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정계진(丁啓陣)
조명성과 이청조의 사이에 자녀가 없었다는 것은 역사적인 사실이다. 이는 두 가지로 확인할 수 있다. 첫째는, 조명성과 이청조의 두 사람은 아무도 시나 글에서 자녀에 대하여 말 한마디 언급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둘째는 문헌의 기재에 의하면 그들 사이에는 자녀가 없었다. 홍적(洪適)의 <<석예(釋隸)>>에서는 명확히 "조군무사(趙君無嗣, 조군 즉 조명성은 후사가 없었다)"고 적고 있다. 호자(胡仔)의 <<어은총화(漁隱叢話)>>에도 "조무사(趙無嗣)"라는 말이 나온다.
이청조에 관하여 여러 글을 썼었지만, 지금까지 조명성과 이청조간의 자녀가 없었다는 이슈를 언급한 적은 없었는데, 뭔가 하나가 빠진 것같았다는 느낌이 있었다. 왜냐하면, 첫째, 이것은 이청조의 시사에 대한 이해를 높이는데 도움이 되는 것이고, 둘째, 이것은 적지 않은 사람들이 흥미를 가지는 문제이기도 하다. 몇몇 블로거들은 이미 격렬하게 토론을 벌인 바 있다. 셋째, 이 문제에 대하여 필자는 일찌감치 생각해둔 바가 있었다. 여기에 필자가 생각하는 단초를 제시해서 여러분의 가르침을 받고자 한다.
두사람은 결혼했다. 자식은 없다. 원인은 분명히 두 가지이다.
1. 자녀를 낳고 싶지 않았다.
2. 자녀를 낳을 수 없었다.
11,12세기의 송나라에서 생활했던 조명성, 이청조 부부가 자녀를 낳지 못한 것은 분명히 위의 1번문제는 아닐 것이다. 그 당시에는 "무후위대(無後爲大, 자녀가 없는 것이 불효중 가장 크다)"라는 관념이 뿌리깊게 박혀 있었고, 그들은 사대부가족이었으므로, 후사를 잇는 것을 매우 중시했었다. 이청조의 시사를 보면 자녀가 없는데 대한 커다란 유감을 밝힌 것들이 있다. 당시에 자녀를 낳지 않겠다고 생각한다는 것은 정말 쉽지 않은 일이었을 것이다. 가족계획이라는 수단은 아직 발견되기도 전이다.
2번원인을 고려하면 또 다시 4가지 경우가 생기게 된다.
(1) 남편이 문제있는 경우
(2) 부인이 문제있는 경우
(3) 남편, 부인에 모두 문제있는 경우
(4) 남편, 부인이 함께 자지 않는 경우
이 중 네번째 경우는 제외해도 될 것같다. 왜냐하면 이청조의 시사나 문장을 보면, 처음 두 사람이 만났을 때의 기쁨과 부끄러움, 그리고 신혼의 달콤함, 헤어져 살 때의 여러가지 생각, 남편이 죽은 후에 그리워하는 정등이 여기저기 표현되어 있다. 이로써 볼 때, 그들 부부의 사랑은 괜찮은 편이었던 것으로 보이고, 두 사람이 각방을 쓰면서 따로 자지는 않았던 것으로 뵌다. 조명성 이청조 부부는 비록 자주 서로 떨어져 살았지만, 그들이 함께 있었던 시간도 많았다. 최소한 조명성의 부친이 사망한 후 10년간은 그들이 결혼한지 얼마되지도 않았고, 이청조와 함께 청주(靑州)의 고향집에서 살았다. 이때 자식을 만들 수 있는 기회는 많았었다. 조명성과 이청조는 모두 글읽는 사람들이고, 똑똑한 사람들이다. 어떻게 자식을 가지는지 모를 리가 없을 것이다. 비록 그들이 잘 몰랐다고 하더라도, 그들이 2,30세가 되도록 자녀를 낳지 못하면, 그들의 가족이나 어른들이 분명 가르쳐 주었을 것이다.
이제는 위의 (1), (2), (3)의 세가지 원인만 남는다.
확률적으로 말하자면, (3)의 원인일 가능성은 매우 적다. 이청조의 시사에서 나타난 상황을 보면 (2)의 원인일 가능성이, (1)의 원인일 가능성보다 적어보인다. 이청조의 사(詞)인 <<성성만(聲聲慢)>>을 보면, "즘적타, 효래풍급(怎敵他, 曉來風急)"가 있는데, 이는 아마도 <<시경. 종풍>>에 나오는 "종풍차폭(終風且暴)"에서 의미를 가져온 것일 것이다. <<시경. 종풍>>은 제나라에서 온 아름다운 위강부인이 장공의 사랑을 받지 못하여 버려지고 자식을 낳을 수 없어서 그 슬픔을 읊은 것이다. 즉, 이청조는 아마도 이 전고를 사용하여, "버림받고" "자식이 없는" 두가지 고통을 표현한 것은 아닐까? 우리는 이렇게 해석할 수도 있다. 이청조가 자식을 낳지 못한 이유를 남편에게 떠넘겼을 수도 있다고.
