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이 만주(동북)지방에 주둔시킨 관동군내에는 조선, 몽고, 백러시아에서 온 3개의 외국인부대가 소속되어 있었다.
관동군은 일본의 대외확장의 최선봉이었다. 일본육군내에서 관동군의 전투력은 가장 강하였고, 장비도 가장 좋아서, "황군지화(皇軍之花, 황군의 꽃)"으로 불리웠다. 가장 강대했을 때는 병력이 70여만에 달하였다. 사람들에게 많이 알려지지 않은 것은 중국, 몽고, 소련등의 국가를 침략하기 위하여, 관동군은 적지 않은 외국인 사병을 모았다는 점이다. 이들은 정규군에 소속되는 외에, 전복활동, 정보침투, 항일무장진압, 철로교량파괴등의 임무를 수행하기도 했다.
간도특설대(間島特設隊): 중국조선 양국의 항일활동을 진압하는 특수부대
만주와 한반도를 점령한 후, 관동군은 동북지방에 병력을 집중시키고, 언제든지 남하하여 중국본토를 침입하거나, 북상하여 소련을 침입할 수 있는 상태로 유지했다. 일본은 오랫동안 중국고대의 병법을 연구했으며, 특히 관동군은 "이이제이(以夷制夷)"의 전술에 매우 능했다. 그들은 한편으로는 점령지역 현지인민의 재산을 약탈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현지인민을 군인으로 모집하거나, 각지역의 민족반역자들을 매수하여, 일본의 침략활동의 앞잡이가 되도록 하였다.
1910년부터 일본은 정식으로 조선을 합병했다. 이 때부터 일본인들은 조선인들을 일본군에 가입시켰다. 일본 후생성의 통계에 의하면, 2차대전중, 조선국적의 일본군은 모두 24만여명이었고, 그 중 2만여명이 전사하였다. 조선국적의 일본군은 주로 관동군에 소속되었다. 예를 들어, 초기의 관동군조선혼성여단은 일본군의 명령하에, 중국항일명장 마점산(馬占山)을 공격하는 "강교전투"를 벌였다. 중소국경지역에 주둔한 관동군 강원도대대는 그 사병들이 전부 조선의 강원도에서 모집해서 이런 이름이 붙었다. 태평양전쟁이 폭발한 후에는 이런 조선국적사병들은 관동군주력과 함께 태평양지구로 가서 미국과 전투를 했다.
이외에, 일본은 비밀리에 조선국적사병으로 구성된 특수부대, 간도특설대를 조직했다. 이는 전문적으로 정보, 파괴등 비밀활동에 종사하는 부대이다. 이 부대는 1938년 9월에 약 300명으로 조직되었다. 외국국적사병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기 위하여 관동군은 외국국적부대의 지휘관은 반드시 일본인이 담당하도록 하였다. 이 관례에 따라 간도특설대의 대장도 일본인이다. 그의 아래에 있는 장교는 조선인들이고, 사병은 전부 조선인이다. 간도특설대는 설립된 후, 조선의 반일투쟁을 진압하는 일을 맡았고, 중국만주지방에서의 항일운동을 파괴하는데도 참여했다. 일본이 투항한 후, 이 부대는 해산되었고, 구성원들은 대부분 귀국하였다. 그 중 일부는 한국군대에 가입하여, 6.25전쟁중에 계속하여 북한과 싸웠다.
천야부대(아사노부대, 淺野部隊) : 일본투항전에 일본군에 총살된 러시아 백군
러시아 10월혁명후, 수만의 러시아 백군의 사병이 중국으로 도망쳐 들어왔다. 많은 백군들은 일본인들에 매수되어, 일본인을 위하여 일하였다. 그 중 가장 유명한 것은 사뮤노프부대와 베스코프부대이다.
1918-1919년사이에 사뮤노프는 일본군을 도와서 작전을 수행했고, 신생의 소비에트러시아정권에 간여했다. 실패후에는 다시 부대를 이끌고 중국으로 들어와서 비적이 되었다. 일본의 위협과 유혹하에 사뮤노프는 1천여명의 부대를 이끌고 대련으로 가서 일본에 투항했고, 일본의 소련침략의 주구가 되었다. 이 부대의 비용은 일본인이 부담했고, 사뮤노프는 매달 1천위안가량의 수당을 받았다. 일본인이 제공한 방송설비를 이용하여, 사뮤노프는 소련의 방송을 청취하고, 소련의 정보를 수집했다. 이외에 그는 자기의 영향력을 이용하여 중국에 흩어져 있는 백군의 잔당을 모집했다. 일본특무훈련후에 소련으로 가서 전복활동을 벌였다. 1929년, 사뮤노프부대는 심지어 송경령의 소련방문에 즈음하여 중국의 '국모'를 살해할 계획까지 세운다. 일본관동군의 지시하에 사뮤노프는 만주리를 향하여 직업킬러를 파견하고, 그 곳에서 암살을 시행하도록 한다. 다행히, 장학량등이 미리 그 정보를 들어서, 적시에 사람을 파견하여 킬러를 체포하였고, 송경령은 안전하게 다녀올 수 있었다.
