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광제 주유숭(朱由崧)은 어느모로 보나 망국지군(亡國之君; 나라를 망친 군왕)의 전형이었다. 혼용무능(昏庸無能, 멍청하고 능력이 없음)과 목광단천(目光短淺; 안목이 좁고 짧음)으로 정평이 나 있는 사람이다. 손가망(孫可望), 정성공(鄭成功)과 같은 병사를 이끌고, 영웅적인 기질이 있던 사람은 비교할 수는 없겠지만, 같은 남명의 군주였던 융무(隆武), 노감국(魯監國)등과 비교하더라도 손색이 많았던 사람이다.
주유숭의 신세내력은 아주 대단하다. 즉, 만력제에 의하여 후계자로 낙점될 뻔했던 바로 그 복왕(福王) 주상순(朱常洵)이 그의 부친이다. 1617년, 10살된 주유숭은 먼저 덕창군왕(德昌郡王)에 봉해졌다가, 나중에 세자(世子)에 봉해진다. 원래는 부친과 마찬가지로 비단 옷에 산해진미를 먹으면서 일생을 걱정없이 마칠 수 있는 입장이었으나, 생각지도 못하게 이자성이 낙양을 함락시킨 후 복왕 주상순의 목숨을 거두어갔다. 주유숭은 모친 추씨(鄒氏)와 겨우 목숨을 건쳐 도망쳤으며, 비록 부친의 복왕(福王)이라는 왕호는 물려받았지만, 당시는 천하가 어지러워서 주유숭은 낙양에 자리를 잡을 수도 없어, 사방을 떠돌아다녔다. 몰락한 왕손으로 권력자들의 눈에는 거지와 같이 보였을 것이다. 그러나, 이 몰락한 왕손이 천운을 타고나서 시대가 한번 바뀌자 황제에 까지 오르게 될 줄은 누가 알았을 것인다.
1644년 3월 19일, 숭정제가 매산에서 목을 매어 자살했고, 이것은 대강남북의 명나라 신하들에게는 청천벽력이 아닐 수 없었다. 일이 이지경에 이르자 원래 유명무실했던 남경유도(南京留都, 영락제가 북경으로 천도하면서 주원장이 명을 건립했던 남경에도 유명무실하지만 조정을 따로 두었었다)의 역할은 두드러질 수밖에 없었다. 이들의 첫번째 임무는 바로 새로운 황제를 세우고, 정권을 재조직하는 것이었다. 혈통으로 따지자면 당시 복왕(福王), 계왕(桂王), 혜왕(惠王)이 제1순위였다. 복왕이 황제로 옹립된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째, 복왕이 이들중 나이가 가장 많았다. 둘째, 그는 당시 사방으로 유랑하면서 남경에서 가까운 회안(淮安)에 와 있어서 남경에서 모시기 가장 편리했다. 멀리 광서쪽에 있는 다른 두 왕보다는 이런 면에서 조건이 좋았던 것이다.
다만, 복왕을 황제로 모시는데는 어려움도 많았다. 가장 큰 것이 강남의 선비들 중에서 일부 동림당은 편협한 이기주의적인 입장에서 출발하여 복왕이 무능하다는 이유로 결사반대했다. 그 원인을 거슬러 올라가면 천계제때 노복왕 주상순의 모친인 정귀비가 정권에 간여하였고, 이 때 정귀비와 동림당은 원수지간이 되었다. 주유숭이 등극한 후 그 때의 일을 다시 들먹일 수 있다고 보다, 동림당의 영수였던 전겸익(錢謙益)등은 현군(賢君)을 모셔야 한다는 이유를 들어 노왕(潞王)을 모시자고 주장하였다.