조명성이 이청조를 멀리한 것도 실제상황이다. 멀리한 이유는 세 가지이다. 첫째는 조명성이 자주 바깥을 돌아다니면서 골동품을 구하고, 산과 물로 놀러다니기를 좋아했다. 둘째는 조명성이 다른 동네에 지방관리로 나갔는데, 항상 처자를 데리고 다닐 수 없었다. 셋째는 조명성에게 새로 좋아하는 여자가 생겼다. 첫째, 둘째 원인은 더 얘기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세번째 원인도 분명히 존재했을 것이다. 이청조의 사에는 여러군데서 이른 소식을 전하고 있다. <<다려(영백국)>>[多麗, 詠白菊)]의 "사수응, 한고해패, 사루쇄, 환선제시(似愁凝, 漢皋解佩, 似淚灑, 紈扇題詩)"라는 문구는 정교보(鄭交甫), 반소(班昭)의 전고를 사용하고 있다. <<한시외전(韓詩外傳)>>의 기록에 의하면, 정교보는 한나라 고대하에서 두 명의 여자를 만나는데, 한번 만남에 정을 느껴서 두 여자는 자기가 차고 있던 구슬을 정교보에게 건네준다. 이것은 한 남자와 두여자의 바람피우는 이야기이다. 반소의 고사도 한성제가 유명한 미인인 조비연에게 사랑을 옮겨간 이야기이다. 이로써 조명성에게 새여자가 생긴이후 자신은 버림받은 것을 표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봉황대상억휘소(鳳凰臺上憶吹簫)>>에서도 "무릉인원(武陵人遠, 무릉사람은 멀리 있고)"이라는 문구가 있는데, 여기의 무릉사람은 분명 조명성이다. 이 무릉사람은 도연명의 <<도화원기>>에 나오는 무릉인이 도화원에 들어간 이야기와 <<유명록>>에서 기록하고 있는 유신. 완조가 천태산에 들어가서 두 선녀를 만난 전고를 나타내므로, 역시 조명성에게 다른 여자가 생겼다는 것을 암시한다. 조명성이 죽은 후, 이청조는 <<금실록후서>>에서 남편이 죽을 때의 절필시인 "사무분향매리지의(死無分香賣履之意)"에서도 조조가 죽은 후 유언에서 죽은 후 유산분배하도록 하는 전고에서 따온 것이다. 조조는 남은 향은 각 부인들에게 나눠주라고 하였고, 집에서 할 일없는 사람들은 짚신을 삼고, 신을 팔아서 살아가라고 했다. 이로써 볼 때, 조명성에게는 다른 부인도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조명성에게 여러 부인이 있었지만, 여전히 자손이 없다. 이것은 조명성에게 문제가 있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외에 말나온 김에 한 가지를 더 언급하고자 한다. 조명성이 다른 여자가 생겨서 이청조를 버린 것인가?
필자의 생각으로는, 조명성이 이청조를 차갑게 대하고 멀리한 것은 그럴 수 있다. 그러나, 이청조를 버리지는 않았다. 그들은 나중에 "동지(同志)"가 된다. 이것은 필자가 일부러 새로운 용어를 만들어내려는 것이 아니다. 조명성은 생전에 친구인 홍매(洪邁)에게 이렇게 말한 바 있다. "동무의 조명성은 처 이안거사와 평생을 동지로 지냈다" 이청조 자신도 <<금실록후서>>에서, 상세히 그들이 함께 금석을 연구하고, 골동품을 감상하며, 고서를 찾아보던 상황을 묘사하고 있다.
아마도 사람들이 이청조가 다정하고 연약한 여자이고, 보는 사람마다 좋아하는 스타일의 여자라고 오해하고 있을지 모르겠다. 사실, 상황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소녀시절에 이청조는 화장을 해본 적이 있다. 머리에 매화꽃을 꽂아본 적도 있다. 그러나, 18살에 조명성과 결혼한 후에 금방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이 청주에서 생활했던 10년을 이렇게 묘사한 적이 있다. 당시 이청조는 겨우 20에서 30살정도의 나이였을 것이다. "나는 성격에 참을성이 없어서...먼저 명주 비취같은 악세사리가 없고, 방안에 도금 자수와 같은 도구도 없다" 이로써 볼 때, 생활에서의 이청조는 <<홍루몽>>의 설보채와 어느 정도 비슷한 점이 있다. 그녀는 또한 이렇게 말한 바도 있다. 자신은 남편과 하루종일 고서를 보고, 탁자, 좌석에는 모두 책들이었다고. 이런 부부는 어떻게 보면 연구소에서 일하는 동료와 같았을 것이다.
아마도 결혼한지 얼마되지 않아, 조명성, 이청조부부는 실제로 사랑은 있으나 섹스는 없는 관계로 바뀌지 않았을까? 이청조의 사에는 두 곳에서 남성을 자신에 비유한 바 있다. <<다려(여백국)>>에서 굴원, 도연명에 비유했고, <<만정방(잔매)>>에서는 하손(何遜)에 비유했다. 여러번 조명성과 헤어진 것을 쓸 때도 이청조는 모두 <<양관삼첩>>이라는 남성간에 송별하는 전고를 사용했지, 도화도(桃花渡, 왕헌지가 애인을 송별한 곳)와 같은 류의 전고를 사용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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