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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분석/중국역사의 재해석

문사계(文士界)의 “포청폄명(褒淸貶明)”현상

by 중은우시 2006. 11. 13.

 

문사계에서 상용의 수법은 청나라의 악정에 명나라를 끼워넣는 것이다. 예를 들어 문자옥(文字獄)을 얘기할 때는 명청문자옥이라고 얘기한다. 실제로 명나라때의 문자옥은 주원장이 집권한 홍무17년에서 29년의 겨우 13년에 불과한 짧은 기간이었다(오함의 <<주원장전>>). 그리고, 이것은 주원장 본인의 기휘에 관한 것이었다. 관련된 사람도 주로 수십명의 문신에 불과했고 무슨 사회운동으로까지 발전하지는 않았으며, 영향을 미친 범위도 매우 좁았다. 명나라의 근 300년의 역사에서는 거의 중요한 역할을 하지 않은 것이다. 그런데, 홍무문자옥으로 부르지 않고 그냥 명청문자옥으로 칭하는 것일까? 청나라는 강희,옹정,건륭의 3 134년동안  일으킨 문자옥은 철저한 정치운동이었고, 관련된 사회계층도 매우 광범위했다. 대신, 지식분자에서 미친 자에 이르기까지 모두 화를 면하지 못했다. 관련된 내용도 상당히 광범위했다. 정치, 윤리, 예술에서 종교, 과학기술에 이르기까지, 인류문명에 대한 궁형이었다. 중화문명의 진보에 있어서 전대미문의 파괴작용을 하였다.

 

다음으로 폐관쇄국(閉關鎖國)을 놓고 보자. 역시 명청을 함께 언급하고 있다. 여기에는 몇가지 깊이 살펴보아야 할 점이 있다. 명나라때의 해금(海禁)은 언제 시작해서 언제 끝났는가? 해금을 쇄국으로 볼 수 있는가? 해금의 목적은 무엇인가? 계속적인 것인가 아니면 특수시기에 행해진 것인가? 상업거래를 금지시긴 것과 문화교류를 금지시킨 것을 동일하게 취급할 수 있는가? 명나라때에도 청나라때와 같이 문화교류를 금지시켰는가?

 

사실을 보면 명나라와 청나라를 쇄국의 관점에서 같이 취급할 수는 없다. 명나라때는 그저 해금을 하였을 뿐이지, 폐관쇄국을 한 것은 아니다. 해금의 목적은 왜구를 방어하기 위한 것이다. 일단 위협이 해제되면 더 이상 해금하지 않았다. 그러나, 청나라의 해금의 목적은 한인이 해외와 사통하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이었다. 명나라때의 해금은 그저 대일무역만을 금지시켰고, 서양무역은 제한하지 않았다. 문화교류와 전파에서도 명나라는 엄격하게 제한하지 않았다. 마테오 리치가 초기에 박해를 받은 것은 당시 서방식민주의자들이 중국에 무력침입을 시도한 후에 온 중국정부의 본능적인 반응이었다. 그러나, 그가 다른 사람들로부터 평화의 사자로 인식된 후에는 행동과 전도에서 큰 자유를 얻었다. 청나라는 정반대였다. 청나라는 서양문명이 전파되는 것이 그들의 통치를 위협한다고 보았기 때문에 전도를 금지시켰던 것이다.

 

다시 동서방문화교류에 대하여 언급하면, 문사계는 명말청초의 서학동점을 같이 언급하고 있다. 이런 방식은 마치 서학이 종지되고 쇠락된 것이 마치 자연발생적인 과정인 것처럼 보이게 하는 것이고, 전통유학의 방해에 따른 필연적인 결과로 보여지게 하는 측면이 있다.

 

서학동점은 명나라에서 흥기하여 청나라때 쇠망하였다. 명나라때의 서방문명은 주로 선비, 지식분자들이 전파하였다. 그러나, 청나라 입관후에는 그저 궁중에 국한된다. 건륭시기에 서양의 과학기술은 모두 건륭의 놀이개로 바뀌고 만다. 성격이 완전히 다름에도 합쳐서 평가하는 것은 이상하지 않은가.

 

서학동점의 일대성과는 숭정황제가 진행한 숭정역서의 성공이다. 이 점은 역사학자들이 잘 언급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 강희제가 신역법(바로 숭정역서)로 구역법을 대체한 것은 찬양하고 있다. 마치 강희가 바로 서양문명을 받아들인 대영웅인 것처럼. 역사학자들에 의하여 잊혀진 숭정역서는 깊은 궁에 갇혀 버리게 되었다. 영국의 사신 스탠튼은 듣기로 중국의 몇몇 군주는 외국전도사로부터 외국의 풍부한 수학지식을 배우고 있다. 그러나, 중국정부의 정책은 이들 학문을 백성들에게 보급하지 않고 있다. 그들은 수학지식이 보급된 후에 사람들이 일식, 월식을 계산할 수 있고, 월력을 만들 수 있게 되면 황제의 백성에 대한 위신이 깍인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런 두개의 왕조가 하나는 봉쇄적이고 하나는 개방적이라는 점이 여기서도 드러나지 않는가. 왜 중국의 문사계에서는 이런 점을 언급하지 않는가?

