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나라와 청나라는 모두 여진족이 설립한 나라이다. 금나라가 송(북송)을 멸망시킨 후, 일부 황족이 남쪽으로 달아나, 항주에서 남송을 세웠다. 그러나, 금나라는 남송을 멸망시키지 못한다. 청나라가 명을 멸망시킨 후 일부 황족들은 남쪽인, 남경에서 남명을 세웠다. 그러나, 남명은 청나라에 멸망하고 만다. 거의 비슷한 구조를 취하면서 설립되었던, 남송과 남명간의 운명이 갈라진 이유는 무엇일가?
우선, 남송이 멸망하지 않은 이유를 살펴본다.
첫째, 여진은 원래 동북지방에 살던 오래된 민족이고, 백산흑수(백두산과 흑룡강)에서 생활했는데, 대체로 숙여진(熟女眞)과 생여진(生女眞)으로 나뉜다. 숙여진은 남쪽에 거주하며, 한족, 거란족과 혼거했는데, 실제로는 이미 한화되었다. 생여진은 북쪽에 살고 있는데, 완안부(完顔部)는 생여진의 한갈래로 인구가 15만가량이었으며, 비교적 원시적인 수렵어로생활을 했다. 그러나, 백성의 기풍이 강인하고 전투에서 용감하였다. 1115년, 요나라의 천조제가 20만기병과 70만보병을 파병하여 완안아골타(完顔阿骨打, 아구타)를 공격했다. 그러나, 아구타의 1만명에게 패배당한다. 일거에 아구타는 요나라에 대한 전략이 수비에서 공격으로 변경된다. 이 전투로써 "여진은 만명이 되지 않는다. 만명이 되면 누구도 싸워서 이기지 못한다"는 소문이 돌았다. 이러한 것으로서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는 여진의 전투력이 강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여진의 인구가 실제로 너무 적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이러한 소수인원으로 요나라와 전투를 하는 것은 가능하겠지만, 그러나 북송을 멸한 후, 다시 남송까지 멸하는데는 힘이 따라주지 않는 것이다. 비록 나중에 금나라가 수십만대군으로 남송을 공격했지만, 사실 이 군대는 대부분 금나라에 항복한 요나라 사람이거나 모병한 한족이었다. 이런 군대는 투항하여 이민족을 위하여 싸우는 것이니 전투력이 강할 리 없다. 즉, 전투의 추세를 보아가며 활동하는 것이다. 이길 것같으면 먼저 나서서 공을 세우려고 하지만, 이기지 못할 것같으면 먼저 도망치는 것이다.
둘째, 여진은 다른 민족을 노예로 부리는 정책을 썼다. 금나라를 건립한 후, 인심을 얻기 힘들었다. 당시 북에는 몽고의 귀족이 반항하고 서쪽으로는 서요(西遼)가 고토회복을 도모하고 있었으며, 서남지역에는 서하(西夏)가 웅크리고 있었다. 내부적으로도 요(遼)와 북송(北宋)의 유민들의 반란이 그치지 않았다. 이것은 금나라가 남하하여 남송을 공격하는데 많은 견제작용을 하였다.
셋째, 여진의 고위층에서 내부갈등이 심했고, 정치적인 견해가 서로 달랐따. 금나라는 초기에 남송에 대한 정책에서 주전파와 주화파로 나뉘고 상호간에 치열하게 싸웠다. 이들은 여러 황제를 거치면서 내분, 모방, 시군(弑君), 멸족등의 화가 계속되었다. 그래서 남하하여 송을 멸하려는 정책은 장기간 안정적으로 진행되지 못하였다. 금나라의 남송에 대한 군사적 우세가 명확하던 수십년간 금나라의 황제계승제도는 안정적이지 못했다. 많은 경우 동생이 형을 잇거나 조카가 대권을 잇는 경우가 있었다. 장자계승제도와 비교하여 폐단이 컸고, 매번 새로운 황제가 등극하면 피로 물든 싸움이 벌어지곤 하였다. 이것은 고위층의 단결에 아주 부정적인 작용을 하였다.
넷째, 금나라는 북송이 함락된 지역에 유효하고 안정적인 통치를 하지 못했다. 금나라의 농민반란이 계속되었고, 매번 금나라가 남하하여 남송을 칠 때마다 후받의 보급선은 이런 반란군에 의하여 끊기는 일이 발생했다. 이로 인하여 금은 남송에 전면전을 진행하기 힘들었다. 심지어 어떤 때는 전부 철수하는 것이 힘들 때도 있었다. 비교적 유명한 농민반란군으로는 왕언(王彦), 양청(梁靑)등이 있는데 모두 산악지대에 의지한 반란군이었다.
