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역사분석/중국역사의 재해석

진회(秦檜)는 사실 대충신이다.

중은우시 2007. 1. 29. 17:35

작자: 미상

 

진회(1090-1155)의 자(字)는 회지(會之)이고, 강녕(지금의 강소성 남경시) 사람이며, 진사출신이다. 북송때 밀주교수, 감찰어사, 어사중승을 지냈고, 남송때 이부상서, 참지정사, 재상을 지냈으며, 태사(太師), 위국공(魏國公)에 봉해졌다. 죽은 후에는 송고종(宋高宗)이 그를 "신왕(申王)"에 봉하고 시호를 헌충(獻忠)으로 내렸다.

 

이로써 볼 때, 진회의 송고종의 마음 속에서의 지위를 알 수 있다. 그는 송고종의 마음 속에서는 절대로 대충신이다. 수백년후의 현재는 그를 송나라의 매국노라고 욕하고, 금나라가 파견한 간첩이라고 하지만, 사실상 지금까지도 진회가 매국행위를 했다는 증거는 전혀 발견되지 않았고, 오히려 진회가 애국했다는 증거가 속속 드러나고 있다.

 

1126년, 금나라의 송나라의 수도 변경에 대한 급습은 성공을 거둔다. 금나라가 변경을 함락시키기 전까지 진회는 일관되게 항금(抗金)을 주장했고, 땅을 떼어주고 의화(議和)를 하는데 반대했다.

 

금나라의 압박에 따라, 송나라의 문무백관들이 장방창(張邦昌)을 괴뢰황제로 올리고자 논의할 때, 진회는 들고 일어나 반대했고, 조씨(趙氏)를 세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 결과 진회는 금나라에 포로로 잡혀간다. 진회의 이 행동은 인민들의 칭찬을 많이 받았다. 진회가 스스로 들고 일어나서 조씨를 황제로 모셔야 한다고 주장하지 않았더라면, 그는 포로로 잡혀가서 고통을 겪지 않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가 금의 괴뢰정부인 제(齊)에서 편안히 지내려고 마음먹었다면 충분히 그럴 수 있었을 것이다.

 

진회는 금나라에 도착한 후, 금나라의 원수 점한(粘罕)으로부터 존중을 받는다. 그는 치욕을 참으면서 송휘종(당시 송휘종과 송흠종은 금나라에 포로로 잡혀가 있었음)을 위하여 화해를 구걸하는 글을 써서 올린다. 이것도 충신으로서의 거동이라고 볼 수 있다(누가 이런 글을 쓸만큼 멍청하겠는가? 글은 남는 것이고 이런 글은 후세의 욕을 먹을 것이 뻔한데). 그후에 그는 금태종 완안성에 의하여 좌감군 완안창에게 하사된다. 금나라에 있는 동안 진회가 변절자로서의 행위를 보였다는 증거는 아무데도 없다. 1130년 완안창이 초주를 공격할 때, 진회는 기회를 틈타 도망쳐서 남송으로 온다. 진회는 그가 금나라의 자신을 감시하는 자를 죽이고 배를 버리고 왔다고 했다. 이 말은 안믿으면 그만이기는 하지만, 진회가 금나라에 투항하였다는 증거는 전혀 없고, 진회가 금나라에서 파견한 간첩이라는 것은 전혀 근거없는 낭설이다.

 

적에게 붙잡혔다가 도망쳐온 사례는 많다. 서한의 장건이 서역흉노의 수중에서 도망처 한나라로 돌아온 일이나, 송나라에도 신기질, 문천상등의 예가 있다. 송고종은 멍청한 임금이 아니었다. 송나라의 백관과 백성도 멍청하지 않았다. 진회는 주화파의 대표이기는 했지만, 주화파를 투항파라고 할 수는 없다. 주화파와 주전파는 문제를 보는 각도와 중점이라고 생각하는 면이 달랐을 뿐이다. 의화(議和)는 진회가 당시의 상황을 충분히 고려한 후에 내린 선택이었다.

