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동방조보(東方早報)
"본색(本色)"이라는 큰 간판이 갑자기 무너졌고, 흩어지지 않는 먼지가 가득하다. 2007년 2월 11일 11시 04분, 본색집단 본사건물의 지붕에 있는 "본색"이라는 표지는 절강성 동양시 경찰에 의하여 철거되었다. "본색" 산하의 모든 가게의 간판도 모두 떼어졌다. 젊고 신비한 여부호가 돌연 동양에 나타난 때로부터 4개월여밖에 되지 않은 때의 일이다.
2월 10일 오후 4시 30분경, 현지 경찰은 거의 몇분내로 본색집단 산하의 거의 모든 가게를 장악하였다. 본색집단 직원의 말에 따르면, 10일 오후 1시경, 본색집단 부동사장인 주홍파(周紅波, 오영의 남편)이 그들에게 통지해서 오후에 공안국에서 와서 '대대적인 검사'를 할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 이후 주홍파는 행적이 묘연해졌다.
2월 10일은 날씨가 흐렸다. 동양의 본색집단 직원들은 월급을 받는 날이었다. 오후 4시30분경, 폭풍우는 아무런 징조도 없이 본색을 습격했다. 현지 경찰을 몇분만에 본색집단 산하의 모든 가게를 장악했다. 한 본색집단의 직원은 이렇게 말했다. "당시 우리는 일하고 있었는데, 돌연 많은 경찰이 몰려왔다. 그들은 제복을 입지 않았고, 사복을 입고 있었다. 그들은 가게를 접수한 후, 직원들에게 하나하나 이름을 등기하도록 하였다. 그후 우리를 내보냈다" 본색의 동양시내의 모든 가게는 경계선이 쳐져 있으며, 관계자외출입금지를 시켜놓았다.
"오영에게 문제가 생겼다" 이것은 경찰이 접수한 후의 직원들이 보인 첫번째 반응이었다. 소식은 금방 동양시내에 번져갔다. 본색을 정리정돈하는 작업은 정식으로 시작되었다. 10일 저녁, 현지정부의 "본색"처리에 대한 회의가 저녁 10시까지 계속되었다. 그날 저녁 10시 30분경, 동양방송국은 <<동양인민정부공고>>를 발표했다.
"정부공고
1. 본색지주집단유한공사 및 법정대표자 오영은 불법공중예금유치죄로 현재 이미 동양시 공안국에 의하여 입건되어 수사중이다.
2. 동양시인민정부는 이미 유관부서로 청산자산조사소위원회를 조직하여, 본색지주집단공사 및 그 관련회사의 자산정리, 재무감사, 채권채무등기등의 업무를 책임지도록 한다.
3. 범죄협의자 오영 및 본색지주집단유한공사의 관련채권자(자연인, 단위, 법인 포함)은 2007년 2월 11일 오후 2시에 신분증명과 관련 채권증빙을 소지하고 채권채무등기지점에서 채권채무등기를 진행한다. 관련 채권채무는 법률법규에 따라 처리될 것이다. 채권채무등기지점의 주소는 전 교통국(건설로188호-2)이다.
4. 여러 인민군중은 반드시 공안기관의 사건수사어무에 협조해주고, 국가법률법규와 관련정책의 규정을 엄격히 준수해주며, 스스로 사회질서를 유지하고 사화안정을 확보하여주기 바란다. 공공질서를 교란시키거나 사회관리를 방해하는 위법범죄행위에 대하여는 사법기관이 법에 의하여 처리할 것이다.
동양시인민정부
2007년 2월 10일"
2월 11일 아침, 본색집단 본사건물의 경계선바깥에는 회사직원과 공사대금을 청구하는 사람들 및 시민들로 둘러싸여 있었다.
2월 11일은 본색집단에 대한 청산자산조사를 시작한 첫번째 날이다. 경찰은 자산에 대하여 질서있게 조사를 진행하였다. "먼저 모든 직원의 급여을 보장하고 다음으로 민공의 소액공사대금을 보장하며 그 뒤는 나도 잘 모르겠다" 현장의 한 경찰의 말이다. 본색집단의 일부경영진도 경찰에 협조하고 있으며, 부문별로 급여를 지급하고 있었다. "부란치세탁소"의 입구에는 의복을 받으러온 시민들이 길게 줄을 서 있었다. 이 세탁소는 현지에서 상당한 정도의 무상서비스로 유명한 곳이었다.
