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조는 아들이 매우 많았다. 기록에 남아 있는 아들만도 25명에 달한다. 그 중 명성을 얻은 자는 다섯 명이다. 각각 조앙(曹昻), 조비(曹丕), 조식(曹植), 조창(曹彰), 조충(曹沖)이다.
이중, 조앙은 장자이며, 능력도 인정받아 후계자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이 가장 컸으나, 전투중에 사망하고 만다. 그리고, 조조의 총애를 가장 많이 받았던 조충은 어려서부터 신동으로 이름이 났으나, 요절하고 만다. 조충이 죽은 후에, 조비가 부친 조조를 위로하자 조조가 이런 말을 했다는 것이 유명하다. "조충이 죽은 것은 나에게는 슬픔이지만, 너희 자식들에게는 기쁨이겠다."고. 그 뜻은 조충이 살았다면 조충을 후계자로 삼았을 것이라는 것을 말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나머지, 조비, 조식, 조창중에서 조비는 정치적 감각이 뛰어났다. 글재주도 조식보다는 못해도 삼조(三曹, 건안시대에 조조, 조식, 조비의 세 사람의 문장이 가장 뛰어났다고 하여 삼조라 한다)라 불릴 정도였다. 성격은 음험했고 차가웠다. 조식은 문학적인 재능이 뛰어났다. 다만 방탕하고 구속받는 것을 싫어했다. 조창은 무예가 뛰어나고 전공이 탁월했다.
조창은 글읽는 것을 싫어했고, 조조가 장래에 뭘하고 싶으냐고 물었을 때도 본인은 대장군이 되고 싶다고 얘기하였다. 조창은 글재주가 없을 뿐아니라, 정치적인 감각도 없었다. 이 때문에 후계자의 대상에서 빠진 것으로 보인다.
결국 남은 것은 조비와 조식이었다. 두 사람은 모두 조조의 정실부인으로 승격된 변부인의 자식들이었다. 조비의 스승은 사마의(司馬懿)였고, 조식의 스승은 양수(楊修)였다. 두사람간의 암투는 다음과 같은 과정을 거쳐 조비가 승리하고 조식이 패배하는 것으로 끝이 난다.
첫째, 죽루사건(竹蔞事件)
조비의 군사(軍師)는 오질(吳質)이었다. 조비는 후계자싸움에서의 전략을 오질에 의지했다. 오질은 당시 조가령(朝歌令)을 맡고 있어, 함부로 수도인 업성에 들어올 수 없었다. 그래서 조비는 죽루(대나무 바구니)를 사용하여 오질을 업성안으로 모셔와서 계책을 논의하곤 했었다. 그런데, 이 사실을 조식의 스승인 양수에게 들키고 말았다. 그리고 양수는 그 사실을 조조에게 보고했으며, 조조는 대노했다. 조비는 무서워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는데, 심계가 깊은 오질은 그날 저녁에 조용히 성문을 빠져나가고, 다음날 죽루를 실은 마차를 조비의 집으로 들여보냈다. 조조가 파견한 병사들이 마차를 조사하고 죽루를 조사하였는데, 오질은 보이지 않았다. 의심이 많은 조조는 양수가 허위보고를 한 것으로 생각하고, 양수와 조식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둘째, 업성문사건(업城門事件)
조조는 양수가 조식과 관계가 밀접한 것으로 의심하고 한가지 시험을 해본다. 그리하여, 조조는 어느 날 양수에게 그가 조조와 조식에서 업성을 한번 나갔다 오라고 지시한 후 몰래 성문령에 지시하여 아무도 내보내지 말라고 한 후에, 두 사람에게 결단력이 있는지를 보겠다고 말한다. 양수는 계략에 말려들었고, 이 사실을 그대로 조식에게 알려주고, 시험의 목적이 무엇이고, 어떻게 해야하는지를 알려주었다. 과연 두 사람을 업성바깥으로 내보냈는데, 조비는 성문령이 바깥으로 나가지 못한다고 말하자 그냥 돌아왔고, 조식은 그자리에서 성문령을 죽이고 성밖으로 나갔다가 들어온다. 이로써 양수는 조조의 신임을 완전히 잃었고, 나중에 빈 반합을 보내자, 스스로 자살한다.
셋째, 송부출정(送父出征)사건
건안 23년, 조조는 병사를 이끌고 출정을 떠난다. 조비, 조식형제는 부친을 떠나보내는 연회에서 우선 조식은 멋진 문장으로 부친의 덕을 칭송하는 글을 읽어 부친을 기쁘게 한다. 조비는 조식처럼 좋은 글을 쓸 자신은 없어 기가 죽어 있는데, 오질은 그에게 '슬프게 울라'고 알려준다. 조비는 연회석상에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부친을 보내면서 만면에 눈물을 흘리면서, 말을 제대로 잇지 못하는 장면을 연출한다. 조조는 이런 조비의 모습에 감동하여 같이 눈물을 흘리면서 출정을 떠난다.
위의 세건이 조식이 조비에게 패한 간접적인 원인이라면 건안 24년에 벌어진 두 건의 사건은 더욱 결정타가 된다.
넷째, 취주오사(醉酒誤事)사건
조인이 관우에게 포위되어 위기에 처해있을 때, 조조는 조식에게 병사를 이끌고 가서 구해주라고 명을 내린다. 그런데, 군령장을 가지고 조식의 집에 갔을 때, 조식은 술에 대취하여 도저히 출정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에 조조는 분노하고 실망한다.
다섯째, "사마문(司馬門)"사건
이것은 조식이 대담하게 조조의 명을 어기고 스스로 사마문을 열고 성을 나간 사건이다. 이런 눈앞에 보이는 것이 없는 조식의 계속된 행위는 조조로 하여금 후계자를 정함에 있어서 조비 쪽으로 기울게 한 원인들이 된다.
220년 조조가 죽고 조비가 물려받고, 조비는 다시 황제가 된다. 이 때부터 조식은 제왕지몽을 완전히 접고, 옷도 제대로 못걸치고, 밥도 제대로 못먹는 유리걸식의 생활을 시작한다. 232년에 조식은 우울함과 고독함 속에서 죽어간다. 나이 41세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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