 

송나라는 개국이래로 중국을 통일하는 것이 조훈(祖訓, 조상으로부터의 가르침)이었다. 이 점은 북송이건 남송이건 잊은 적이 없다. 단지 상대방의 군사력이 너무 강대하여 실현하지 못했을 뿐이다. 여러차례의 노력과 시험은 전혀 성공을 거두지 못하였다(중국을 통일하기 위하여 송나라는 야만족인 금나라와 연합하여 백년간 평화롭게 지내고 이미 한족의 문화에 동화된 요나라를 배신하였고, 다시 중국을 통일하기 위하여 송나라는 다시 더욱 야만한 몽고와 연합하여 한족문화를 배우는데 열중하던 금나라를 배신하였다)

 

송고종이 이제(二帝, 송휘종과 송흠종, 북송의 마지막 두 황제)를 데려오는 것을 두려워했다는 것은 주관적인 억측이다. 송고종 조구는 즉위조서에서 이미 두 황제를 데려오는 것을 국가정책으로 정했다. 두 황제를 데려오는 것은 송고종 조구가 제기한 것이다. 송휘종과 송흠종은 기본적으로 다시 황제를 하고 싶은 생각이 없는 사람들이었다. 휘종은 원래 황제를 하고 싶지 않아서 42세에 흠종에게 황제위를 물려주었고, 흠종도 금나라에서 조구에게 보낸 서신에서 자신은 돌아오기만 하면 평민으로 지내도 기쁘겠다고 말한 바 있다. 일찌기 나라를 한번 망하게 한 임금이 어찌 다시 임금의 자리에 오를 수 있겠는가. 고종이 두 황제를 데려오는 것을 겁냈다는 것은 성립되기 힘들다.

 

주화는 온건한 방법이다. 먼저 실력을 보전하고 힘을 기른 후에 다시 싸울 것을 기약하는 것이다. 주전은 모험적인 방법이다. 성공하면 실지를 회복하지만, 실패하면 나라와 사람이 다 망하는 것이다. 고종은 주화의 관점을 채택한 것인데, 이것은 당시의 사정을 충분히 고려한 후에 내린 온건하고 타당한 책략이었다.

 

진회의 관료로서의 생활도 그다지 순탄한 것은 아니었다. 평화협상의 길도 아주 험난했다. 금나라에도 주화파와 주전파가 있었다. 진회는 일찌기 승상의 직에서 파면된 적도 있었다. 1137년에는 송휘종이 타향에서 사망했다. 같은 해 송고종은 진회를 금나라와의 평화협상의 대표로 임명한다. 힘든 담판을 거쳐 1139년 진회의 노력하에 마침내 금나라와의 평화협정을 달성한다. 역사상 "소흥화의(紹興和議)"라고 부르는 것이다. 화의의 주요내용은 "송나라 황제는 금나라에 신하로 칭한다. 송나라는 매년 25만냥, 백25만필을 바친다. 금나라는 괴뢰 제나라 유예가 통치하는 하남, 섬서의 일부지역을 되돌려준다. 그리고 송휘종의 관과 송흠종, 그리고 황족들을 되돌려 준다." 이 협정을 보면 진회는 애국자이고 인민을 위한 공신이다. 첫째, 두 황제를 모셔온다. 둘째, 영토를 횝고한다. 비록 돈을 주고 신하를 자처해야 하지만, 와신상담의 고사를 생각한다면, 송나라는 언젠가 복수할 날이 있을 것이다(사실상 금나라는 송나라와 몽고의 연합에 의하여 멸망한다). 당시 사람들도 평화가 곧 올 것이라고 생각하고, 흠종이 곧 돌아올 것이라고 생각했다. 소흥화의를 체결한 후 송고종은 명을 내려 '연성황제궁전을 임안부에 짓도록" 지시한다. 만일 고종이 두 황제를 맞이하고 싶지 않았다면, 소흥화의때 협상과정에서 몰래 금나라에 그러한 뜻을 밝힐 수도 있었을 것이고, 두 황제를 모셔오는 조항을 빼버릴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사실은 그 반대로 소흥화의의 내용에 두 황제를 모셔오는 조항이 명확히 들어있는 것이다.

