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효종 조신(趙昚, 1163-1189년 재위)은 남송(南宋)의 두번째 황제이다. 그는 원래 송고종(宋高宗) 조구(趙構)의 아들이 아니었고, 송나라의 개국황제인 송태조(宋太祖) 조광윤(趙匡胤)의 후손으로 조광윤의 둘째아들인 조덕방(趙德芳)의 6대손이며, 어릴 때 이름은 백종(伯琮)이었고 자는 원영(元永)이다. 북송의 황제들과 남송의 첫황제인 송고종은 모두 조광윤의 동생인 송태종(宋太宗) 조광의(趙匡義)의 후손들이었다. 그가 황제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송고종 자신의 문제외에도 송효종 조신이 10명의 미녀문제를 잘 처리하였기 때문이다.
남송 건염2년(1129년) 년말에, 금나라의 좌부원수인 종유(宗維)가 서주를 함락시킨 후 군대를 몰아 남하했다. 회양(淮陽)을 지키던 한세충(韓世忠)의 군대는 바로 궤멸하였고, 염성(鹽城)으로 패주했다. 금나라병사들은 바로 추격하여 양주(揚州)부근까지 천장군(天長軍)과 마주하기에 이르렀다. 일생동안 잘 도망다니던 송고종도 이때는 아주 낭패를 맞았다. 2월초삼일의 새벽, 송고종은 이날도 후궁을 품에 안고 잠들어 있었는데, 당직서던 내시 강리(康履)가 잠자고 있던 그를 깨우고는 긴급보고를 했다. 전방에 파견나갔던 내시로부터 받은 소식인데, 천장이 이미 함락되고 금나라병사는 양주로 밀려오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 긴급소식에 조구는 깜짝 놀라서, 잠이 다 깨기도 전에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황급히 갑옷을 걸치고 전마(戰馬)에 올라타고 밖으로 냅다 도망쳤다. 그를 따르는 자는 겨우 어영도통제 왕연과 내시 강리등 5,6명에 불과했다. 당시 너무나 황급히 도망치고 놀란 바람에 조구는 이후 생육능력을 상실했다. 그의 유일한 아들인 원의태자(元懿太子)는 묘유(苗劉)의 변때 죽어버렸고, 게다다 송태종 조광의의 후손은 정강의 변(靖康之變)이후에 기본적으로 금나라에 의하여 모조리 일망타진되어 모두 금나라에 붙잡혀 갔다.
가장 주요한 것은 당시 금나라에 사신으로 갔다 온 신하들이 금태종의 모습이 송태조 조광윤과 아주 닮았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송태조가 되돌아와서 동생인 송태종에게 빼앗긴 황제자리를 되찾으려고 한다는 소문도 돌았다. 송고종 조구는 하늘의 뜻이라고 생각했고, 송태조는 대공무사의 정신으로 자신이 아들이 있음에도 동생인 송태종에게 황제위를 넘겨주었는데 송태종의 후손은 번창하지 못했다. 그리하여, 자신이 황제위를 다시 송태조의 후손에게 물려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당시 송태조의 후손은 천명이 넘었다. 송고종은 고르고 골라서 2명의 사내아이를 선발했다. 한명은 뚱뚱했고, 한명은 날씬했다. 조신은 바로 날씬한 사내아이였다. 송고종은 처음에는 조신을 좋아하지 않았고, 오히려 뚱뚱한 아이를 마음에 두었다. 조신은 황제자리와 인연이 없는 것으로 보였다. 그런데, 마침 이 때 고양이 한 마리가 뛰쳐나왔다. 조신은 꼼짝하지 않았는데, 뚱뚱한 아이는 발로 고양이를 걷어차버렸다. 그런데, 그 동작이 그다지 우아하지 못했다. 이 사건으로 송고종은 뚱뚱한 아이에게 좋은 인상을 갖지 못했다. 그리하여, 송고종은 조신을 황궁에 남겨두고, 황궁에서 길렀다.
조신이 송고종의 후계자가 되는 것으로 보였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이는 제1차관문을 통과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그는 황궁내에서 20년을 살았고, 어려서부터 아주 좋은 교육을 받았다. 자란 후에는 공(公)에 봉해졌고, 나중에는 다시 군왕(郡王)에 봉해졌다. 그렇지만 계속하여 태자(太子)라는 명분은 얻지 못했다. 그 이유는 다음의 세가지이다.
첫째, 송고종은 여전히 환상을 갖고 있었다. 자신이 다시 자식을 낳을 수도 있다고. 그는 용하다는 의원과 영약을 먹었을 뿐아니라, 하늘에 자식을 달라고 제사를 지내기까지 하였다.
