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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등소평)

등소평에 대한 7번의 암살시도사건

by 중은우시 2006. 9. 19.

국가주석 호금도는 2개의 비밀기록자료를 비밀해제하였다. 그 중의 하나는 '기밀'로 분류된 자료로서 1949년부터 1977년까지의 국민경제, 재정상황통계숫자와 그 감사후의 기록자료이다. 비밀해제후 성, 지급의 당정부문, 경제, 학술, 과학연구부서에 개방하였다. 다른 하나는 '절대기밀'로 분류된 자료로서 기사망한 국가지도자가 건국후에 맞은 폭력공격, 암살 ,상해사건의 기록자료이다. 비밀해제후, 성급의 당,정군, 정법, 공안, 안전 및 관련기관에 개방되었다. 이 기밀해제문건은 건국후에 이미 사망항 당, 정, 군의 국가지도자에 대한 암살시도사건에 관한 기록이 있는데, 그 중에는 등소평에 대한 7번의 암살시도에 대한 자료가 있었다.

 

첫째, 1969년 등소평거소에 대한 총기난사사건

 

1969년 10월 21일, 등소평은 중공중앙의 제1호명령을 받아 강서성 신건현 망성강의 버려진 한 보병학교에 연금되어 있었다. 3일재 되던날(즉, 10월 23일 새벽), 여러명의 무장 '민병'이 보병학교에 난입하여, 등소평의 거소에 대하여 총기를 난사하였다. 그러나, 목표를 잘못잡아서, 난사를 당한 것은 등소평을 감시하던 경비들이 머무는 곳이었다. 경비들은 즉각 반격하였고, 여러명의 무장민병은 총을 맞고 사망하였다. 9.31.의 임표사건후에, 내부에서는 이것은 임표가 강서성 군구에 지시하여 이루어진 것으로 결론냈다. 그러나, 80년대초에 임표집단을 조사할 때, 임표가 기획하거나 지시한 것이 아님이 입증되었다.

 

둘째, 1973년 등소평의 전용기가 공중해체됨

 

1973년 2월 20일, 중공중앙 판공청은 소련제 일14 비행기를 강서로 보내어 등소평을 북경으로 되돌아오게 하여 업무를 맞기려고 하였다. 그러나, 강서성군구는 다시 긴급통지를 받는데, 등소평을 기차에 태워서 북경으로 보내라는 것이었다. 군구의 참모장이 직접 경비를 이끌고 기차 한칸을 붙여서 북경으로 보냈다. 결과적으로 일14기는 북경으로 돌아가던중 안휘상공에서 공중해체되었다.

 

셋째, 1975년 산보중 총격을 받음.

 

1975년 9월의 어느 날, 등소평, XX, 강청등의 일행이 산서성의 어느 지역을 갔고 경비와 함께 언덕에서 산보를 하는데, 어디선가 총알이 날아왔다. 경비는 총을 쏜 방향을 향하여 바로 반격하였고, 총을 쏜 자는 도망쳤다. 이로서 수수께끼로 남는다.

 

넷째, 1976년, 등소평이 연금된 초대소에 돌연 화재가 발생함.

 

1976년 4월의 어느날, 등소평은 4. 5 조치후에 당내외의 모든 직무를 박탈당한다. 그리고 북경군구의 옥천산초대소 5호루의 1층에 연금된다. 저녁에 등소평이 연금된 1층에 갑자기 전원합선이 일어나 불이나고, 1층의 101호방에서 10호방까지 전부 불에 탑린다. 그날 저녁, 등소평은 학습이 예정되어 있었고, 그 후에 경비와 함께 목욕탕에 가서 목욕을 하는 바람에 화를 면하였다. 나중에 북경성내의 주택으로 옮겨진다. 내부 기록에서는 이것이 섭검영이 보낸 경비가 등소평의 안전을 보호한 것이고, 암살의 위험을 피하게 하였다고 적고 있다.

 

다섯째, 1976년 등소평이 탄 차의 차축이 부러짐

 

1976년 7월의 어느 날, 등소평은 통지를 받고, 하북성 승덕의 피서산장으로 갔다. 등소평은 건강을 이유로, 병원에서 조사를 한다고 하고 가지 않았다. 등소평을 승덕으로 보래려고 보냈던 작은 일제 차량은 나중에 국방부로 보내어져 사용하였는데, 검사를 한 결과 전륜축이 이미 부러져 있었고, 공로를 달렸다면 언제든지 차가 뒤집히고 불이 날 수 있었다. 왕동흥은 계속 이것은 그가 세운 공이라고 자랑하였다. 그는 당시 등소평에게 통지했다.

 

여섯째, 1980년 등소평이 회의좌석상에서 총격을 받음

 

1980년 3월의 어느 날, 등소평이 제남군구에서 부대를 시찰할 때, 군구의 회의에서 보고를 마치고 좌석으로 돌아왔을 때, 회의장의 당번 경비가 한편으로는 "모주석의 혁명노선을 보위하자. 등소평을 타도하자. 강청을 위하여 복수하자"는 구호를 외치면서, 등소평의 좌석을 향하여 연속 몇 발을 발사하였다. 등소평의 신변에 있던 경비가 막아주어 위험을 피하였고, 총을 쏜 자는 나중에 제압당하였다.

 

일곱째, 1988년 등소평이 일곱번째 암살을 모면함

 

1988년 2월의 어느 날 등소평, 진운, 양상군등이 상해의 서교빈관에서 구정을 보내고 있었다. 그런데 4명의 자칭 "모택동주의전투대"라는 총을 든 무장분자들이 서교빈관으로 진입하여 당번 무장경찰과 전투를 벌였다. 3명은 그 자리에서 사망하고, 1명은 체포되었다. 그의 몸에서는 등소평을 암살하는데 사용하기 위한 거주지의 지도, 폭약, 소음총, 발화기재등이 발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