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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분석/중국역사의 재해석

대명천자와 만청황제의 재평가

by 중은우시 2008. 6. 27.

글: 고종걸(高從杰)

 

명나라 황제에 대한 글을 여럿 보면 대체로 3부류로 나눌 수 있다. 첫째, 개국황제인 명태조 주원장, 명성조 영락제 주체에 대하여는 대체로 웅재위략(雄才偉略)의 황제로 인정한다. 둘째, 숭정제에 대하여는 대체로 그의 근정(勤政)을 인정하고, 끝까지 실패를 인정않고 고집스럽게 나가는 힘을 인정하고, 그가 마지막 경양종을 쳤을 때 대신중 어느 하나도 오지 않은 처참함을 동정한다. 망국의 군주들 중에서 그만큼 동정받고 긍정적으로 평가받는 경우는 드물다고 할 것이다. 셋째, 위의 두 유형을 제외하고 나머지는 모두 '엉터리'라는 모자를 씌워 버린다. 많은 사람들은 대명천자들 중에서 명태조, 명성조, 명사종의 세 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수십년간 정사를 돌보지 않고, 미복사방(微服私訪)을 하는 사람으로 표현되어 있다. 이것은 아주 재미있는 현상이다. 왜 명나라 황제에게는 부정적인 평가가 많은가? 한편으로는 <<명사>>는 청나라때 관부에서 만들었다. 여기에 숨은 의미는 자연히 말안해도 알 수 있을 것이다. 또 다른 한편으로 아마도 명나라역사에 대하여는 청나라 역사만큼 잘 알지 못하는 것도 있을 것이다. 많은 청나라궁중을 배경으로 한 드라마 영향으로, 청나라의 황제는 모두 온문유아(溫文儒雅)하며, 백성을 자식처럼 사랑하는 것으로 인식되고 있다. 두 측면을 대비해보면 명나라는 말도 안될 정도이다.

 

청나라황제가 좋은지 나쁜지는 잠시 제쳐두자. 왜냐하면 문자옥의 영향으로 역사는 완전히 그들이 마음대로 썼기 때문에, 그들의 이미지는 대부분 왜곡되었고, 진실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하나 설명하려면 너무 힘이 든다. 여기에서는 말이 나온 김에 한 가지만 얘기하자. 명청양조의 황제에 대하여 역사를 전공하지 않은 독자들의 마음 속에 아주 큰 영향을 미친 대가가 있다. 바로 김용(金庸) 선생이다. 그는 "녹정기"에서 강희의 위소보에 대한 말의 형식으로 명청양대 황제에 대하여 평가하고 있다. 그의 눈에, 대명천자는 좋은 사람은 하나도 없다. 태조 주원장으로부터 마지막 숭정제에 이르기까지. 그의 독자들이 그렇게 많은데, 이로 인하여 그들의 관점에 영향을 받은 경우도 적지 않으리라고 본다. 당연히 이것이 김용의 책임이라고만 할 수는 없다. 어쨌든 그는 무협소설작가이고, 역사학자는 아니기 때문이다. 나의 뜻은 많은 사람들이 야사를 정사인 줄 혼동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건륭이 미복사방을 하는 것이 있는데, 나는 감히 나의 컴퓨터메인보드를 걸고 맹세할 수 있다. 그는 평생 한번도 미복사방을 해본 적이 없다. 설사 화꾸냥(花姑娘)을 위하여라 하더라도, 그가 문을 나서려면 최소한 5,6천명이 그의 곁에 따라다닌다.

 

이제 주제로 돌아가서 내가 괜찮다고 생각하는 명나라 황제들을 얘기해보자. 나도 사서를 들춰본 적이 있지만, 지금 얘기하려는 대부분은 머리 속의 기억이다. 만일 빠진 것이나 착오가 있다면 나를 뭐라고 하지 말라. 나는 정통적인 역사연구자가 아니라. 그저 조금 아는 사람에 불과할 뿐이기 때문이다.

 

명성조이후에 명인종이 있다. 그를 왜 인종이라고 했는가? 바로 이 "인(仁)"이라는 글자가 중요하다. 그의 일생은 그의 당숙인 전태자 주표(朱標)와 아주 비슷하다. 그의 형제들도 그의 숙부들과 마찬가지로 계속 황위에 대하여 욕심을 부렸다. 그리고 그는 항상 따지지 않았다. 형제들의 나쁜 행위가 드러난 이후에는 그가 나서서 좋게 얘기해주곤 하였다. 물론 그가 이렇게 가장했을 수는 있지만, 그랬다고 보기에는 횟수가 너무 많다. 나의 기억속에 그는 최소한 동생인 한왕과 조왕을 위해서만도 몇번이나 황상에게 부탁을 했다. 그는 여러번 남경과 북경을 오가면서, 여러번 백성들의 집에서 식사를 했고, 백성들이 아주 힘들어하고 먹는 게 형편없으니 관리들이 좀더 백성들을 잘 대해주라고 말했다. 이것은 야사가 아니라 정사에 나오는 말이다. 만일 개인능력으로 말한다면, 그의 부친 성조 영락제가 이경륭과 결전을 벌일 때, 그는 적은 수의 병사를 데리고, 수십만 북경민중을 조직하여 수성에 나섰고, 성공적으로 총본부인 북경성을 지킬 수 있었다. 만일 용기와 지혜를 말하자면 그는 다른 어느 청나라 황제에도 못지 않다. 그러나 너무 일찍 죽었다. 즉위한 지 1년만에 죽은 것이다.