다섯째, 북송, 남송의 양대를 살펴보면, 황제는 대부분 인자하였고, 악정을 펼친 사람이 없었으며, 경제는 번성했고, 백성들의 생활은 풍요로운 편이었다. 그러므로 북송의 정치가 금나라의 위협을 받고, 금나라가 북송을 멸하게 되자, 남송을 건국하게 되는데, 남송은 북방의 함락지역 유민들의 마음을 잃지 않았다. 송나라의 경우에도 농민반란이 없었던 것은 아니나, 전국에 걸치는 경우는 없었다. 또한 대부분 "관리에는 반항하나, 황제에는 반항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유지했다. 이런 점에서 남송의 정권에 영향을 주지는 않았다. 예를 들어, 금나라가 북송의 수도 개봉을 포위하자 전국각지에서 군대를 수도인 개봉으로 보내는데, 그 중에는 적지 않은 농민군과 농민반란군도 포함되어 있었다.(예를 들어, 종상은 아들 종자앙에게 300명의 태호반란군을 이끌고 개봉으로 가서 금나라와 싸우도록 한다). 송나라는 외환은 있었지만, 내우는 없었다는 것을 의미하고, 이것은 명나라 말기와 많은 차이가 있다.
여섯째, 송나라는 병사를 이끄는 무장에 대하여 압제하는 정책을 썼다. 전국의 군권은 황제 한 사람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가장 정예부대는 항상 경성에 있었다. 그들의 책임은 황제를 보위하는 것이고, 변방을 수비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북송이 멸망해도 전국에서 최정예부대는 멸망하지 않았다. 그래서 남송의 통치자들이 남하자자 이들은 남송초기의 어려운시기에 주요한 군사역량이 되었다.
일곱째, 남송의 경제, 과학기술이 발달하였다. 이로써 금나라에 대항하는 작전을 하는데 필요한 거대한 자금을 조달할 수 있었다. 이 시기에 악비, 한세충, 오개, 유기등의 유명한 장수들도 나타난다.
여덟째, 송나라의 무장을 압제한 원인으로 인하여, 송나라의 무장은 병사를 이끌고 반란을 일으키지 못했다. 비록 장방창, 유예와 같은 자들이 병사를 이끌고 금나라에 투항하기는 하였지만, 금나라에 의탁한 역량들은 그저 괴뢰에 불과하였다. 즉, 그들은 금나라의 지원하에서만 안정을 유지할 수 있었고, 금나라를 위하여 남송까지 칠 역량은 없었다. 그래서 장방창의 세력이 약화되자, 유예까지도 제거된다. 이것은 명나라 말기의 투항한 장수인 오삼계, 공유덕, 경정충, 상가희등이 모두 농민반란군과 남명을 제거하는 선봉장이 되었던 것과 구분된다.
아홉째, 북송과 남송의 정권교체가 비교적 안정적이었다. 금나라가 북송을 멸망시켰으므로, 북송의 황제종실은 거의 사라졌고, 남은 강왕 조구가 가장 황실에서 핵심에 가까운 인물이었다. 그래서 그는 순조롭게 황제에 오를 수 있었고, 조구의 기치하에, 금방 금나라에 항거하는 무장세력들이 단결할 수 있었다. 이것은 남명과 구분된다. 명나라가 멸망한 후, 남방에는 주씨성의 여러 왕들이 각자 나뉘어 싸웠고, 스스로는 정통으로 칭하고 서로 다투었다. 이리하여 금방 오삼계, 공유덕, 경정충과 청나라군사들에게 멸망한 것이다.
이어서 청나라는 순조롭게 남명을 멸망시켰던 이유를 살펴보자. 전체적으로 보자면 청나라가 손쉽게 산해관을 들어오고, 농민군과 명나라 잔여세력을 무찌른 원인은 명나라말기의 4명의 항복한 장수 즉 오삼계, 공유덕, 경정충, 상가희에 의존한 바가 크다. 당연히 이외에도 여러가지 요소와 역사의 우연이 겹친 점도 있다.
첫째, 많은 학자들은 명나라는 중국에서 가장 어둡고 잔혹한 봉건왕조의 하나라고 보고 있다. 명나라의 16황제중에서 잔혹하고 멍청한 자들이 많았다. 그리고 환관의 권력독단이 매우 심했다. 이런 왕조통치하에서 백성들의 고통이 심했고, 약간의 천재지변만 있어도 바로 반란이 끊이지 않았다. 그리고 이러한 반란도 금방 전국적인 규모로 성장했다. 그래서 명나라 말기의 농민반란은 사실 명나라 내부의 가장 큰 우환이었다.
