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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경제/중국의 부호

남경갑부 우신임(于新任)의 유언장

by 중은우시 2006. 12. 19.

2005년 4월, 남경시에 수천만위안의 자산을 가진 갑부 우신임이 간암으로 입원했고, 이미 불치의 상태였다. 목숨이 경각에 달렸을 때, 그는 유언장을 만들었는데, 자기의 재산을 전부 큰 동생에게 주고, 작은 동생에게는 50만위안의 '차용증'을 남겼다. 더 심한 것은 유언장에서 자기의 유골을 그의 애인이 보관하도록 한 것이다. 즉, 우신임의 합법적인 처인 무매영(武梅榮)에게는 한푼도 남기지 않았을 뿐아니라, 남편의 유골조차 그녀에게 남기지 않았던 것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우신임은 세상을 떠났고, 두 동생은 바로 형수인 무매영에게 소송을 제기했다.

 

이 소식을 듣고, 무매영은 통곡을 했다. 그녀는 장부가 왜 그녀에게 이렇게 매정하게 하는지 알고 있었다. 여러해전 그녀는 바람을 피운 적이 있었고, 바로 이일로 남편은 10년간 그녀를 정신적으로 학대하고, 죽으면서까지 그녀를 용서하지 않은 것이다.

 

1985년 7월, 25세인 우신임은 대학졸업후 강소성의 대외무역회사에 통계간부로 취직했다. 2년후 현지의 유치원교사인 무매영과 결혼했다. 결혼후 1년이 지나서, 그들은 귀여운 아들을 얻었다. 우신임은 처를 매우 사랑했고, 처에게 "너가 행복하게 지낼 수 있다면, 나는 무슨 힘든 일이라도 마다하지 않겠다"고 한 바 있다.

 

1989년 1월, 우신임은 회사를 그만두고, 은행대출 5만위안을 받아서 무역회사를 설립했다. 그는 자금을 모은 후에 러시아와의 무역을 시작했고, 자주 러시아와의 국경을 드나들면서, 국내의 일용품을 팔고, 러시아의 가죽물건을 운반해왔으며 수출, 수입에 모두 돈을 벌었다.

 

1994년 11월초의 어느날 오후, 우신임은 변방에서 집으로 돌아왔다. 그는 처에게 먼저 말을 하지 않고 돌아왔는데, 처를 놀라게 해주기 위해서였다. 그가 열쇠로 집안 문을 열었을 때, 침실에서는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침실을 열고 보니 하늘이 무너질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의 아내가 외간 남자를 끌어들인 것이다.

 

우신임은 분노에 문을 밀치고 나가서 술집에서 곤드레만드레 취하였다. 무매영은 그를 찾아내서 그에게 잘못했다고 용서를 빌었다. 그는 우신임에게 그가 오랫동안 집에 없어서 외로웠고, 잠시 잘못생각해서 이런 부끄러운 짓을 저질렀다고 말했다. 그녀는 남편에게 앞으로 다시는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하겠다고 보증했다. 그러나, 우신임은 그녀의 변명을 들으려 하지도 않았고, 용서하려고 하지도 않았다. 그는 자기가 바깥에서 그렇게 고생하며 돈을 벌었는데, 처는 이렇게 자기에게 보답을 하였다는 생각에 자기의 머리를 치면서 괴로워했다.

 

그 때이후 그는 집에 거의 돌아오지 않았다. 그는 이혼도 생각했으나, 집안사람들이 이혼이유를 물으면 뭐라고 대답해야할지 몰랐다. 남자로서 이런 일은 남에게 말할 수도 없었다.

 

우신임이 이혼을 꺼내지 않으니, 마음 속에 미안한 감정을 지니고 있던 무매영도 이혼 얘기를 꺼낼 수 없었다. 두 사람간에는 이렇게 냉전이 계속되었다. 외부사람들의 앞에서는 행복한 부부로 보이도록 애를 썼다.