 

악비도 이 때 사직하고자 했고, 송고종에 상소를 올렸다. 그 내용은 "이제 평화협정이 다 잘 되고 있고, 두 황제와 황족들이 돌아올 날도 머지 않았다. 병사들을 쉬면서 시기를 기다려야 할 것이므로, 신이 사직을 청하는 것은 일을 회피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이제 태상황, 영덕황후의 관을 모셔오고, 흠종황제를 귀국시켜서 종묘가 다시 안정되니, 만백성이 모두 기뻐하고 폐하께서는 편안히 잠을 이루실 수 있게 되었으며, 북쪽에 대한 걱정을 하지 않으셔도 될 것입니다. 신이 바라던 바가 끝났습니다. 이후 밭으로 돌아가고자 합니다. 이것이 신의 바람입니다" 이러한 악비의 글에서 보더라도 이 평화협정에 대하여 악비나 대다수의 송나라 사람들은 무슨 매국조약이라고 보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람들은 진회가 여러해동안 노력해서 이루어낸 결과에 만족하고 있었던 것이다. 동시에 이것은 "두황제를 모셔오는" 것에 대하여 악비와 조구간의 모순이 있었던 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만일, 진회가 매국노라면, 그리고 이것이 매국조약이라면, 그것을 체결하는 것도 매국일 것이고, 백성들이 그다지 기뻐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역사는 무정하다. 진회는 천고명상이 될 수 없었고, 인민의 안중의 영웅이 될 수 없었고, 송나라의 최대공신이 될 수 없었다. 해가 바뀌면서 금나라에 정변이 발생하였다. 올술(兀術)정변은 평화협정을 파기하기에 이른다. 올술은 송흠종을 풀어주지 않으면서, 이후 군사행동이 실패했을 때의 방패막이로 활용하고자 한다. 금나라 사람들은 송흠종이 황제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남송의 송고종과 대립시켰다. 그리하여 흠종으로 하여금 변경에 있도록 하면서 형제간의 싸움을 하도록 부추긴다. 금나라는 변경의 백성들에게 "너희 옛 주인이 다시 돌아와서 강산을 주재한다"고 하였다. 올술은 흠종을 히든카드로 하여 송고종과 싸우려고 한 ㄱ서이다. 금나라에도 주화파와 주전파가 있었는데, 올술은 주전파였다. 금나라는 주전파가 정권을 장악한 후, 금나라 병사가 대거 남하하기 시작한다. 전쟁은 다시 악비를 영웅으로 만들었다. 당시 쌍방의 국력소모는 비슷한 정도로 심했다. 비록 악가군은 승리를 거두었지만, 다른 송나라 군대는 모두 패배했다. 그리고 악가군의 손실도 아주 엄중했다.

 

악비의 죽음은 시대의 비극이다. 그리고 그 개인의 비극이기도 하다. 시대의 비극이라는 것은 당시의 현실환경과 조건에서 그의 영웅적인 뜻을 실현할 수 없었다는 점이다.악가군이 비록 잘 싸우지만, 결국은 한계가 있다. 금나라는 대량의 기병이 주력이어서, 보명위주의 남송군대는 자기지역에서는 금나라의 정예기병과 싸울 수가 있었다. 그러나, 멀리 원정을 가서 싸우기에는 준비가 불충분하다. 금나라의 국경안으로 들어가서 금나라의 기병과 싸우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이전에 송태종은 두 차례 요나라를 정벌하려한 경험이 있는데, 모두 실패했다. 이후 송나라 군대는 준비가 불충분한 상태에서 대거 북진하다가 실패했다고 분석하게 된다. 그의 주전주장은 당시 인민의 바람이나 국가의 정책과 충돌했다.