둘째, 명나라때 보통백성들이 고통스러웠을 뿐아니라, 명나라의 조정대신들도 수시로 멸문지화를 당하였다. 명나라의 관리에 대한 관리감독은 역대 왕조중 가장 심했다. 조정의 정파인물들은 자주 환관과 간신의 박해를 받았다. 명나라 말의 "문관은 충언을 간하지 아니하고, 무관은 전쟁에 충성하지 아니한다"는 말이 나오기까지 하는 것이다. 오삼계, 공유덕, 경정충, 상가희, 홍승주와 같은 인물들이 청나라에 투항한 것도 우연만은 아니다. 그들은 이미 청나라에 대한 충성심이 사라졌다. 즉 군주가 신하를 의심하면, 신하도 군주에 충성을 다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이자성이 북경을 포위하였을 때, 지원온 군사가 하나도 없었고, 각지의 군사들은 앉아서 명나라가 멸망하는 것을 구경하였던 것이다(이것은 북송이 변량에서 멸망할 때와는 많은 차이가 있다)
셋째, 명나라는 군사에 있어서 송나라와 완전히 달랐다. 명나라의 최정예부대, 장비가 가장 좋은 부대는 장성일대에 주둔하며 방어했다(명말의 오삼계, 공유덕, 경정충, 상가희는 이런 정예부대를 이끌고 청나라와 싸웠던 자들이다). 내부군대는 전투력이 아주 낮은 군대였다. 그래서 일단 농민반란이 일어나면, 전투력이 강하지 않았던 부대들은 적시에 반란군을 진압하지 못했고, 심지어 반란군의 역량을 키워주어서 결국은 나라가 망하는 지경에 이르게 하였다. 내우와 외환이 겹칠 때, 외환을 먼저 막을 것인가? 내부를 안정시킬 것인가? 아마도 장개석은 명나라 말기의 상황에서 교훈을 얻어 외환보다 내우를 먼저 해결하려고 한 것일 것이다.
넷째, 오삼계, 공유덕, 경정충, 상가희는 명나라의 최정예부대를 이끌었다. 이자성의 농민군도 전투력이 약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자성은 중국절반을 다니면서 전투를 하였는데, 근거지를 제대로 확보하지 못하였고, 그저 돌아다니면서 싸웠을 뿐이다. 그래서 북경에서 근거지가 흔들리자, 오삼계, 공유덕, 경정충, 상가희 및 청나라군대의 공격하에 숨을 쉴 기회나 기반을 갖지 못하였고, 궤멸하게 된 것이다. 북경, 하북, 섬서, 하남, 호북으로 수천리를 급히 도망가다가 결국은 궤멸하고 말았다.
다섯째, 명나라는 숭정제 사후에, 남쪽의 주씨성의 왕들이 각자 왕을 칭하고, 개별적으로 싸웠다. 이로써 원래 강하지 않던 항청세력이 집중되지 못하였고 더욱 약하게 되었다. 예를 들어, 노왕 주이해와 당왕 주예건은 서로 싸웠으며 서로 자신을 정통이라고 주장했고 세불양립의 형세를 이루었다. 나중에 주유랑이 황제를 칭하고 각지의 항청세력이 모여들었는데, 내부에는 붕당세력이 여전하였고, 내부갈등이 심하여서 제대로 기세를 형성하지 못했다. 송나라는 300년역사상 당파다툼이 없다고 할 수는 없었다. 바로 사마광과 왕안석의 신구지쟁은 군자지쟁이었다. 그들은 정견은 달랐지만, 서로 음모와 궤계를 쓰지는 않았으며, 송나라통치의 기반을 흔들지도 않았다. 그리고 북송말과 남송때 조정에는 주전파와 주화파가 나뉘었지만, 역시 당파싸움으로 번지지는 않았고 의사결정권은 황제 1인에게 놓여 있었다.
여섯째, 청나라의 북경입성후, 각지의 반청복명운동이 일어날 때, 청나라는 홍승주의 책략을 받아들였다. 그래서 명나라 황실을 보전하고, 명나라 황제를 위하여 장사지내며, 명나라를 위하여 순국한 장사들을 위하여 묘를 세웠다. 제도도 잠시 명나라의 제도를 그대로 썼다. 이런 완병지계(緩兵之計)는 청나라가 비교적 단기간내에 전국에 걸친 유효한 통치를 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양주도성, 체발령등은 모두 대국이 안정된 후에 상황을 봐가며 시행한 것들이다.
이상을 분석하면,
명나라는 내우로 망했고, 외환으로 망했으며, 천시, 지리, 인화를 얻지 못하였기 때문에 망했다.
북송은 외환으로 망했지만, 남송은 내우가 없었고, 천시, 지리, 인화를 얻어서, 강남의 한구석이나마 차지하고 생명을 유지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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