 

1998년 5월, 우신임은 러시아근방의 한 작은 산의 목재채굴권과 철로에 인접한 목재저장소를 매입했고, 러시아에서 채굴한 목재를 중국으로 반입했다. 3년여동안 힘들게 일하여 그의 개인자산은 1200여만위안에 이르렀다.

 

2002년 9월, 우신임은 목재장사를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는 남경에 190여평방미터의 집을 샀고, 집을 남경으로 옮겼다. 그리고 자기와 무매영의 승용차도 각각 1대씩 샀고, 무매영은 이때부터 전업주부가 되었다.

 

내막을 모르는 친구들은 무매영이 좋은 남편을 만났다고 부러워했다. 그러나, 무매영만은 그녀가 이미 남편의 마음 속에서 '죽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 집은 그녀에게는 빈껍데기였다. 우신임은 그저 상징적으로 매달 3000위안의 생활비를 그녀에게 주었고, 나머지는 전혀 관여하지 않았다. 남편이 돈을 얼마나 버는지, 매일 밖에서 무엇을 하는지, 그녀는 하나도 알지 못했다.

 

무매영은 남편의 자기에 대한 태도를 바꿔보려 여러가지로 노력했다. 매번 쇼핑을 할 때, 그녀는 남편에게 새로운 옷을 사곤 했다. 남편은 한번 쳐다보지도 않고 질책했다: "아무렇게나 사지 마라. 네가 무슨 보는 눈이 있느냐. 사람도 제대로 못보는데 물건이나 제대로 보겠느냐"

 

남편의 생일에 무매영은 생일축하잔치를 계획했고, 친구들을 끌어모았다. 그러나, 우신임은 집에 들어오지 않고 그저 전화를 해서 "친구와 일이 있어 들어갈 수 없다"고만 말했다.

 

무매영은 여러차례 적극적으로 남편과 얘기하고자 하였고, 자기의 잘못을 빌었으나, 그가 이 얘기를 꺼내기만 하면, 우신임은 아주 차갑게 "나는 그 일을 생각하고 싶지도 않다. 너는 그게 자랑스러우냐. 또 얘기하다니."

 

모든 노력이 실패로 끝나자, 무매영은 남편의 마음을 이미 돌릴 수 없다는 것을 알고 "만일 네가 나를 용서할 수 없다면, 우리 그냥 이혼하자"고 하였다. 이 말을 듣자 우신임은 화를 더 냈다. "나도 이혼하자는 말을 안꺼내는데, 네가 무슨 자격으로 그 말을 꺼내느냐. 만일 네가 법원에 이혼소송을 내면, 네 친정에 가서 너의 위대한 장거를 다 까발리고, 모든 사람이 네가 어떤 여자인지 알도록 하겠다"

 

무매영은 어찌할 방법이 없었다. 그녀는 아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매일 집안 일이나 하고, 아들이나 길렀다.

 

우신임과 처의 냉담한 관계를 바깥 사람들은 알지 못했다. 그러나 그의 가족들은 눈치채게 되었다. 부모와 집안사람들이 여러번 캐물은 다음에야 처가 바람을 피운 사실을 가족들에게 얘기하게 되었따. 부모와 동생은 모두 그에게 "현재 이런 일이 적지는 않다. 형수가 나쁜 사람은 아니지 않느냐. 아마도 일시적으로 길을 잘못 든 것같으니 용서해주는 것이 어떻겠는가"라고 하였으나, 우신임은 "나는 바깥에서 죽어라 일하고 있는데, 그녀는 집안에서 나에게 녹색모자를 씌웠다(중국에서는 녹색모자는 부인이 바람난 경우를 얘기함). 이 건 뭣으로도 용서될 수 없다"

 

오래지 않아, 우신임은 남경에 무역회사를 차렸다. 전문적으로 유럽과 미국의 의류주문을 받는 것이었다. 2003년 1월, 영국유학에서 돌아온 24세의 서안 아가씨 왕청청(汪菁菁)이 우신임의 회사에 입사했다. 우신임은 그녀가 영어를 잘하는 점을 고려해서, 그녀를 회사판공실에 근무하게 하고 외국회사와의 가격협상을 맡겼다. 이어서 그녀와 접촉하는 일이 많아지면서 우신임은 왕청청에 대하여 좋은 감정을 가지게 되었다. 그는 그녀가 업무를 아주 착실하게 하는 외에 생활에서의 마음씀씀이도 아주 세심하다는 것을 알았다.