노왕은 그러나 혈통이 너무 멀었으므로, 황제에 오르는데는 약점이 있었다. 그러나 그는 현명한 사람으로 이름이 있었고, 많은 사람들의 동정과 지지를 받고 있었다. 지금까지도 남명을 위하여 노왕을 남명의 황제로 모시지 못한 것에 대하여 유감스럽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노왕이 현명하였는지 아닌지는 별론으로 하고, 봉건왕조는 적장자의 승계제도를 명확히 하고 있었으므로, 자연히 현실적으로 생각해야 했다. 당시 정치는 내각이 책임지므로, 황제가 무능하다고 하더라도, 책임지는 신하는 여전히 정치기구를 정상적으로 운영할 수 있었다. 국면으로 보아, 당시 남경에 있던 명나라 유신들에게 필요한 것은 정신적인 형식상의 지도자였지, 능력이 뛰어난 현군은 아니었을 것이다. 역사상 동진을 이끈 사마예도 그저 유약하고 무능한 인물에 지나지 않았지만, 신하들이 합심하여 위기국면을 잘 이끌었던 것이다. 만일 현명함을 따져 노왕을 세우고, 복왕을 밀어낼 수는 없었다. 왜냐하면 명나라 종실의 인물들은 전국각지에 흩어져 있었는데, 그렇게 되면 모두 황제의 자리에 욕심을 냈을 것이기 때문이다. 노왕을 세울 수 있다면 누군들 황제가 되지 못하겠는가? 그들이 전국에서 가장 뛰어난 자를 황제로 삼으려고 한다면 결국 야심가들이 틈을 타고 끼어들어서 남명의 국면은 와해되고 말았을 것이다.
남경에서 복왕을 황제로 옹립하려는 행사를 거대하게 벌이고 있을 때, 멀리 회안에 있던 복왕 주유숭은 좌불안석이었다. 3명의 가장 가능성있는 후보자중의 하나이지만, 아무도 그의 입장은 물어보지 않았다. 그에게 와서 충성을 맹세하거나 의탁하는 사람도 거의 없었다. 이것들은 모두 주유숭으로 하여금 상황을 비관적으로 보게 만들었다. 실제로 사가법, 마사영등 남명의 중신들은 처음부터 그들이 옹립하는 황제는 허수아비로 할 생각이었다. 누가 황제가 되든지간에 중요한 것은 그들이 장악한 권력을 빼앗아가서는 안되는 것이다. 마음 깊은 곳에서 일찌기 위풍당당한 황제는 이런 중신들에게 하나의 상징이고 하나의 진열일 뿐이었다. 사가법이 제출한 복왕을 황제로 세울 수 없다는 7대이유중 하나가 바로 "정치에 간여한다"는 것이었다. 그렇다. 당시 중신들이 가장 꺼리는 것은 황제가 정치에 간여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생각지도 못하게 멍청하고 무능하게 생각되었던 복왕 주유숭이 아주 뛰어난 조치를 하나 취하고, 남경성내의 여러 신하들도 어쩔 수 없이 그를 황제로 모시게 된다. <<남도록>>의 기재에 의하면 "그 때 주유송이 듣고, 황제에 오르지 못할까 걱정하였다. 글을 써서 남쪽으로 도망쳐 와 있던 총병(總兵) 고걸, 황득공, 유량좌로 하여금 그를 모시게 하도록 한다. 유양좌는 교활하여, 먼저 노왕을 모시기로 모의하였으나, 병력이 모자라는 것을 깨닫고 고걸등의 뜻에 따랐다" 주유송은 이때부터 '권력은 총부리에서 나온다'는 진리를 알았던 것같다. 직접 강북의 삼진을 지키고 있던 세 명의 총병에게 구원을 요청하였던 것이다. 고걸, 황득공 봉인은 원래 야심이 큰 군벌이었고, '황제옹립'이라는 큰 장사는 이문이 남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것은 돈한푼 들이지 않고 나중에 많은 이득을 볼 수 있는 기회라 생각하고, 바로 그들의 직접 상사인 봉양총독 마사영을 제치고 복왕을 황제로 모시는 조치를 취한다. 이 소식이 남경에 들려오자 모두 대경실색을 한다. 마사영은 관료사회에서 굴러먹은 사람이라 부하들이 이미 반기를 들었으니 어쩔 수 없다고 보고, 급히 주유숭에게 자신도 뜻이 같음을 알린다. 이리하여 문신들 중에서 가장 먼저 주유숭을 모신 사람이 된다.