10시43분, "부란치세탁소"의 간판에 걸린 "동양본색점"이라는 다섯 글자가 떼어졌다. 이후 본사 지붕에 있는 본색 LOGO도 경찰에 의하여 철거되었다. 심지어 "직원식당"의 간이간판상의 "본색"이라는 두 글자도 지워버렸다. 다른 점포에도 본색이라는 표지는 모두 사라졌다. 본색의 자회사 브랜드인 '천족당(千足堂)'도 족욕점의 입구에 떼어져 있었다.
12시, 황사가 본색집단의 입구에 쌓였다. 2월 11일 오후, 호텔을 포함한 모든 본색집단의 점포의 출입구는 벽돌로 봉쇄되었고, "돈을 받으러 오는 사람이 너무 많아서, 밤중에 채권자들이 들어와서 물품을 가져갈 지 몰라서 이렇게 한다"는 것이었다.
11일 14시, 동양시 건설로 186호-2에는 본색집단과 관련된 채권등기가 시작되었다. 이곳은 원래 금신신탁의 채권확인장소였다. 대문의 오른쪽에는 다시 '본색집단채권확인소'라는 팻말이 붙었다. 매 방마다 두터운 '본색집단채권인채권신고표"가 있었다. 현지정부의 절차는 먼저 등기를 받고, 다시 조사를 하며, 방안에 따라 각종 돈을 지급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현장에서 채권자의 모습을 찾기는 힘들었다. 오는 사람들은 대부분 현지의 페인트공으로 그들은 페인트칠한 후의 공사대금을 받으러 온 것이었고, 대금도 천위안에 미치지 못했다. 등기하러 오는 사람은 일부 재료공급상도 있었는데, 본색집단은 현지의 가구점에 12만위안을 빚지고 있었는데, 이것은 본색인터넷바의 컴퓨터탁자 500대의 가격이었다. 본색호텔은 2월 4일, 현지의 한 가게에서 샴푸와 물비누등 1만위안의 대금을 지급하지 않은 것도 있다. 이외에 45만위안의 커튼대금도 지급하지 않았다. 이상한 것은 예금을 하였다거나 대출을 해줬다는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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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신문신보(新聞晨報)
절강동양은 처음에 '지진'이 일어났던 것과 마찬가지로 오영은 반년후에 마찬가지로 이 도시 심지어 전국을 뒤흔들며 사라졌다. 이 26세의 동양부저(東陽富姐)는 불법자금모집죄로 경찰에 구속되었다. 그녀의 산하에 있던 본색지주집단유한공사는 문을 닫았다.
오영이 하룻밤만에 갑부로 등장한 것에 대하여 각종 전설이 난무하였는데, 그녀의 손목에 수갑이 차여지는 순간 그 전설을 파괴되었다. 이때서야 사람들은 비로소 깨닫기 시작한 것이다. 사실 수억에 달하는 민간의 유동자금이 바로 '오영신화'의 근원이었다는 것을 그녀는 그저 사람들의 돈에 대한 탐욕을 이용하였을 뿐이고, 신화와 같은 개인의 전설을 조작했을 뿐이라는 것을.
어떤 법조계인사는 오영은 아마도 지하전장(地下錢莊)과 관련이 있을 것이며, 지하전장이 바로 민간의 유동자금을 흡수하는 도구라는 것이다.