일본관동군이 동북에서 배양한 또 하나의 부대는 더욱 잔악한 백군비적인 베스코프부대이다. 베스코프는 일찌기 사뮤노프의 부하였다. 사뮤노프가 실패한 후, 베스코프는 중국국내의 어얼구나지구 도망쳐 들어온다. 여기서 백군잔당을 끌어모아 하나의 부대를 이룬다. 베스코프는 현지에서 강도를 비롯한 온갖 나쁜 일은 다 벌이고, 어얼구나 참안을 만들어낸다. 9.18사변후, 일본관동군은 베스코프일당을 이용할 가치가 있다고 보고, 그들을 끌어들여 일본군을 위하여 일하게 만든다.
관동군은 "위력적인 모략"은 소련에 이길 수 있는 중요한 수단이라고 보았다. 이들의 "모략"은 철로파괴, 교량파괴, 군사시설파괴등의 간첩활동을 말한다. 1936년부터, 일본인은 백군모략부대를 조직하는데, 모두 3개의 부대를 만든다. 이 부대는 대외적으로 "천야부대"로 통칭되었다. 그 중의 하나는 하이라얼에서 끌어들인 베스코프부대이다. 엄격하게 말하자면, 베스코프부대는 하나의 특무부대이다. 자주 국경을 넘어 폭파, 반락획책, 암살등의 활동을 벌였다. 베스코프부대는 일본군인 소야(小野) 소좌가 지휘하여 명의상으로는 일본군의 소속부대였으나, 실제적으로는 관동군 하얼빈특무기관의 명령을 받았다. 이는 일본군 최초의 비정식 정부부대였다. 1942년, 관동군은 베스코프부대를 정규의 정보부대로 개편하고, 관동군정부부가 직접 지휘하고자 한다. 그러나, 병력이 부족하여, 베스코프부대는 겨우 300명뿐이었기 때문에 나중에 점차 축소편성된다. 1945년 관동군이 패망하기 전에는 인원이 겨우 180명 남았다.
베스코프부대는 관동군을 위하여 죽을 힘을 다해서 도왔다. 그러나 최후에는 일본군의 손에 죽는다. 결국 스스로 자초한 것아고 인과응보라고 볼 수 있다. 1945년 8월 소련의 백만대군이 관동군을 급습했다. 소련군은 파죽지세였고, 관동군은 기세가 꺾였다. 베스코프부대는 폭동을 준비했다. 베스코프는 반란에 대하여 겉으로는 따르는 척하면서, 속으로는 일본당국에 보고했다. 그 후 일본관동군은 매복을 설치하여 베스코프부대를 전부 사살했다. 일본군에 충성했던 베스코프까지 죽여버렸다. 이로써 온갖 일을 벌이던 러시아백군잔당은 철저히 소멸되었다.
기야부대(이소노부대, 磯野部隊) : 몽고에 특수작전을 시행할 계획이었던 몽고철기
마찬가지로 외몽고에 대한 침략을 위하여, 일본인들은 몽고족 기병을 대량으로 모집했다. 그 중에는 "내몽고자치군"도 있었다. 이들은 관동군이 비밀리에 조직한 외몽고모략부대였으며, 이들은 관동군의 몽고침입의 선봉장이 되었다.
이외에 관동군은 다시 1941년 9월 기야부대를 조직했는데, 약 700여명이다. 그들은 모두 몽고족 철기병이었다. 몽고족은 일단 외몽고에 침입하면 이 부대를 이용하여 외몽고에서 특수작전을 시행하고자 하였다. 기야부대는 만주국의 치안지휘부 즉 제868부대에 소속시켰으나, 실제로는 관동군의 직접 지휘를 받았다. 1944년 7월, 기야부대는 일본정규군으로 편성되었고, 명칭은 관동군제2유격대였다.
비록 관동군은 이 몽고철기부대를 매우 중시하였고, 외몽고의 침입시에 활약해줄 것을 기대하였지만, 전세의 진전에 까라, 관동군의 몽고침입, 소련침입계획은 무산되고 말핬고, 일본은 멸망했다. 1945년 소련홍군의 타격하에, 기야부대와 일본관동군은 함께 철저히 소멸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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