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중국과 한국/한중관계

모안영(毛岸英)의 묘가 북한에 남아있게된 경위

by 중은우시 2006. 11. 18.

 

[모택동과 모안영]

 

1954년 12월 24일밤. 중남해, 영복당은 불이 켜져 있었다. 건륭황제가 쓴 '영복당(永福堂)'이라는 편액이 있는 북경의 사합원은 5간이 북쪽으로 일자로 배열되어 있는데, 가운데 1간은 식당이고, 동측의 두간은 팽덕회의 거주지였고, 서측의 2간은 사무실이었다. 동상방(東廂房)은 군사위원회판공회의가 열리는 회의실이었고, 서상방(西廂房)은 업무인원의 사무실 겸 숙사였다.

 

국무원부총리 겸 국방부장인 팽덕회는 책상에 앉아 군사위원회 총간부부(總幹部部)에서 보내온 전보를 보고 있었다.

 

며칠전에 지원군총사령부는 모택동의 아들로 한국전쟁시 사망한 모안영의 안장문제로 중앙군사위원회에 지시를 요청했다. 군사위원회 총간부부는 회신을 초안했는데, 지원군총사령부에 모안영의 유골을 북경으로 옮겨와 안장하라는 것이었다. 당시의 상황으로보면 모안영의 시신을 북경으로 옮겨와서 묻더라도 크게 문제될 것은 없었다. 이미 황계광, 양근사, 구소운등 전투영웅들이나 단장(연대장)이상의 간부들의 유체는 모두 단동, 심양등지의 항미원조열사릉으로 옮겨와 묻었기 때문에, 이렇게 한다고 하여 크게 문제될 사항은 아니었다.

 

팽덕회는 원칙을 중시하고, 광명정대한 사람이었다. 그는 모안영이 모택동의 아들이라고 해서 북경으로 시신을 옮겨오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보았다. 그러나, 국가주석의 아들에 관련되는 사항이다보니, 스스로 결정하기는 적절하지 않다고 보고, 주은래에게 서신을 썼다.

 

총리

 

어제24일 뇌전주 동지가 전보를 초안했습니다. 모안영 동지의 유골을 북경으로 옮겨오자는 것입니다. 내 생각은 조선에 묻고, 지원군사령부 또는 지원부사령관의 명의로 비를 세워서, 자원하여 참전하고 희생한 경과를 설명하는 것이 모택동의 아들로서 부끄럽지 않은 일이고, 동시에 희생한 다른 참모 고서흔과 함께 묻는 것이 좋겠습니다. 이렇게 하면 교육적인 의미도 매우 큽니다. 다른 전사한 열사의 가족들도 이의가 없을 것입니다. 원래의 전보원고는 총리께 보냈습니다. 상기 의견은 붙이지 않았습니다. 특히 보충하여 말씀드리니, 타당한지 여부에 대하여 고려해주십시오.

 

경례

 

팽덕회

12월 25일

 

주은래는 팽덕회의 서신을 보고, 오래 생각에 잠기었다. 그리고는 팽덕회 장군의 말이 맞다고 생각했다. 모안영의 유골은 중국으로 옮겨와서 안장하는 것이 적절치 않고, 더구나 북경으로 옮겨와서 안장하는 것은 적절치 않으며, 당연히 다른 모든 희생된 지원군 열사들과 함께 묻혀야 한다. 이것이 모주석의 뜻이고 이렇게 하는 것이 정치적인 의미도 크다. 이렇게 생각해서, 그는 팽덕회의 서신을 모택동에게 보냈다.

 

모택동의 비서는 팽덕회의 서신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김일성 수상도 전보를 보내왔는데, 주석에게 위문을 하면서, 모안영동지는 조선인민의 해방사업을 위하여 희생되었으니 조선의 아들이라고 하면서, 조선에 모안영을 안장하기를 희망했습니다"라고 하였다.

 

모택동은 "팽덕회가 말하는게 옳다. 어느 전사의 혈육이든 부모가 없겠는가. 내가 당과 국가의 주석이라고 해서 아들을 특수하게 대해서는 안된다" 그리고는 필통에서 연필을 꺼내서 문건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

 

"덕회동지의 의견에 동의함. 안영의 유골과 수천수만의 지원군열사와 마찬가지로 조선의 토지에 묻고, 그를 위해서 특수한 장례를 거행하지 말 것"

 

주은래는 당일로 팽덕회의 서신에 "당신의 의견과 조선의 동지의 요구를 존중함. 회신전보를 다시 초안할 것"이라고 지시를 내렸다. 유소기, 등소평도 회람을 보고 모두 동의했다.

 

모택동은 일찌기 모안영의 친구이면서 소련에서 주중국대사로 파견온 우금(尤金)을 만났을 때, "공산당원은 어디서 죽으면 거기에 묻히는 것이다. 내아들 모안영은 조선에서죽었다. 어떤 사람은 시신을 옮겨오자고 했지만, 나는 그럴 필요없다. 거기서 죽었으면 거기서 묻으라고 했다"라고 한 바 있다.

 

나중에 유사제(劉思齊, 모안영의 처), 소화(邵華)등이 모안영의 시신을 모셔오자고 다시 요청했을 때도, 모택동은 한참을 침묵을 지키다가 동한의 유명한 노장군 마원의 말을 인용했다. "청산처처매충골(靑山處處埋忠骨, 푸른 산의 곳곳에 충성을 다한 병사들이 묻혀 있네), 하수마혁과시환(何須馬革屍還, 굳이 말에 시신을 싸서 돌아갈 필요가 있겠는가). 수천수만의 지원군 열사들이 조선에 안장되어 있지 않은가? 안영도 마땅히 조선에 안장되어야 한다" 모택동은 그녀들의 요구를 받아들여주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