사가법은 처음에는 어떻게 진행되는지 잘 모르고 있었으며, 그에 따르지 않겠다고 하였으며, 다시 마사영에게 편지를 써서 주유숭은 멍청해서 안된다고도 하였다. 그러나, 이미 마사영도 군사력에서 밀려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 마사영은 대군을 이끌고 살기등등하게 주유숭을 남경포구까지 호송한다. 대세가 이미 기울었으므로, 사가법과 동림당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이 현실을 받아들였다.
주유숭이 삼진군벌의 옹립을 받은 것은, 이후의 국면변화에 중대한 영향을 미친다. 가장 직접적인 작용은 주유숭이 황제에 오른 것이고, 간접적인 결과는 이 삼진군벌은 강북에서 발호하고 전혀 남경정부의 명을 황제가 되건 누가 되건 듣지 않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때부터 남명은 군벌이 발호하는 상황으로 접어든다. 사실, 고걸과 황득공, 유양좌등은 모두 군인출신의 무부들이고, 그 부하들 중에서도 뛰어난 장수들이 많았다. 아쉬운 것은 주유숭에게 명태조, 명성조와 같은 권모술수가 있었다면, 그가 옹립될 때 이들 삼진의 군벌을 완전히 자기편으로 만들 수가 있었다. 그러나, 주유숭은 그 부친의 뚱뚱한 몸매와 넉넉한 마음만을 물려받았지, 무슨 웅심은 없었다. 이 삼진의 총병들에게 황제의 자리를 부탁한 것만도 그로서는 아주 놀라운 수완을 발휘한 것이었고, 황제가 되고 싶은 마음이 너무 절실하여, 가격을 높게 주고 스스로의 가치를 깎았다. 그리하여 삼진의 총병은 홍광제를 아두(阿斗, 유비의 아들로 황제가 되나 제갈량등 신하들에 끌려다닌 용렬한 군주였다고 함)로 취급하였고, 그의 권위는 전혀 인정하지 않았다.
5월 15일, 주유숭은 정식으로 감국에서 황제에 오른다. 처음에 그는 아주 조심스럽게 행동했다. 처음 남경성에 들어올 때도 그는 더럽고 낡은 각건을 쓰고 있었고, 백죽선을 흔들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시골의 돈있는 선비나 부자같았다. 전혀 교만한 고관자제의 모습은 아니었다. 이것은 남경의 신하들로 하여금 약간 안도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그는 부친의 나쁜 습관을 그대로 물려받았다.
며칠간 조용하게 재내던 주유숭은 바로 본색을 드러냈다. 이 방면에서 아마도 부친의 "술마시고 노래부르자. 인생이 뭐 별거냐"는 향락주의철학을 물려받은 것같다. 부친의 비극은 완전히 잊어버렸다. 주유송도 술을 좋아하고 여자를 좋아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즉위초기에 태감을 보내어 각지의 미녀를 데려오게 해서 후궁으로 삼았다. 나라가 망하기 2달전까지, 그는 후궁비빈을 뽑는데 열중했다. 어떤 기재에 의하면 "황상의 몸이 커서 하루에 동녀 2명이 죽어나갔다"는 내용이 있다. 설날전날, 황제는 갑자기 신하들을 소집했다. 신하들은 계속된 패전으로 황상의 심기가 불편해서 그러는 것으로 생각하여 반드시 나라를 되찾겠다는 말들을 끄집어 냈다. 그러나 이 황제는 그 말을 듣더니 "여러 신하들아, 짐은 그런 걸 생각할 시간은 없다내. 짐이 보니까 노래하고 극하는 아이들중에 제대로 생긴 애가 없다. 그러니 좀 더 미녀들을 많이 뽑아서 후궁을 채워주면 좋겠다. 너희들을 빨리 이 일부터 처리해라" 그러자, 신하들은 모두 그가 고민하는게 그런 것이었는지 생각하며 서로 얼굴만 바라보다가 흩어졌다.