둘째, 재상이던 진회(秦檜)가 격렬히 반대했다. 주로 조신은 진회의 금나라에 대한 굴욕적인 화의에 대하여 불만을 가지고 있었고, 진회도 조신의 능력이 뛰어나다고 보고 꺼려했다. 이처럼 둘은 서로를 꺼려했었으므로 갈등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조신의 생부는 병사했는데, 진회는 상소를 올려 조신이 3년상을 치러야 한다고 했다. 조신은 아직 황태자의 지위를 얻지 못했으므로 이러한 요구가 지나친 것은 아니었다. 진회는 그러나 이 기회를 이용하여 조신의 후계자로서의 지위를 박탈할 생각을 한 것이다. 그렇지만 진회의 뜻대로 되지는 않았다. 3년상이 끝나자 송고종은 다시 조신을 황궁으로 불러들였다. 나중에 진회의 병이 깊어지자 조신은 바로 이 소식을 들었고, 고종에게 통지하여, 고종으로 하여금 친히 진회의 병문안을 가게 했다. 이리 함으로써 진회와 그의 일당이 진회의 아들을 후임재상으로 올리려는 계획을 분쇄시켰다.
셋째, 송고종의 생모인 위태후(韋太后)가 조신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녀가 좋아한 것은 역시 황궁내에서 양육하고 있던 조거(趙璩)이었다. 송고종도 자연히 둘 사이에서 마음을 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위태후가 죽은 다음에야 그는 생각을 깊이 한 끝에 마지막 방법을 생각해냈다. 그리고는 조신과 조거에게 한 사람당 10명씩의 미녀를 보냈고, 모두 처녀였다. 이 방법은 만만치 않았다. 조신과 조거는 모두 한창 니이였고, 스스로를 통제하기 쉽지 않았을 것이다. 어느 정도 시간이 경과한 후, 송고종은 스무 명의 미녀를 다시 불러서 검사를 했다. 그랬더니 조거에게 보낸 10명의미녀는 이미 모두 쳐녀가 아니었는데, 조신에게 보냈던 10명의 미녀는 모두 여전히 처녀였다(조신은 스승인 사호(史浩)의 의견을 듣고 미녀들에게 손을 대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하여 송고종은 최종적으로 조신을 황태자로 삼게 된다.
송효종 조신은 남송에서 가장 업적이 뛰어난 황제라고 할 수 있다. 그가 황태자에 오른지 2년이 지난 후에 금나라의 해릉왕이 남침했다. 노익장의 송고종 조구는 다시 도망칠 궁리를 하고 있었다. 조신은 상소를 올려 자신이 직접 군대를 이끌고 나가서 막겠다고 한다. 사전에 이를 몰랐던 스승 사호도 나중에 이 소식을 듣고 깜짝 놀랐다. 혹시 송고종의 역린을 건드릴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로 황태자에게 상소를 올려 죄를 용서해달라는 글을 쓰게 했고, 황제와 함께 출정하겠다고 말하게 했다. 금나라병사들이 물러간 후, 송고종은 스스로 조신에게 양위할 것을 결정하고 자신은 태상황으로 물러났다.
36세된 조신이 즉위한 후, 그는 여러 가지 일들을 했다. 악비의 명예를 회복시키고, 진회시기에 일어났던 많은 억울한 사건들을 바로잡았다. 그리고 주전파를 중용하여, 다시 장준(張浚)을 재상에 앉혔다. 이리하여 예전 송태조때의 상무(尙武)의 기풍이 어느 정도 되살아나게 되었다.
조신은 사신을 파견하여 외교노력을 통해 하남의 땅도 되찾고 불평등한 지위를 변경하려는 시도가 실패한 후, 주화파와의 격렬한 투쟁을 거쳐 북벌을 결정한다. 장준은 양주를 지켰다. 20여년전에 장준은 금나라에 대한 작전을 총지휘하였으며, 당시 그의 수하에는 악비, 한세종, 유기와 같은 명장들이 있었다. 그러나, 20년이 지난 후, 당시 한창때였던 장준은 이미 늙었고, 수하의 장수는 겨우 이현충과 추굉연이 있을 뿐이었다. 송나라군대는 처음에는 승리를 거두었고, 영벽과 숙주를 되찾았다. 그러나, 금나라는 재빨리 하남에 병력을 집중한 후 반격을 시작했다. 이현충과 추굉연의 내부갈등으로 숙주를 빼앗기며, 송나라군대는 다시 부리(符離)에서 궤멸당한다. 이로써 북벌은 실패했다. 주화파는 전쟁이 실패하는 것을 보고는 다시 화의를 주장했고, 주화파들이 우세를 점하기 시작했다. 주전파는 타협하지 않았고, 계속 전쟁할 것을 주장했다. 송효종은 금나라와의 화의조건을 시험했는데, 너무 가혹한 조건이어서 거부했다. 그러나 이 때, 남송은 북벌 실패후 이미 더 이상 싸울 여력이 없었다. 금나라는 다시 기회를 잡아 송으로 진격했다. 남송은 누란의 위기에 처했다. 결국 금나라가 약간 양보한 화의조건을 받아들이는데, 송나라가 수복했던, 당, 등, 해, 사의 네개 주를 금나라에 돌려주는 것이다. 송나라와 금나라의 관계를 군신관계가 아니라 숙질(叔侄)관계로 , 송이 금에 바치는 세공(歲貢)을 세폐(歲幣)로 하였으며, 수량도 예전보다 20만을 깍았다. 그리고, 진, 상의 두 개주를 금나라에 할양했다.