 

개인의 비극은 그 개인의 성격탓이다. 악비는 일을 열심히 하지만 사람관계를 잘 처리하지는 못했다. "군인은 명령에 복종하는 것이 천직이다"라는 원칙을 지키지 않았다. 연속하여 12번의 명령이 내려오고서야 비로소 그는 황제의 지시를 들었다. 이것은 연속 11번 거부했다는 것이다. 성지를 듣지 않는 것은 조구와 대항하겠다는 것이다. 악비는 바로 조구가 발탁한 장수이다. 양양대첩이후 황제 조구와 재상 장준은 악비를 매우 중시한다. 그리하여 유세광의 병권을 해제한후 이 부대를 악비에게 준다. 그리고 어찰에서도 국가의 치욕을 씻고, 해내의 곤궁함을 해결할 중책을 악비에게 맡긴다. 악비가 싸움에서 이기고 나서 스스로 교만하고 눈에 아무 것도 보이는 것이 없이 행동하고 황제에 대하여도 함부로 한다면, 그것은 어느 황제도 참지 못할 것이다. 1137년, 악비는 일찌기 황태자에 관련되는 일을 아뢴 적이 있다. 악비는 장수로서 조정의 황태자문제에 개입한 것이다. 악비 그 자체만으로도 송고종의 지위에 위협이 될 수 있는데, 군대를 거느린 장수가 태자문제에 간여하는 것은 무장의 본분을 많이 벗어난 것이고, 조구로서는 그를 위협적이라고 느끼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하나 설명할 일은 진회는 악운의 생명을 구해주고자 했다는 점이다. 형부대리시의 명의로 올린 글에 악운의 생명을 보전시키도록 적은 것이다. "악비의 죄는 참하고, 장헌의 죄는 교살하고, 악운의 죄는 유배보내는 것"으로 적었다. 그러나, 성지에 의하여 모두 참하는 것으로 결정난다. 송나라에서 황제가 신하를 죽이는 사례는 아주 드물다. 특히 악비와 같은 조정의 중신을 참하는 것은 더욱 그렇다. 황제의 허가가 없이는 진회는 악비를 전혀 죽일 수가 없을 것이다. 악비의 죽음에 진회가 책임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종범의 혐의밖에는 없는 것이다. 누가 재상이 되어 악비사건을 다루었더라도 결과는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진회는 백성의 좋은 승상이고, 악비도 백성의 좋은 장군이다. 주전파와 주화파는 완전히 대립하는 두 파가 아니었다. 주전파는 애국하는 것이라면, 주화파도 애국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의 출발점이 다르지만 모두 애국하는 것이다. 진회는 원래 매국노가 아니다. 더구나 금나라가 파견한 간첩은 아닌 것이다. 진회는 평화협상을 담판하는 외에, 근본적으로 남송을 팔아먹는 행위를 한 것이 없다. 그리고 남송에 금나라의 정치, 경제, 문화체계를 도입하려는 일은 전혀 하지 않았다. 진회는 망가진 송나라에 재생의 기회를 마련해주고, 송나라 인민들에게 평화와 부유한 생활을 백년이상 하도록 해주었을 뿐이다. 결국 송나라는 피의 복수를 한다. 몽고와 연합하여 강대한 금나라를 멸망시킨 것이다.

 

악가는 조부가 진회에게 해를 입어 죽었다는 설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악가는 야사의 기술과 글을 통해서 전혀 진정한 원흉 송고종 조구를 언급한 바 없다. 악비가 왜 민족영웅이 되었는지에 대하여도 그것은 삼대가 지난 이후에 발생한 일이었다. 송나라는 스스로 준비가 충분하다고 생각하여 대거 금나라를 토벌하고자 했다. 악비를 명예회복시켜 병사의 사기를 높일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조구는 황제이므로 희생양이 필요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진회를 희생양으로 삼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