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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한국/한중관계

당나라의 신라유학생

by 중은우시 2006. 12. 22.

 

신라가 당나라에서 선진문화를 흡수하는 주요한 경로는 대량의 유학생을 당나라로 파견한 것이었다. 당시 당나라는 세계 최고수준의 문화를 자랑하고 있었으며, 국자감에는 교사 1200여간을 마련해서, 중국과 외국의 학생 8000여명을 가르치고 있었다.

 

640년 신라는 처음으로 왕족자제를 당나라에 보내서, 태학(즉, 국자감)에 입학할 수 있도록 요청했다. 당시 국자감의 제주(祭酒, 책임자 지금으로 말하면 국립대학총장)인 공영달의 유학강의를 들었다. 이때부터 신라의 학생이 당나라로 오는 경우는 점점 많아졌고, 결국 신라학생은 당나라에 온 외국학생중 가장 많은 숫자를 자랑하게 되었다.

 

신라의 당나라유학은 9세기에 최고조에 달하였다. 837년에는 당나라에서 공부하는 신라학생이 216명에 달하였다. 840년에는 한해에 귀국한 학생수가 105명에 달하였다. 이로써 당시 당나라유학생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이름이 알려진 사람들만도. 김운경, 최이정, 김숙정, 박계업, 김윤부, 김입지,박양지, 김간중, 김이어, 김가기, 최치원, 이동, 최질, 박인범, 김옥, 김장, 박충, 김소유, 김무선, 양영, 최환, 최승우, 최영, 김문위, 최언위, 김곡, 박거물, 김준, 박옹, 김인규, 김영, 김원, 김근, 최원, 원걸, 왕거인, 김수훈, 풍훈등 38명에 달한다.

 

신라유학생이 왜 이렇게 많았는가? 한편으로는, 당나라에서 대우를 아주 잘해주었다. 당나라는 당시 외국학생에 대하여 마찬가지로 과거제도를 실시하였는데, 신라학생들도 과거에 응시할 수 있었다. 이것은 신라학생들에게 대단한 격려가 되었을 것이다. 과거에 급제를 하고 당나라에서 관직을 받으면, 당나라에서 관리를 지낼 수 있을 뿐아니라, 신라에 귀국하면 아주 요직에 등용될 수 있었다. 다른 한편으로는 신라정부가 매우 적극 지원했다. 당문화를 흡수하기 위하여 신라는 적극적으로 유학생을 보냈다. 특히 788년에 신라는 관리선발에 있어서 당나라의 방식을 본떠서 독서출신과를 시행하고, 중국의 좌전, 예기등을 시험과목으로 하였다. 여기에 급제하면 관리로 뽑았다. 이로써 더 많은 학생들이 당문화를 배우기 위하여 유학길을 떠나게 된다.

 

821년, 신라학생 김운경(金雲卿)이 처음으로 당나라의 과거에 급제한다. 이후 당나라가 망하는 907년까지 신라학생중 중국에서 과거에 급제한 인물이 모두 58명이다(동문선). 이 58명의 급제자들중 어떤 사람은 당나라에거 관리를 지내다가, 몇년 후에 신라로 귀국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급제후 바로 귀국하기도 하였다. 58명중 이름이 알려진 사람은 김운경, 김윤부, 김간중, 김이어, 김가기, 최치원, 이동, 박인범, 김옥, 김장, 최승우, 김문위, 최언위, 박충등 14명이다.

 

신라유학생중 가장 뛰어난 성취를 거둔 것은 최치원이다. 최치원은 857년에 태어나, 12살때 당나라로 왔고, 874년 18세의 나이로 과거에 급제하였다. 처음에 당나라에서 강남 선주 표수현위를 맡았다. 880년 여름에는 회남절도사  고병의 종사관을 지냈다. 그는 시문이 뛰어나 당나라에서 많은 명문장을 남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