 

한번은, 우신임이 손님접대를 하는데, 말하는 중에 자기의 안압이 높다는 말을 하고, 평상시에 음식을 매운 것이나 자극적인 것은 먹지 않는다고 하였다. 옆에 있던 왕청청은 이 말을 잘 기억해두었고, 나중에 외출하여 식사를 시킬 때면 왕청청은 담백한 음식으로 시켜주었고, 자주 안압을 낮추는 방법을 그에게 알려주었다.

 

사무실에서, 왕청청은 매일 우신임에게 그녀가 레몬, 구기자 ,국화잎을 넣어서 끓인 "청량거화차"를 만들어 주었다. 우신임은 아주 행복하게 그 차를 마셨다. 2003년 4월 26일, 우신임과 왕청청이 함께 북경출장을 갔을 때, 결국은 선을 넘었고, 둘은 연인관계로 발전했다.

 

애인이 생기자, 우신임은 생각이 바뀌었다. 그는 사랑없는 결혼을 끝내고, 애인과 행복한 생활을 보내고자 하였다. 2003년 9월초, 우신임은 적극적으로 무매영과의 협의이혼을 추진했다. 무매영도 더 이상 생각하지 않고 동의하였다. 여러해동안 그녀는 과부생활을 하였고, 살아도 죽은 것만 못한 생활을 보냈었다. 그러나, 우신임은 그녀에게 그저 50만위안만 주겠다고 했고, 무매영은 동의하지 않았다. 그녀는 남편이 최근들어 많은 돈을 벌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남경시의 중심지역에 구매한 세 곳의 부동산만도 400만위안의 가치가 되었다. 더구나 회사에는 대량의 운전자금까지 있었다. 우신임은 그러나 차갑게 말했다: "회사의 돈은 사업을 위한 것이고 너에게 꺼내서 줄 수가 없다. 이 50만위안도 그저 네가 그 동안 아들을 돌봐주었기 때문에 주는 것이다. 만일 계속 동의하지 않으면, 결국 너는 한푼도 받지 못할 것이다"

 

1주일후, 우신임은 "사실상 여러해동안 별거하였고, 부부관계가 유명무실하다"는 것을 이유로 법원에 소송을 제기했고, 처와 이혼할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무매영은 재산분할방안에 불만이 있었으므로, 이혼에 동의하지 않았따. 법원은 심리를 거쳐, 2004년 1월 "부부감정이 아직 완전히 파탄에 이르지 않았다"는 이유로, 이혼을 허용하지 않는 판결을 내렸다.

 

판결서를 받은 후, 우신임은 법정에서 법관에게 말했다. "반년후에 다시 오겠다. 이혼은 이미 결정된 것이다"

 

과연 2004년 7월, 그는 두번째 이혼신청을 법원에 제출했다. 그리고 여러 사람앞에서 이혼결심을 밝혔다.

 

2004년 9월 3일 오후, 사무실에 앉아 있던 우신임은 갑자기 오른쪽 배에서 심한 통증을 느꼈다. 그녀는 온몸에 식은 땀이 나고, 안색이 창백해졌다. 사무실에 있던 왕청청은 급히 긴급전화를 걸어 우신임을 병원에 보냈다. 의사는 검사를 거친 후, 아주 침중하게 우신임에게 말했다: "가족을 보내달라. 우리는 가족들과 얘기하겠다"

 

1시간후, 우신임의 두 동생이 병원으로 왔다. 의사는 그들 둘에게 "너의 형은 말기 간암이다. 만일 즉시 수술하지 않으면, 길어야 3개월을 살 수 있다. 지금은 간이식을 할 수 있으나, 수술에는 위험이 따르고, 비용이 매우 비싸다. 최소한 50만위안이다. 생각해봐라"고 하였다.