한 피해자의 증언에 의하면, 그는 원래 관계를 동원하여 20만위안을 오영에게 주었는데, 스스로 자초한 것이라고 한탄하고 있었다. 유씨성의 이 남자는 이우(義烏)에서 건재도매상을 하고 있는데, 동양사람이다. "작년초에 나는 친구에게서 오영에 대하여 들었다. 당시 그 친구는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오영에게 돈을 빌려주면 이자가 매우 높다 7푼의 이자를 준다. 그리고 그는 이미 오영에게 80만위안을 빌려주었다. 그러면서 나에게 남은 돈이 있으면 오영에게 빌려주라고 권했다"
그는 당시 오영이 이렇게 높은 이자를 주는 것에 대하여 의심을 하였다고 한다. "이건 말도 안되었다. 친구들간에 사업에 필요해서 서로 돈을 비릴는 경우가 있는데, 이것은 매우 정상적인 것이다. 그러나 2푼의 이자를 넘어선 적이 없다. 오영은 한꺼번에 7푼의 이자를 주겠다고 하는데, 이것은 내가 보기에는 불가능했다. 만일 100만위안을 빌려주면, 하루에 이자가 7000위안이라는 것인데, 정상적인 상황하에서 어찌 이렇게 높은 이자를 감당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얼마되지 않아. 동양에서 전해지는 오영에 대한 각종 소식은 그의 최초의 판단을 동요시켰다. "나는 신문에서 오영이 동양에서 사업을 그렇게 크게 한다는 말을 들었다. 2달동안 3억위안을 투자하고, 내 기억으로 어느 부자도 그렇게 손이 클 수는 없었다. 오영은 진짜 재력이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후에 그는 이우의 4명의 다른 사장들도 합쳐서 오영에게 2.4억위안을 빌려줬다는 말을 들었다.
계속 전해지는 "이자가 좋다는 소식"에 충격을 받아, 유사장도 더 이상은 참지 못했다. 그도 급히 수중에 남은 20만위안을 가지고 친구를 통해서 오영에게 빌려주려고 시도했다. 그러나, 오영은 거절했다. "그녀는 이유를 얘기하지는 않았지만, 아마도 돈이 적어서 그랬던 것같다"
거절당한 후, 유사장은 급히 3명의 사업파트너를 연락한 후, 100만위안을 모아서 다시 이전의 친구를 통하여 오영에게 그 돈을 건냈다. 이 번에는 오영이 거절하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보니 모두 내 스스로 자초한 일입니다. 그녀는 내 돈이 필요없다는데, 내가 두번 세번 부탁해서 돈을 보낸 것이니까요. 다행히 돈을 20만위안만 보내어 망정이지, 내 재산 전부를 줬다면, 나는 아마도 지금 빌딩에서 뛰어내려야 할 것이다"
10일오후 자기집에서 100미터도 떨어져 있지 않은 본색집단의 종말을 목격한 후, "동양잡탕면관"의 사장 아근(阿根)도 골치아프게 되었다.
반년전에 본색집단은 아근의 국수집의 서쪽에 멀지 않은 곳에 자리를 잡았다. "마치 풍선처럼 반년의 시간도 지나지 않아서, 내 앞의 이 거래의 수십개의 점포들이 차례로 본색집단에 매수되었고, 명실상부한 '본색일조가'가 되어 버렸다." 비록 눈앞에서 본색집단의 확장과정을 모두 살펴보았지만, 지금까지 아근은 여전히 이해가 되지 않는다. 아근은 자주 오영을 보아왔지만, 그녀는 여전히 수수께끼였다.
당연히 그가 의외로 생각하는 것은 2월 10일의 사건이다. "몇분만 있으면 4시반이 될 때였습니다. 돌연 10여대의 경찰차가 우리 가게앞을 지나갔고, 서쪽의 본색집단 본사건물앞에 섰습니다." 그리고 경찰차에서 대량의 경찰이 내린 후, 본색집단의 큰 출입구앞에는 길다란 경계선이 쳐졌다.
입구에 서 있던 아근을 더욱 놀라게 한 것은 "본색일조가"의 모든 산하기업도 본사와 마찬가지로 짧은 몇 분내에 모두 경찰에 의하여 점거되었고, 불길한 느낌을 아근은 느끼게 되었다. 오래지 않아 소식이 전해졌다. "오영이 범죄로 붙잡혔다. 본색집단은 끝장났다."
이 소식에 아근은 마음이 착잡했다. 반년전에 아근의 국수집이 본색집단과 이웃이 된 이후로, 본색집단의 5,6명의 경비들은 계속 아근의 국수집에서 식사했다. 그렇게 큰 회사이므로 아근도 안심했고, 그들이 편하게 먹을 수 있도록 아근은 외상거래를 허용했으며, 매월 10일에 한번씩 식사비를 정산했다. 왜냐하면 그 날이 본색집단의 급여를 지급하는 날이기 때문이다.