주유숭이 술을 좋아하는 것에 관하여도 이야기가 많다. 유종주(劉宗周)가 한번은 그에게 술을 끊으라고 권한 적이 있었다. 주유송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선생이 그렇게 말씀하시면 앞으로 마시지 않겠습니다." 오랫동안 유리걸식하면서, 말재주는 늘었나보다. 얼굴에는 잔뜩 죽을 상을 하고 이렇게 말하니 마치 몇십만냥 돈이라도 빚진것같은 얼굴이었다. 유종주는 미안해서 말을 바꾸어 "그저 매번 한잔 정도는 괜찮지 않겠습니까" 주유숭은 금방 말을 바꾸었다. "경이 그렇게까지 말하니 앞으로는 한잔만 마시겠소" 생각도 하지 못한 것은 그 다음부터 태감들은 엄청나게 큰 금술잔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이뿐이 아니라, 이 큰 잔의 술을 절반 정도 마시고 내려놓으면, 주위에 있던 사람이 가득 채운 후, 아직 다 마신 것은 아니니 한잔은 안되었습니다라고 하였다는 것이다. 이러다보니, 오히려 마시는 술의 양이 예전보다 늘어났다는 것이다.
주유숭이 조정의 일을 돌보지 않다보니, 당시 조정은 매우 문란했고, 뇌물이 성행했다. 이것이 물론 주유숭의 잘못만은 아니다. 그는 일찌기 국정의 대권을 마사영등에게 위임했기 때문이다. 사실, 남명의 중신들중에서 장거정과 비슷한 권모술수와 치국의 수단을 가진 신하가 있었다면, 황제가 안심하고 권력을 위임한 기초위에서 나라를 굳건하게 다질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남명왕조에는 대신들은 그렇게 많았지만, 아무도 이런 것을 깨닫지 못했다. 마사엉, 완대성등은 매관매직을 했고, 죽어라 돈을 끌어모았을 뿐이었다. 마사영, 완대성과 정견이 달랐던 신하들도 마찬가지로 놀고 즐기기만 하였다.
주유숭이 죽어라 놀기만 하였는데, 갈수록 지내기가 힘들어 졌다. 강북의 여러 군벌들은 자기 땅을 지키려고 머리를 쓸 뿐 조금도 고토를 회복하지 못했고, 그저 매일 중앙정부에 돈과 양식을 내려보내달라고 요구만 할 뿐이었다. 심지어 사가법까지도 자기가 조그만치의 공로도 없는 것은 바로 양식이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그러면서 황제에게 돈을 요구했으며, 양식을 내려보내야 적을 죽이고 싸울 수 있다고 하였다. 그렇지 않으면 장강도 지킬 수 없을 것이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강북사진은 정말 양식이 부족했는가? 기록에 의하면 강북사진의 1년간 내려보내야할 돈은 240만이었다. 그러나, 남경조정은 당시 4개월만에 1년반치의 양식을 내려보냈다. 즉 360만을 내려보냈다. 이런 군벌들의 핍박으로 조정은 조용할 수 없었다.
주유송이 황제가 되는데 불만을 가졌던 동림당 복사(復社)사람들은 연이어서 "요승(妖僧)" 대비(大悲), 가짜태자, 동비(童妃)의 세가지 사건을 일으킨다. 이로써 주유송의 적법성에 직접적으로 의문을 제기하고, 그의 명성과 위엄을 깍아내렸다. 동림-복사당사람들은 오랫동안 사람들의 눈에 정인군자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아주 복잡한 정치파벌이고, 천하에 이름난 영향력에 눈독을 들인 소인과 다른 뜻을 가진 사람들도 끼어들어 있기 마련이었다. 그리하여 '군자'라는 이름으로 '소인'배의 짓거리를 하는 경우도 있었다. 권력을 빼앗기 위하여는 어떤 짓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들이 꾸민 이 몇 가지 사건은 간단한 것이 아니었고, 황제를 자리에게 끌어내릴 수도 있는 것이었다. 비록 그들이 최종목적을 달성하지는 못했지만, 진상을 모르는 문무관리들과 백성들 중에는 의문을 품은 사람들이 많아졌고, 홍광조정의 결집력과 구심력에 많은 악영향을 미쳤다.