 

문사계에서 만력황제에 대한 평가는 계속하여 아주 낮았다. 만력제를 비난하는 이유는 만력제가 20년간 조회(朝會)를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환관으로 하여금 광산감독등을 맡게 하여 재물을 끌어모았다는 것등등이다. 이 두가지 문제도 우리는 구체적으로 분석해볼 필요가 있다. 만력제가 조회를 보지 않은 주요한 원인은 황권과 문관제도간에 극렬하게 충돌이 있었기 때문이다. 황권이 압박을 받았고, 만력제는 소극적으로 항거한 것이다. 그러나, 두 가지 점에서 만력제는 긍정적인 평가를 받아야 한다. 하나는 만력제는 대신과 의견출돌이 있었고, 심지어 대신들이 황제와 귀비를 욕했지만, 한 명도 죽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둘째는 조회는 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일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만력년간의 주요한 국가대사는 모두 만력제가 처리했다. 큰 것은 예를 들어 만력의 삼대정벌전쟁이 있다. 특히 조선의 임진왜란때의 파병은 계속하여 만력제의 지휘하에 진행되었다. 적게는 마테오리치의 북경에서의 전도, 교회건립, 묘지도 모두 만력제의 지시하에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서방전도사들은 만력제에 대하여 존경과 호감을 지니고 있었다. 동서문명의 교류에 만력제의 역할을 상당히 컸다.

 

다음으로, 환관을 보내어 광산감독을 한 점에 있어서, 세무관리감독관이 재산을 긁어모으는 것은 당연히 좋지 않은 면이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분석해볼 필요는 있다. 광산감독의 출현은 만력제의 명에 따라 천하에서 광산을 열 수있게 되면서 부터이다. 처음의 뜻은 백성들과 이익을 다투려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환관들이 가서 일을 하면서 엉망으로 만들었고, 이러한 폐정이 4년정도 계속되었다. 4년후에 만력제는 궁중에서 환관을 파견하는 일을 중단하였고, 그러나, 광금은 확실히 취소되었다. 이로부터 자본주의경제의 맹아가 발전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각국의 역사상 봉건국가가 공상업의 과대한 이윤을 박탈하는 것은 항상 볼 수 있다. 명나라황조는 명목을 세워서 세율을 올렸던 것이다. 한무제시기처럼 상인들은 재산의 절반을 관부에 바치도록 하는 것과 같은 일은 하지 않았다. 그러나, 명나라때 공상업은 이미 상당히 강한 사회적 역량을 지니고 있었고, 대규모의 광산감독에 반대하는 항거가 계속 발생했다. 적절한 충돌과 모순은 오히려 그 성장과 발전에 도움이 된다.

 

만일 만력황조를 스크린에 올려놓는다면 우리는 이 황조에 대하여 완전히 새로운 인식을 가지게 될 것이다. 이것은 파란만장한 시대였다. 그의 역사적인 의의는 강건성세(康乾盛世)보다 훨씬 중요하다. 왜 만력시대에 대하여 명예회복을 시키지 않는가?

 

명청황제의 비교는 문사계에서 자주 쓰는 장안법(障眼法, 눈을 가리는 수법)이다. 역사인물의 역할을 평가할 때는 먼저 역사상 어떤 작용을 하였는지를 따져야 한다. 그러나, 현재의 황제비교는 엘리트주의의 영향을 너무 크게 받았다. 황제 개인의 자잘, 개인의 품성과 능력을 비교하기를 즐긴다. 배가 방향을 잘못 잡으면 아무리 기술이 뛰어나고, 부지런한 선장이 이끌더라도 배는 목적지에서 계속 더 멀어지게 되는 것이다. 강희, 옹정, 건륭의 삼대에 걸친 근정(勤政)는 그저 문자옥, 우민정책등등의 악정을 철저하게 집행한데 지나지 않는 것이다.

 

개인자질을 비교한다고 하더라도, 두 시대의 서로 다른 역사적 조건을 감안해야 한다. 예를 들어, 명나라때는 완비되지 않은 문관제도이다. 민본주의적인 의식이 주류의식을 점한 상태였다. 그러나, 청나라는 부족통치이다. 절대적인 군주독재이다. 황제의 권리가 완전히 달랐다. 동일한 출발선이 아니었다. 명군과 혼군의 문제는 문사계가 고의로 청나라를 높이고, 명나라를 폄하하는 수단이었다. 이것을 기준으로 명나라의 혼군과 청나라의 명군을 본 것이다.

 

문사계에서 명청을 같은 반열에 놓고 설명하는 것은 황당하다. 그 근원은 소위 청습명제(청나라는 명나라의 제도를 계승했다)이다. 실제로 명나라는 불완전한 문관제도였고, 청나라는 부족통치였다. 둘은 정치제도가 완전히 달랐다. 의식형태도 아주 거리가 멀었다. 명청을 병렬시키는 것은 근본적으로 잘못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