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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한국/한중관계

발해 : 수수께끼의 왕조

by 중은우시 2006. 12. 28.

작자: 미상(어느 중국인이 인터넷에 쓴 글입니다)

 

기원 7세기말부터 10세기 중엽까지 중국의 동북지방과 한반도 북부지방의 큰 대지위에 하나의 강대하고 번성했던 국가가 있었다. 발해왕국(渤海王國)으로 "해동성국(海東盛國)"으로 칭송받았었는데, 사학계에서는 수수께끼의 왕조(謎中王朝)로도 유명하다.

 

중국과 외국의 학자들은 발해왕국에 대하여 아주 흥미를 많이 가지고 있다. 주요한 이유는 두 가지 특색때문이다. 하나는 연속한 기간이 중국주변의 어느 비한족왕조보다 길고, 판도가 동북삼성의 동북부와 소련연해주 그리고 한반도의 북부에 걸치는 넓은 지역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이다. 다른 하나는 동해를 건너 일본과 빈번하게 문화교류를 하여, 중국, 일본 및 신라와의 문화교류에서 중개적인 역할을 하였다는 점이다. 그러나, 사료의 결핍으로, 사람들은 발해왕국에 대하여 여러가지 추측들을 하고 있다. 발해왕국의 진면목은 언제나 사람들 앞에 완전히 드러낼 것인가? 고고학적인 발굴과 연구가 심화되면, 일부 의문은 해결되었다. 그러나, 아직도 많은 수수께끼들은 신비로운 면사를 거두지 않고 있다.

 

발해왕국의 건국자는 도대체 누구인가?

 

이것은 자고이래로 해결되지 않은 문제이다. 당나라 무측천의 통천원년(696년)에 영주의 거란족 이진충이 당나라에 반란을 일으켰다. 이 기회를 틈타서 이 곳으로 옮겨왔던 발해시조는 동쪽으로 가서 진국(震國)을 세운다. 당나라 무측천의 성력년간(697-699)에 발해왕국이 건립된다. 그러나, 이 왕국의 건립자는 누구인가? 역대이래로 두 가지 견해가 있었다.

 

<<구당서. 발해전>>에서는 모두 아는 바와 같이 대조영(大祚英)이 발해왕국의 시조라고 하고 있다. 그러나, <<신당서. 발해전>>에서는 좀 복잡하다. 전설에 의하면 당시 말갈족 추장인 걸사비우(乞四比羽)와 대조영의 부친인 걸걸중상(乞乞仲象)은 함께 영주를 도망쳐나왔고, 발해왕국을 건설한 사람은 걸걸중상이라는 것이다. 이 두가지 가장 기본적인 사료가 서로 다른 견해를 취하고 있어, 학자들의 논쟁을 불러 일으켰다. 일본의 지내굉(池內宏)은 이 모순을 해결하기 위하여 하나의 절충적인 견해를 내놓았다. <<신당서. 발해전>>에서의 걸걸중상은 후세사람들에 의하여 별도로 묘(廟)가 만들어지지 않았다. 이 점을 보면 대조영과 걸걸중상은 같은 사람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즉, 걸걸중상은 건국전에 영주에서 쓰던 본명이고, 대조영은 건국후에 사용하게 된 중국식 이름이라는 것이다. 아쉽게도, 이런 교묘한 해석은 유력한 사료가 뒷받침해주지 못하고 있다. 지금까지 발해의 건국자가 누구인지에 대하여 완전히 해결되지는 않았다. 이처럼 나라의 건국시조가 누구인지조차 불명확한 경우는 역사상 드물게 보는 것이다.

 

발해의 건립자는 어느 민족의 사람인가?