이 때의 남송은 내부문제가 아주 많았고, 기풍이 옛날 같지 않았다. 관료의 급여와 군비가 국가재정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너무 컸다. 그리하여 정부는 다시 세금을 올렸고, 이는 농민반란으로 이어진다. 송효종의 북벌을 지지해주던 노신들이 하나 둘 세상을 떠나면서 그의 뜻에 따라 보필할 신하가 없어졌다. 그리고, 그의 생모, 황후, 태자도 차례로 세상을 떠나니, 가정생활도 행복하지 않았다.
송효종은 어쩔 수 없이 금나라에 굴복했지만, 항상 회복하고자 생각했다. 장준과 진강백이 죽은 후에, 송효종의 뜻에 맞는 재상을 구하질 못했다. 나중에 진준경과 우윤문을 기용했다. 이 둘은 모두 주전파이지만 둘의 사이는 좋지 않았다. 그리하여 진준경이 나중에는 사직했다. 효종은 자기가 즉위하기 전에 가까웠던 용대연과 증적을 기용하려 하지만, 대신들의 반대에 부닥친다. 그리고 이 둘은 소인배로 황제의 뜻에 따라 아부를 잘 할 뿐 인품이 좋지 않았다. 결국 효종도 어쩔 수 없이 이 둘을 내치게 된다.
송효종은 고토회복을 위하여 먼저 내정에서부터 손을 대고, 민심을 안정시키며, 이전의 재난구제방식을 바꾼다. 그리고, 염상들에게 진 국가의 빚을 갚아버리고, 소금전매를 확대한다. 효종은 또한 각종 부가세를 줄여주고, 쓸데없는 관직을 폐지한다. 예전처럼 관리의 아들이면 과거등을 거치지 않고도 관리가 되던 폐해를 없앴다. 관리들에 대하여 계속 심사하여 자격미달인 경우에는 관직을 박탈했다. 건도연간에는 전쟁도 없고, 송효종이 심혈을 기울여 내정을 보살핌에 따라 백성들은 부유하고, 오곡이 풍성하여 태평성세를 이루었다. 이리하여 남송에는 "건순지치(乾淳之治, 건도 순희연간의 정치)"라는 태평성세국면이 형성되었다.
군사적으로 군대를 정비했다. 송효종은 5년간 세번의 대규모 열병행사를 벌였고, 적극적으로 장군을 뽑았다. 그리고 스스로도 말을 타고 활을 쏘았다. 남송의 군대전력이 많이 제고되었다. 그리고 사신 범성대와 조웅을 금나라로 보내어 첫째는 하남을 돌려달라고 요구하고, 둘째는 송나라황제가 금나라의 사신으로부터 국서를 받을 때, 친히 대전을 내려가서 받던 예의를 변경해달라고 요청한다. 이 두가지는 모두 금세종에 의하여 거절당한다.
송효종은 평화적으로 목적을 달성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무력으로 해결하는 방법을 찾게 된다. 그리하여 군사를 정비하고 전쟁을 대비한다. 그는 우윤문으로 하여금 군대를 이끌고 사천, 섬서를 주로 공격하게 하고, 자신은 친히 군대를 이끌고 회남을 출발하였다. 이렇게 병사를 둘로 나누어 금나라를 정벌하러 나섰다. 그가 우윤문으로부터의 소식을 기다리고 있는데, 우윤문이 사천에서 병사하였다는 소식을 듣게 되고 북벌은 다시 한번 물거품이 된다.
우윤문의 죽음은 송효종에게 큰 타격을 주었다. 이후 그는 다시 북벌을 꺼내지 않는다. 정치에서도 안정을 추구하고, 점차 보수적으로 되어 간다. 금나라와의 예절문제에 대하여도 더 이상 다투지 않게 된다. 그리고 모든 정력을 내정에 쏟는다. 태상황인 송고종의 병사후에 송효종도 정치에 염증을 느끼게 되어, 2년후 황제위를 송광종(宋光宗)에게 양위한다. 5년간 태상황으로 지낸 후, 효종은 병사한다.
효종은 사람됨이 검약하며 부지런했다. 효종시기는 남송의 국력이 가장 강한 때였다. 아쉽게도 이때는 적국인 금나라에도 작은 요순(小堯舜)이라고 불리던 금세종이라는 뛰어난 황제가 있었다. 금과 남송은 이때 서로 균형을 이루고 있었으며, 어느 일방이 상대방을 무너뜨릴 수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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