 

명인종의 아들이 선종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조부 영락제의 총애를 받았다. 영락제는 그가 자신을 닮았다고 생각했다. 확실히, 그는 용기있고 결단력있는 황제였다. 그의 숙부인 한왕은 명성이 높았다. 부친인 영락제를 따라 정난지역에 가담하고 수없는 전투를 치렀다. 그러나 한왕이 모반의 기치를 내걸었을 때, 선종은 신속히 친정을 하여, 1개월도 안되어 난을 평정했다. 조왕도 계속 황위를 노렸다. 그러나 나중에 그 생각을 버린 후에, 선종은 그를 괴롭히지 않았다. 선종은 영락제를 뒤이어 몽고를 친정(親征)한 황제이다. 그는 대명 "영선성세(永宣盛世)"를 이루어냈다. 친정에 관하여 말하자면, 순치제를 생각하게 된다. 정성공이 북벌한 후에 먼저 놀라서 어쩔 줄을 모르고, 두려워서 동북의 옛땅으로 되돌아가려고 하였따. 그 후에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되자, 화가나서, 남원에서 열병하며 친정하겠다고 말한다. 그러다가 효장태후가 극력 말렸다. 내 생각으로 그가 친정했다면 아마도 일을 망쳤을 것이다.

 

명영종은 수천년간 내려온 순장(殉葬) 제도를 폐지한다. 이 점만으로도 그는 존경받을 만하다.

 

명효종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황제의 하나이다. 명나라뿐 아니라, 중국역사상 어느 황조를 같이 놓고 보더라도 그의 평가는 아주 높을 수밖에 없다. 그는 18세에 등극하는데, 신하의 누구 하나도 정장(庭杖, 매를 치는 것)한 바 없다. 당시 문관의 말을 빌리면, 수천년의 악습이 일거에 폐지된 것이다. 그는 각신(閣臣)들에게 '선생(先生)'이라고 칭했지 이름을 부르지 않음으로써 존중함을 표시했는데 이것도 그로부터 비롯한다. 그는 평생 오로지 황후는 1명만 두고, 다른 비도 두지 않았으니, 황제로서는 유일하게 일부일처제를 실행한 인물이다. 인품은 더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어릴 때부터 그는 고생을 많이 하고 자란다. 6세이전에는 그의 모친이 길렀기 때문에 친족의 정이 깊었다. 여러번 외조부의 집을 찾아가서 그의 부친이 남긴 비빈들에게 효성을 다해서 모셨다. 사람을 잘 써서, 수하에 이름난 신하가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그리고 직언을 한다고 하여 벌을 내린 바가 없다. 그가 죽은 후 대신들중에는 곡을 하면서 졸도한 사람이 많았을 정도이다. 치적은 그의 통치연대를 "홍치중흥(弘治中興)"이라고 부른다는데서 알 수 있을 것이다.

 

이런 황제가 다 있었던 것이다. 사업에 성공하고, 부모에 효도하고, 다른 사람들과 잘 지내고, 한 여인만을 사랑하고, 전해지는 바로는 인물도 잘 생겼다고 한다. 그러니 누가 그를 좋아하지 않겠는가?

 

명나라 만력제는 일본을 무찌른 공훈이 혁혁하다. 그는 비록 수십년간 조회를 보지 않았지만, 당시의 명나라는 내각제로 황제가 조회를 보지 않아도 굴러갈 정도였다. 영국의 여왕처럼. 그러나, '국본(國本, 태자)'논쟁을 보자면, 그는 문인사대부의 의견을 존중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청나라에서 어떤 일도 황제가 마음대로 독단적으로 처리한 것과 비교하자면 민주로 엉망이 되었다고도 할 수 있다. 그리고 아들과 손자를 데리고 함께 나와 대신들에게 집안이 화목하다는 것을 보여주기도 하였으니, 청나라때 후계자는 황실의 집안일이지 국가대사가 아니었던 것과 도저히 같은 반열에서 논할 수가 없다.