 

이럿은 발해시조의 수수께끼와 열결된 하나의 수수께끼이다. <<구당서. 발해전>>의 기재에 따르면, "발해말갈 대조영이라는 자는 원래 고구려의 별종이다"라는 문구가 있다. 어떤 한국의 학자는 이를 근거로 대조영은 한국사람이라고 하고, 발해왕국을 건립한 것은 한민족이라고 하며, 나아가 발해왕국과 한국을 연결시키고 있다. 유득공은 <<발해고>>에서 명확히 언급하고 있다. "대저 대씨(大氏)는 어떤 사람인가? 바로 고구려의 사람이라. 그가 소유한 땅이 어디인가? 바로 고구려의 땅이라". <<신당서. 발해전>>의 주장은 그러나 다르다. "발해. 원래 속말말갈로 고구려에 붙은 자이고, 성은 대씨이다." 속말말갈은 수, 당나라시기에 중국동북부 말갈7부중의 하나이며, 송화강유역에 거주하였다. 이에 따르면, 대조영은 고구려사람이 아닌 것이고, 고구려에 의부(依附)한 속말말갈족 사람인 것이다. 해방이후 고고학적 발굴이 이루어지고, 문헌의 기록을 검토하여 중국학자들은 보편적으로 이 주장을 받아들이고 있다. 강수붕은 <<고문헌으로 본 발해국족속문제>>에서 상세하게 논술하고 있는데, "말갈의 주체는 숙신-물길-말갈로 변해왔다." 이처럼 발해왕국의 건국자가 한민족이라는 주장은 의문을 받게 되었다. 발해왕국의 건립자의 민족문제의 수수께끼는 또 다른 논쟁을 끌어낸다. 발해왕실과 한국, 고구려왕조는 혈연관계가 있는가? 일반적으로 둘 사이에는 필연적인 혈연관계가 없다고 본다. 왜냐하면 확실한 사료로써 증명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떤 학자는 여전히 발해의 왕실은 고구려왕조와 밀접한 혈연관계가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1933년, 일본 백오고길(白烏庫吉)은 <<발해국에 관하여>>라는 글에서 사료의 기재에 의하면, 발해가 일본국에 보낸 서신에서 거의 모두 "고구려왕은 ...."이라고 적는데, 발해왕은 스스로 고구려의 후예임을 밝히고 있다는 것이다. 관원도진(管原道眞)의 <<유취국사>>를 살펴보면, 일본으로 보낸 발해사신은 모두 고구려왕실의 이름이나 중국식이름을 가지고 있고, 만주식이름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매우 적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논자는 이로써 이렇게 추단한다. "대조영은 <<구당서>>에 기재한대로 고구려이다. 발해왕실과 상류사회의 중추세력을 구성한 사람도 고구려인이다. 피통치자는 말갈인이다. 발해왕국은 고구려유민이 말갈족을 이용하여 건립한 것이다." 만일, 이런 가설에 의한다면, 발해왕국은 한민족이 중국의 변경에 건립한 하나의 나라라는 것이고, 이것은 중국의 당나라와 고구려시대의 일련의 역사적 의문점들을 같이 가지게 된다.

 

1936년, 도엽암길(稻葉巖吉)은 독특한 주장을 내놓았다. 그는 말갈은 종족명칭이 아니고, 산스크리트어로써 "대인(大人)"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대조영과 걸걸중상은 모두 여진의 추장들이고 이런 추장들을 중심으로 발해국이 건립되었으며, 여진인들뿐아니라 고구려인도 포함되었다는 것이다. 그 통치계급도 여진인들이나 문화는 고구려인들이 독점했다고 본다.

 

그래서, 발해왕실과 고구려왕조의 관계를 조사하는데에서도 발해왕국의 정권성격문제가 나타나게 된다. 해방전에 이 문제가 언급된 적은 별로 없었다. 그 때 사람들은 알게 모르게 발해를 한민족이 건립한 하나의 나라로 생각해왔던 것이다. 해방후, 중국학자는 이에 주목하게 되었고, 새로운 주장을 내놓게 된다. 그러면서 발해왕국은 당왕조에 속한 소수민족의 지방정권으로 보게 된 것이다. 양소전은 <<발해는 우리나라 당나라왕조에 속한 소소민족지방정권이다>>(1982. 2. 구시학간)라는 글에서 여섯가지 측면에서 논증하고 있다. (1) 발해는 중국내의 민족인 말갈족이 건립한 것이다. (2) 발해의 지역은 중국영토이다. (3) 발해는 당나라의 책봉, 수작을 받았고 당나라에 조공을 바쳤다. (4) 발해는 당나라의 관할을 받았고, 그 강토에 행정조직을 두었다. (5) 관리는 당나라에서 임명했으며, 발해국왕의 자제 및 일반인들도 당나라에서 관리가 될 수 있었다. (6) 당문화는 광범위하게 발해에 전파되었다. 비교하자면, 이 주장은 사람들이 받아들이기 쉽다. 그러나, 구체적인 사실이 어떠한지는 더 검토해야 할 것이다.

