화려하지 않다고 생각하여, 철거하게하고는 다시 짓게 하기도 하였다. 특히 남송을 치러갈 때는 모두 50여만명의 장정을 징발하였는데, 여기에는 또 얼마나 많은 재물을 소비했겠는가? 사서에서 이 정벌을 "공국(空國, 빈나라)가 다른 나라를 치려고 한 것이었다"라는 평가도 무색하지 않다.

 

속담중에 은헤는 반드시 갚아야 한다는 것이 많다. 해릉왕은 이런 속담의 뜻을 잘 알고 있었던 것같다. 매번 전투할 때마다, 그는 병사들이 먹는 밥을 가져와서 먹었다. 어떤 때에는, 백성의 가마가 진흙에 빠져있는 것을 보고는 호위무사들에게 꺼내주라고 하기도 하였다. 이런 행동은 당연히 쇼이다. 자기 스스로 자신을 위하여 광고하는 것이다: "해릉왕은 백성을 아들처럼 아끼는 황제이다"라고. 그러나 정말 그러했는가?

 

남송을 칠 때, 그의 모친인 단씨태후는 그에게 그만두라고 권했다. 그는 화가 머리끝까지 나서 자기의 모친을 죽여버린다. 죽였으면 그냥 조용히 묻어주기라도 하면 될텐데, 그는 시신을 불태운 후, 뼈를 물에다가 뿌려버렸다. 또 한번은 기재(祁宰)라는 대신이 있었는데, 곧이곧대로 믿는 사람이었나보다. 그래서 해릉왕이 무슨 일이 있으면 직언해도된다는 말을 믿고는 남송을 공격하는 일에 대하여 반대의견을 냈다. 결과는 바로 목이 잘렸다. 나중에 해릉왕을 평가하면서 "음란함에는 골육을 가리지 않고, 처벌하여 죽임에는 죄가 있고 없음을 가리지 않았다(淫嬖不擇骨肉, 刑殺不問有罪)"라고 한 바 있다. 이처럼 자기의 친척, 수하에 대하여 정의가 없는 사람이 어떻게 백성을 자식처럼 사랑할 수 있겠는가.

 

아마도, 해릉왕은 자신의 가식술이 아주 고명하다고 생각했을 수는 있다. 그러나, 아무리 고명하더라도 결국에는 가식은 허위라는 것이 드러나는 것이다. 어떠한 사기도 한 사람 또는 일부 사람을 속일 수는 있지만, 모든 사람을 속일 수는 없고; 일시적으로는 속일 수 있지만, 영원히 속일 수는 없다. 해릉왕이 가식적인 것은 아무리 이런저런 행동을 했더라도 결국은 자신이 황제위에서 쫓겨나는 것을 막지 못했고, 자신의 목숨도 구하지 못했다. 사람을 속이는 것은 한계가 있는 것이다. 이것은 역사의 규율이고, 권력과는 관계가 없다.

 

해릉왕이 남송을 공격하는 도중에, 해릉왕은 황제위를 이미 빼았겼고, 신황제는 연호를 '대정(大定)'이라고 했다는 말을 듣는다. 그러자 그는 크게 탄식하면서 "내가 원래 강남을 평정한 후에 연호를 '대정'으로 바꾸려고 했는데, 그렇다면 이것도 하늘의 뜻이 아닌가?"라고 하였다는 것이다. 일생을 가식으로 살아온 해릉왕에게서 진심에서 우러난 말은 어떤 것들이 있는가? 대답은 쉽지 않겠지만, 위 말만은 적으로 폐부에서 나온 말이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