 

두 동생은 왕청청과 함께 상의한 후, 우신임에 대하여 간이식수술을 하는 것에 동의하엿따. 우신임의 큰 동생 우신성(于新成)은 따로 우신임의 의견을 물었다. "형수(무매영)을 불러서 같이 상의하도록 할까요?" 그러나 우신임은 냉랭하게 고개를 저었다. "내 일은 그녀와 아무런 관계가 없다. 너희들끼리 상의하면 된다"

 

그러나, 이 일은 큰 일이므로, 우신임의 작은 동생은 그날 형의 상황을 전화로 형수인 무매영에게 알려주었다.

 

남편의 병에 대하여 소식을 들은 무매영은 비록 십여년간 남편과 유명무실한 부부간이었지만, 이미 아이를 낳았고, 이전에 서로 사랑했던 사이였으므로 불치병이 걸렸다는 말을 듣고는 가슴이 아팠다. 무매영은 집에서 탕을 정성껏 달여서 병원에 가지고 가서 우신임에게 주었다. 그러나 우신임은 "지금은 입맛이 없다. 놓고 가라. 그리고 다시는 오지 마라. 집에서 아이나 잘 돌보면 된다. 병원에는 간호사가 있으니 생활에 문제가 없다"고 말했다.

 

무매영은 남편이 그녀를 병원에 오지 못하게 하는 이유가 또다른 여인 왕청청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였다 무매영이 병원에 갈 때마다 거의 모두 왕청청을 만났다. 남편은 그녀가 직원이라고 말했으나, 무매영은 남편과 왕청청의 눈빛에서 그들의 관계를 눈치챌 수 있었다. 그러나, 이 때는 남편의 목숨이 경각에 달해있을 때니, 무매영이 이런 일로 남편과 다툴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무매영은 이후에는 병원에 자주 가지 않고 토요일에만 이미 고등학생이 된 아들을 데리고 병원에 한번씩 찾아갔다.

 

2004년 11월 27일 9시, 우신임은 수술실로 들어가 간이식수술을 받았다. 이전의 수술통지서에는 그의 큰동생인 우신성이 가족대표로 서명했다. 수술후, 우신임은 회복이 아주 잘되었고, 1개월후에는 퇴원할 수 있었다. 법원은 우신임의 신체상황을 고려하여 이혼소송을 잠시 중지하는 결정을 내렸다.

 

2005년 4월 9일 오후, 사무실에서 일하고 있던 우신임은 돌연 복부가 팽창하고 견디기 힘든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왕청청과 함께 병원에 가서 다시 검사를 받았다. 검사결과는 금방 나왔는데, 이식수술받은 간에 문제가 생겨서 즉시 간을 바꾸는 수술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우신임이 입원한 6일째, 간복수가 발생하고, 의사는 그에게 응급조치를 취하는 동시에 위급하다는 통지서를 보냈다.

 

우신임은 두 동생의 무거운 표정에서 자기의 병이 위중하다는 것을 알았다. 2005년 4월 16일 오후, 그는 병상에서 유언장을 썼다. 5가지의 내용이었다.

 

1. 나와 무매영의 부부공동재산인 3채의 집과 2대의 승용차 및 6만달러와 22만홍콩달러가 있다.

 

2. 나는 병중에 작은 동생 우신민으로부터 50만위안을 빌려 치료비로 썼다. 이 채무는 나와 무매영의 공동재산에서 상환해달라.

 

3. 우신민의 50만위안의 채무를 변제한 후에, 내 이름으로 된 3채의 집과 1대의 승용차는 나의 큰 동생 우신성이 승계한다.