 

발해왕국의 강역은 얼마나 넓은가?

 

역대이래로 서로 다른 주장이 있었다. 정약용의 <<아방강역고>>에서는 "세세하게 고증해보면 그 국경은 역대이래로 발해의 영역바깥이라고 생각했던 심양, 요양의 선을 넘어선다"고 하였다. 고고학적발굴이 늘어나면서 발해국의 강역범위는 예전보다는 명확해졌다. 그러나 아직도 정설로 굳어지지는 못했다.

 

발해왕국의 수도는 어디에 있는가?

 

이것도 역대이래로 논쟁이 계속되는 것이다. 고고학적 발견을 거쳐서 사람들은 분명히 알게 되었다. 왕승례의 <<돈화육정산발해묘청리발굴기>>에서 발해왕국의 옛 수도는 지금의 돈화 동성이라는 주장을 내놓았고, 이미 학술계의 공인을 받았다.

 

발해왕국에는 다섯 개의 중요한 도시가 있었는데, 상경, 중경, 동경, 서경, 남경이다. 이들은 왕국의 정치문화의 중심이며 대외문화교류의 요충지였다. 그래서, "오경"의 정확한 위치는 사학계의 흥미를 끄는 연구과제였다. 그리고 고고학적 발굴이 이루어지면서 이 지하에 묻혀 있던 옛날의 화려한 도시는 점점 더 사람들에게 잘 알려지기 되었다.

 

상경용천부의 유적지는 어디인가? 1933년부터, 중국, 한국, 일본의 고고학자들은 힘들게 발굴작업 및 찾아내는 작업을 하였다. 반세기후, 마침내 명확히 밝혀졌다. 진현창이 <<당대발해상경부유적>>(1980.9. 문물)이라는 글에서 명확히 밝힌다. 발해의 상경용천부의 유적지는 영안현 동경성이다. 이 주장은 이미 학술계의 공인을 받았다.

 

중경현덕부의 위치에 대하여는 주장이 서로 엇갈린다. 그곳은 대조영이 영주에서 도망친 후 건국한 동모산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곳이고, 제3대 문왕 대흠무가 상경으로 천도하기 이전까지의 수도였다. 그의 정확한 위치에 대하여는 여러 설이 분분하다. 조천걸이 제출한 것은 휘발하와 송화강이 만나는 지점의 나단불륵이라고 본다. 소천탁치는 길림성 화전현 소밀성이라고 본다. 진전좌우길은 돈화부근이라고 본다. 이외에 도문강으로 흘러들어가는 해란강과 조양천서하상류의 서고성이라는 설도 있다. 고고학적 발굴이 진행되면서 이건제등이 제출한 발해중경현덕부의 자리는 화룡현 서고성이라는 설이 사람들에게 많이 받아들여졌다.

 

발해에서 일본으로 통하던 출발점은 동경용원부였다. 그 위치에 대하여도 여러가지 주장이 있다. 정약용은 함북종성, 온성부근이라고 보았다. 지내굉은 간도 옥자가라고 보았다. 가장 유력한 것은 오산희일이 제출한 간도 훈춘설이다. 1942년, 제등심병위의 조사보고서 <<반랍성-발해유적보고>>에서 훈춘 반랍성의 규모와 상경성, 중경서고성유적지가 거의 같다는 것을 밝혔고, 그래서 훈춘 반랍성이라는 것이 거의 정설로 굳어졌다.

 

그런데, <<신당서. 발해전>>에서 발해가 신라와 통하던 남경남해부와 당나라와 통하던 서경압록부의 위치에 대하여는 지금까지 학설이 분분할 뿐 명확하지 않다.