 

명헌종 성화제는 그림을 잘 그렸다. 청고종의 십만수에 이르는 엉터리 시보다는 훨씬 낫다. 명경제는 우겸을 발탁하여 나라를 위기에서 구해낸다. 이것도 쉬운 일은 아니다.

 

명나라는 아주 뼈대가 있는 왕조였다. 이 때의 중국인은 세계에서 상당한 지위를 누렸고, 절대 무시당하지 않았다. 명나라의 마지막 황제인 숭정제는 죽어도 뼈대는 살아있었다. 나라와 함께 순국한다.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 부의가 구차하게 일본에 신하를 칭하면서 살아남은 것보다는 훨씬 낫다.

 

여기까지 말했으면 충분한 것같다. 다만 그래도 못다한 말은 몇 마디 덧붙였으면 한다.

 

왜 사람들은 청나라황제의 자질이 명나라황제보다 낫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사실 만력제도 수성의 군주이다. 그의 치하에서 대규모 농민반란은 없었다. 인민은 그의 통치하에 살아가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거기에 조선을 원조하여 풍신수길을 무찔렀다. 청나라 가경제에 비하여 전혀 손색이 없다. 가경제는 백련교의 난이 있었고, 천리교가 자금성을 공격하는 사건이 있었다. 이처럼 국가에 아주 나쁜 영향을 끼치는 대규모의 농민반란이 일어난 것이다. 우리는 알고 있다 어느 봉건왕조더라도 일정한 단계에 이르면 필연적으로 내리막길을 걷게 된다는 것을, 이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다.

 

우리는 다시 만력과 가경이 조정을 장악했을 시대를 살펴보자. 그러면, 그들이 모두 국가가 성세에서 쇠퇴로 전환되는 시기에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만력이 한 일이 가정보다 못했는가? 필자 개인의 생각으로는 조금도 못하지 않았다. 수십년간 조정을 돌보지 않은 기초가 무엇인가? 그것은 안정이었다. 황제가 문인사대부집단을 신임한 것이었다. 그래서 만력은 가만히 있으면서도 통치할 수 있었다. 청나라는 분명히 그렇지 않았다. 황제가 하루라도 정사를 돌보지 않으면, 아무도 신경쓰지 않았다. 부항(傅恒)은 여러분이 모두 알고 있을 것이다. 바로 그는 군기대신으로 모든 일을 절대 마음대로 결정하지 않았던 청나라 명신의 전형과 같은 인물이다. 그래서 청나라의 황제는 반드시 친히 관리해야 했다. 반드시 황권과 상권을 그 혼자서 다 감당해야 했따. 그들은 보기에는 열심히 한 것같지만, 실제로 청나라 황제들은 평범한 사람이 많았다. 영명한 군주라고 할 만한 사람은 없다. 가경, 도광부터, 함풍, 동치 그리고 개혁을 생각했던 광서까지 그들은 거의 모두 평범한 사람들이다.

 

그들이 뭔가. 나 개인의 생각으로는 그들은 전형적인 농촌지주형이다. 심지어 지주의 마름이라고 할 수 있다. 입만 열면 조상의 유훈이 어떻고, 아주 우매하였다. 명나라황제는 외교를 모르고 개방을 몰랐다. 그래도 천주교가 궁중으로 들어오는 것도 허용했다. 그러나 청나라황제는 천고일제라는 강희도 배들이 바다로 나가지 못하게 막고, 전도사가 전도하는 것을 막았다. 그 자신은 약간 서학을 알았지만, 조금도 보급할 생각은 없었다. 이렇게 보면 재미있지 않은가? 백성들은 우매하게 두겠다는 것이 아닌가?

 

청나라의 강건옹 세 황제에 대하여 그들을 비판할 생각은 없다. 그러나, 나는 그래도 명태조, 명성조, 명인종, 명선종, 명효종의 여러 황제가 그들보다 못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여기서 이편개전(以偏蓋全, 편면을 가지고 전체를 가리는 것)의 현상을 보게 된다. 명나라황제를 말하면, 대부분 그들이 잔폭(殘暴), 상무(尙武)를 떠올린다. 그러나 좀 생각해보라. 청나라황제들은 왜 언관을 때리지 않았는가? 그것은 때릴 필요가 없었고, 때릴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문인들이 모두 노재(奴才)로 전락한 상태에서 명나라처럼 "의대례(議大禮)", "쟁국본(爭國本)"의 논쟁은 청나라에서는 아예 발생할 여지가 없었던 것이다. 언관은 기본적으로 말을 할 수 없었고, 그저 장식품에 불과했다. 그렇다면 황제의 잘못을 얘기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게 되고, 자연히 영명한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입에서 나오는대로 썼으니, 전문가들께서 웃지는 말았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