"사람은 반드시 스스로 자신을 욕보인 후에, 다른 사람이 그를 욕보인다"는 말이 있다. 남명왕조에 이어서 들이닥친 것은 대청의 철기군이었다. 1645년 4월 25일, 양주를 함락당하고, 사가법은 순국한다. 이 소식이 남경에 전해지자, 주유숭은 어쩔 줄을 모른다. 다른 사람들에게 알릴 생각도 하지 않고, 마사영과 소수의 환관을 데리고 황망히 도망길에 오른다. 그래서 무호(蕪湖)로 도망치는데, 무호를 지키던 장수가 마침 그를 옹립하는데 공을 세운 황득공이었다. 그는 남경성의 변고에 대하여 전혀 모르고 있었다. 자기가 세운 황제가 수도를 버리고 황망히 도망쳐온 것을 알고는 마음 속으로 매우 강개하였으나, 자기가 옹립했던 황제를 위하여 충성을 다하고 죽음으로 나라에 보답하겠다고 결정하였다.
5월 28일, 홍광제가 도망치는 것을 따라온 만주의 병사들이 겹겹이 포위하자, 황득공의 부하장수인 전웅, 마득공은 청나라에 투항할 계획을 세운다. 전혀 방비없는 상황하에서 황득공은 화살을 맞고 곧이어 칼로 목을 그어 자결한다. 주유숭은 전웅에게 산채로 체포되어 청나라 군대에 바쳐진다. 정달의 <<야사무문>>에 의하면 당시 전웅은 주유숭을 등에 메고, 마득공은 뒤에서 주유숭의 두 발을 꼭 끌어안고, 마치 살아있는 보배가 달아날 것을 두려워하는 것과 같았다고 한다. 주유숭은 울면서 두 사람에게 사정하였으나 아무런 효과가 없었다. 그래서 전웅의 목을 입으로 깨물어 피가 온 몸에 흘렀다고 한다.
다음 해 5월, 이 남명의 천자는 북경에서 모반죄로 처형당한다. 향년 39세이다.
주유송은 어렸을 때부터 사방을 떠돌아다녔고, 옛날 복왕부의 영화부귀는 그에게는 일장춘몽이었다. 그러나 생각지도 못하게 불혹에 가까운 나이가 되어 시운이 다시 돌아와 우연한 기회에 황제에 오르게 된다. 그는 황제가 된 후 비극적인 색채가 충만했던 부친과 똑같은 길을 걷는다. 지고무상의 황제의 보좌에 올랐으나, 그는 황제위를 그저 자기의 예전 복왕부의 영화부귀를 다시 누리는 도구 정도로 생각했다. 취생몽사의 가운데 그는 자기가 죽을 힘을 다해서 움켜쥔 권력이 그 배후에 얼마나 많은 살기를 품고 있는지를 헤아리지 못했고, 권력을 누린다는 것은 반드시 상응하는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것도 알지 못했다. 황제로 지낸 짧은 1년간, 그는 자신의 국가에 대하여 책임을 지지도 않았고, 자기의 백성들에게 책임지지도 않았으며, 자기의 가족들에게 책임지지도 않았다. 심지어 자기 자신에 대하여도 책임지지 않았다. 그의 신변에 있던 신하들도 물론 그에게 책임지지 않았다.
'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 > 역사인물 (청 초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홍승주(洪承疇)는 왜 변절하였는가? (0) | 2007.06.26 |
---|---|
청나라의 한족출신 왕공(王公) (0) | 2007.01.26 |
김지준(金之俊) : 십종십부종(十從十不從) (0) | 2006.12.08 |
쑤마라구(蘇麻剌姑) : 청나라 황실의 신비여인 (0) | 2006.11.02 |
청나라때 "문정공(文正公)"의 시호를 받은 8명 (0) | 2006.07.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