 

발해문화는 어떤 유형에 속하는가?

 

발해문화는 고구려문화가 이식되었는가, 당나라문화를 수입했는가? 이것은 발해왕국에 대하여 풀리지 않는 하나의 수수께끼이다. 그리고 중외문화교류사상에서 앞으로 해결하여야 할 하나의 이슈이다. 이것은 발해의 건국자 및 그 민족이 무엇인지와도 관련이 되어 있다.

 

문헌기재가 별로 없기 때문에, 발해문화의 내용과 특징은 지하에서 발굴되는 것을 통하여 확인할 수밖에 없다. 한국과 일본학자는 모두 발해문화는 고구려문화의 연장이나 변형으로 본다. 그 주요한 증거는 "발해기와"이다. 조정용장은 만주기와와 조선기와는 서로 다르다. 동경성, 서고성 및 다른 성에서 발굴된 기와를 보면, 모두 조선기와의 특징인 포목문(布目紋)이 있다는 것이고, 이것은 고구려기와와 비슷하다는 것이다. 이것은 당시 발해의 통치계급이 고구려문화를 받아들였다는 방증이다. 조산희일은 상경용천부에서 출토된 문물을 분석하고, 출도된 보살상의 형태도 비교적 적기는 하지만 고구려의 벽돌에 새긴 상과 비슷하다고 본다. 불교예술도 발해와 고구려간에 유사한 점이 있다. 발해 삼령고묘의 구조도 고구려, 신라와 유사한 점이 있다. 그래서 조산희일은 발해문화는 고구려문화의 계승으로 보고, 고구려문화의 영향을 받았다고 본다.

 

조선의 이용범은 <<발해사의 수수께끼>>라는 글에서 솔직하게 발해문화의 고구려특징을 인정하고, 동시에 발해왕국과 통치계급이 누구인지에 관한 수수께끼를 풀어줄 열쇠를 찾고자 하였다.

 

중국학자들은 발해문화와 당나라문화의 역사적인 연원관계를 강조한다. 이전복은 <<고고학적으로 본 당나라때의 발해문화>>(1981. 4)라는 글에서 지상과 지하문화의 유적을 보면 발해문화는 당문화와 연원관계가 있다고 본다. 주국침등도 <<당대발해문화초탐>>이라는 글에서 문헌기재를 위조로 하고, 고고학적 발굴을 결합시켜 발해문화를 분류연구했는데, 여기서 "현란하고 다양한 발해문화는 중국문화예술의 보고일 뿐아니라, 이웃나라인 한국, 일본과 문화교류와 우호적인 왕래의 유대를 형성하였다."고 적었다.

 

고고학적 발굴로 보면, 발해문화는 당나라 문화의 내용도 담고 있고, 한국적인 문화의 특색도 가지고 있다. 그래서 발해문화가 어느 한 유형의 문화를 이식하였다거나 수입하였다고 보기는 힘들다. 그것은 7-10세기의 동아시아와 동북아시아의 각국간의 문화교류가 빈번하였다는 사실을 반증하는 것이고, 이런 문화교류가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는 연구할 가치가 충분하다.

 

발해왕국이 수수께끼의 왕국이 된 것은 그에 관한 사료의 기재가 결핍되어 있을 뿐아니라, 두 당서의 기재가 서로 모순되기때문이고, 그 문화는 이미 땅속에 묻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잃어버린 발해왕국에 대하여 명확하게 이해하기 힘들고, 과거의 역사이야기를 들으면서 여러가지 추측들을 해보는 것이다. 발해왕국은 3세기나 지속되었고, 지역이 중국, 한국, 소련에 걸쳐 있으며, 동아시아에서 일시의 풍운을 몰고 왔었다. 그리고 중국, 일본, 한국과 문화교류를 하고 우호적인 왕래를 하는 교량의 역할도 하였다. 그래서 발해왕국의 수수께끼를 푸는 것은 7-10세기 동아시아 국제정치형국과 문화교류의 비밀을 푸는 열쇠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