10일에 경찰이 본색집단을 봉쇄하자, 아근은 이 수백위안의 밥값을 받을 수 있을지를 걱정했다 .과연, 이 몇명의 경비가 아근에게 얘기한 것은 "우리가 급여를 받으면 그 때 보자. 우리는 현재 그렇게 많은 돈이 없다" 경비의 대답에 아근은 난감해 졌다.
아근보다 더 조급한 것은 밥값을 빚진 경비 왕해파(王海波)이다. 본색집단이 성립되는 날로부터 그는 본색집단에서 일해왔다. "동양의 다른 회사의 경비는 한달에 많아야 900위안을 받는데, 여기서는 한 달이면 2000위안을 받았다" 왕해파는 원래 황금밥그릇을 얻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반년만에 돌연 실업하게 된 것이다. 그렇지만 그는 오영을 원망하지는 않는다. "오총경리는 평상시에 우리에게 잘 대해줬다. 매번 우리를 볼 때마다 매우 겸손하게 대했다"
12일오후, 동양시 노동감찰대대의 주재하에 천명에 가까운 본색집단의 직원들이 통계를 작성하고, 통계가 끝난 후 그들에게 급여를 지급했다. 그러나, 왕해파는 이 결과에 만족스러워하지 않았다. "우리가 받은 것은 기본급여만 받았다. 이번달 상여금은 어떡하느냐."
동양시의 신문판공실에 의하면, 오영사건이 발발한 후, 정부에서 등기를 받은 바에 의하면 700여명의 본색집단 직원이 등기를 하였고, 이 직원들에게는 급여가 모두 지급되었다고 한다.
오영이 도대체 돈을 가지고 있기는 한 것인가? 진정한 답은 아마도 그녀 자신만 알 것이다. 공개된 정보에 의하면, 2006년 8월 10일부터 10월 12일까지, 오영은 동양시 공상국에 15개의 회사 및 분회사(지점)의 설립등기, 신고를 마쳤고, 본색상무유한공사, 본색차업유한공사, 본색광고전매유한공사, 본색망락유한공사, 본색개념주점등 12개의 실업회사를 만들고, 오영은 다시 절강본색지주집단을 만들어 스스로 동사장에 올랐다. 총투자액은 거의 3억위안에 이른다. 그중 가장 불가사의한 것은 '본색일조가'에 만든 500여대의 컴퓨터를 두고, 60여명의 웹사이트관리자를 초빙하고, 30여명의 수금원을 둔 "빅버거" 인터넷바이다.
"우리는 이것이 바로 옛날에 마작할 돈도 마련하지 못하던 오영인지 믿을 수가 없었다" 오영과 같은 나이의 고등학교 동창인 한 명은 이렇게 말했다. 오영은 외부에 알려진 것처럼 26살이 아니라, 자신과 같은 나이인 28세라고 그녀는 정정했다.
그녀의 기억에 오영의 성격은 외향적이었고, 학교에서도 비교적 활발하게 활동하는 학생이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그녀는 오영과 연락이 끊겼다. "대체로 5년전에 동양의 거리에서 그녀를 한번 마주친 적이 있었는데, 얘기하면서 오영은 돈벌기가 정말 쉽지 않고, 마작할 돈도 마련하기 어렵다는 얘기를 했었다"
오영의 직계가족중 한 명은 오영이 확실히 돈은 많다고 말했다. 그러나, 외부에 알려진 것처럼 그 정도는 아니라는 것이다. "그녀의 손에 있는 대부분의 돈은 유동되는 것이고, 많은 것은 차입한 것이다. 그래서 그녀가 도대체 얼마나 돈을 가지고 있는지는 말하기 어렵다"
오영의 재산이 얼마인 것과 마찬가지로, 그녀가 사람들에게서 얼마의 돈을 끌어모았는지도 지금까지 하나의 수수께끼이다. 2월 10일 동양시정부가 공포한 정부공고에서는 본색집단이 불법자금모집을 했다고 적었는데, 얼마나 자금을 모집하였는지, 어떤 사람들이 오영에게 자금을 빌려주었는지는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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