 

4. 현재 예금된 6만달러와 22만홍콩달러는 나의 아들 우미미(于未未)가 계승하며, 그가 장래 공부하고 생활하는 비용으로 쓰게 한다.

 

5. 나의 후사는 나의 두 동생이 전권을 맡아 처리하며, 유골은 왕청청이 보관한다.

 

당시 병상의 담당자였던 두 명의 의사가 증인이 되어 이 유언장에 서명하였다.

2005년 4월 20일 9시, 유언장을 작성한 지 4일째 되는 날, 우신임은 혼미상태에 들어갔고, 결국 사망했다.

 

유골을 화장한 후, 무매영은 남편의 유골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가려고 하였으나, 우신임의 두 동생은 '유골은 우리가 보관하는 게 낫겠다'고 말했다. 무매영은 생각해보다가 그들이 남편의 친형제라는 생각에 뭐라고 더 말하지는 않았다.

 

남편의 장례를 치른 후, 무매영은 모든 불쾌하였던 일과 원한이 죽은 사람과 함께 사라졌다고 느꼈다. 그녀는 다시 정신을 차려 생활하고자 생각할 때, 두 시동생이 찾아왔다.

 

2005년 5월 14일 저녁 7시경, 우신임의 큰동생인 우신성이 무매영의 집으로 찾아왔다. 간단하게 문안인사를 한 후에 직접적으로 물었다. "형수, 언제 수속을 해 줄 겁니까"

 

무매영은 놀라서 물었다."무슨 수속을?" 우신성은 반문했다. "모르고 있다는 말인가요?" 그러면서 그는 품속에서 유언장을 꺼냈다. 그리고는 제3항을 가리키며, "형이 유언장에서 분명히 얘기했스빈다. 그의 이름으로 된 세개의 방과 차량 하나는 내가 승계한다고."

 

무매영은 우신성의 손에 들린 유언장을 자세히 읽어보고는 거의 기절할 뻔했다. 처로서 그녀는 남편의 임종전의 유언장에 대하여 조금도 알지 못했고, 그들의 부부공동재산을 남편은 혼자서 다 처리했다. 더 중요한 것은 남편이 공개적으로 유언장에 자기의 유골을 애인인 왕청청이 보관하도록 한 것이다. 무매영의 분노는 극에 달하였다. 자신은 합법적인 처인데, 어떻게 유골도 갖지 못하는가? 그녀는 시동생의 요청을 거절했다. 우신성은 떠나면서 한 마디를 남겼다: "그러면, 법정에서 봅시다."

 

우신성이 떠난지 얼마 되지 않아, 우신민이 나타났다. 집을 들어서자 그는 "차용증"을 들이밀었다. 이 차용증은 프린트된 것이었다. 위에는 "나는 병치료를 위하여, 작은 동생 우신민에게 인민폐50만위안정을 빌린다. 이 돈은 나의 부부공동재산에서 상환한다."로 쓰고 서명난에 우신임의 친필서명이 있었고, 날짜는 2005년 4월 16일이었다.

 

무매영은 당시에 무슨 일인지 잘 이해되지 않았다. "우리 집에 그렇게 많은 돈이 있는데, 3채의 집만해도 400만위안인데, 치료하는 50만위안을 왜 너에게 빌리냐?" 우신민은 그것에 신경쓰지 않았다. 그의 이유는 간단했다. "너희 집에 돈이 얼마나 있는지는 나와 상관없다. 나에게 빌린 돈만 내놓아라" 무매영은 당연히 그의 요구를 들어줄 수 없었고, 두 사람은 불유쾌하게 헤어졌다.

 

2005년 5월말, 무매영은 법원으로부터 2장의 서류를 동시에 받았다. 하나는 남편의 작은동생 우신민이 법원에 그녀를 제소한 것이었고, 그녀에게 '차용금을 반환하라'는 것이었다. 다른 하나는 남편의 큰 동생 우신성이 '유산을 계승하겠다'는 것이었다.

 

무매영은 할 수 없이 변호사를 선임했다. 며칠 후 변호사는 그녀에게 얘기해주었다. 이미 남경의 여러 은행에 알아봤는데, 우신임은 생전에 11개의 은행통장을 가지고 있었고, 통장에는 인민폐 1680여만위안, 미화6만달러, 홍콩22만여달러가 들어있었다. 무매영은 남편이 그렇게 많은 돈을 가진 줄은 전혀 몰랐었다. 1680여만위안은 이미 남편이 15번에 걸쳐 다 인출했고, 인출한 시간은 남편이 처음에 법원에 이혼을 제소한 그 때쯤이었다.

 

남편에게 이렇게 돈이 많으면서 왜 동생에게 50만위안의 치료비를 빌린다는 말인가. 이런 이야기를 하면 누가 믿겠는가. 이외에 남편의 유언에서, 아들과 두 동생에게는 다 재산을 남겨주면서, 오직 그녀에 대하여는 한 마디도 언급되어 있지 않았다. 이것은 무매영으로 하여금 서늘함을 느끼게 해주었다. 그녀는 알았다. 우신임은 분명히 그 때의 바람피운 것에 대하여 마음에 품고, 10여년간 괴롭힌 것으로도 모자라, 죽은 후에도 그녀에게 한푼을 남겨주지 않으려 한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한을 풀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 두 개의 민사소송은 모두 하나의 유언장에서 유래되었다. 2005년 8월 4일, 남경시 중급인민법원은 우신성이 무매영에게 법에 따라 유산을 계승하겠다는 소송에 대하여 중간 재정을 내렸다. "이 사건은 다른 한 사건(우신민이 무매영에게 50만위안의 차용금을 반환하라는 사건)이 종결된 후 다시 심리하겠다."

 

2005년 9월 22일, 우신민이 무매영을 제소한 차용금사건의 제1심판결이 나왔다. 제1심법원은 우신민이 가진 차용증이 유효하다고 보고, 무매영에게 판결효력발생후 15일내에 차용금을 반환하라고 판결했다. 무매영은 판결에 불복하여 상소를 제기했다. 2005년 12월 2일, 남경시 중급인민법원은 "제1심법원의 판결을 취소하고, 이 사건을 원심법원으로 돌려보내 다시 심리하도록" 판결했다.

 

2006년 3월 4일 오전, 제1심인민법원은 다시 법정을 열고 우신민이 무매영에게 차용금을 반환해달라는 사건을 심리했다. 원피고 쌍방은 모두 자기 주장을 펼쳤고, 법원은 쌍방이 제공한 증거를 심리했다.

 

이 사건은 아직 최종판결이 나오지 않았으나, 현지에서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사람들은 이에 대하여 의론이 분분하다. 생각도 서로 다르다. 어떤 사람은 하루가 부부여도 그 은혜는 적지 않은데, 우신임이 이렇게 악독하게 하는 것은 너무 심하다 죽어서도 처를 편하게 지내지 못하도록 각종 방법을 생각해서 처가 한푼도 갖지 못하도록 해놓다니, 남자로서 도량이 너무 적다고 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이런 사건은 무매영과 같은 여인들에게 잊을 수 없는 교훈이 될 것이다. 그녀들도 알아야 한다, 남편이 바깥에서 힘들게 돈을 벌 때, 처가 바람을 피우는 것은 남편에게 얼마나 큰 타격이 되는지를 그것은 남편의 일생에서 가장 큰 실패가 되는 것이다. 이런 잘못은 평생에 거쳐서 괴로움을 느끼도록 해야 한다고.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현대사회의 부부관계는 갈수록 변수가 많아지는데, 서로 사랑이 없으면 헤어지는 것이고, 쌍방의 신체와 마음이 자유를 얻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신임이 무매영을 대한 것처럼 사랑이 이미 식었음에도 억지로 처를 징벌하겠다고 하면서 사랑도 없이 10여년을 생활하고 유언으로까지 괴롭히는 것은 적절하지는 않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