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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청 초기)

청나라의 한족출신 왕공(王公)

by 중은우시 2007. 1. 26.

1. 평서친왕(平西親王) 오삼계(吳三桂) (1612-1678)

 

    자는 장백(長伯)이고, 강소 고우 사람이다. 요동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오양(吳襄)이고, 숭정제때 금주총관을 지냈다. 이자성의 농민군이 북경에 가까이 올 때, 오삼계는 요동총병관이었다. 숭정제는 그에게 평서백(平西伯)의 작위를 내리고, 북경을 보위하도록 지시한다. 북경이 함락되자, 군대를 돌려 산해관으로 철수한다. 이후 청나라의 도르곤과 합작하여 이자성의 농민군을 산해관에서 물리친다. 이후 청나라로부터 평서왕(平西王)의 작위를 받는다. 청나라군대의 선봉이 되어 이자성을 추격하고, 섬서, 사천등지의 반청세력을 진압한다. 순치14년(1657)에 평서대장군을 수여받고, 순치16년(1659)에 운남에 주둔한다. 강희원년(1662년), 오삼계는 남명의 영력제를 곤명에서 죽이고, 평서친왕(平西親王)으로 승급되고, 운남성 외에 귀주성도 관할한다. 당시 복건에 있넌 정남왕 경정충, 광동에 있던 평남왕 상가희의 아들 상지신과 더불어 삼번(三藩)으로 불린다. 청나라조정이 강희12년 삼번을 철폐하자, 오삼계는 청나라에 반란을 일으킨다. 스스로 총통천하수륙대원수가 되어 호남으로 진격한다. 광서, 사천, 광서, 호남, 복건, 광동등이 그에 호응하여 전란은 강서, 섬서, 감숙등에까지 여파를 미친다. 강희17년 오삼계는 호남형주에서 황제를 칭하고 국호를 대주(大周)로 하나 그해 가을 병으로 사망한다. 손자 오세번이 황위를 이었으나, 운남으로 물러나고 강희 20년 곤명이 포위되자 오세번은 자살하고, 나머지 부대는 투항한다.

 

2. 정남친왕(定南親王) 공유덕(孔有德) (1602-1652)

 

명청교체기의 요동 개주위(현재의 요녕성 개현) 사람. 자는 서도(瑞圖)이다. 숭정즉위초에 등주참장이었고, 숭정4년(1631년)에 군대를 이끌고 요동으로 가서 오교에 이르러 명을 배반하고 등주지구를 함락시키고 스스로 도원수에 올랐다. 숭정6년(1633년) 경정충과 함께 후금에 투항하여 도원수의 직위를 받는다. 숭덕원년(1636년) 공순왕(恭順王)의 작위를 받는다. 나중에 한군정홍기에 소속되고, 청나라가 중원으로 들어올 때 섬서성의 대순군을 추격하고 강남으로 내려온다. 순치3년(1646년)에 평남대장군(平南大將軍)에 오르며, 서남의 각지역을 관할한다. 순치6년(1649년)에 정남왕(定南王)으로 고치며, 계림에 주둔한다. 순치9년 이정국(李定國)의 부대가 계림을 함락시킬 때, 패배하여 자살한다.

 

3. 정남친왕(靖南親王) 경중명(耿仲明) (1604-1649)

 

명나라 말의 장수. 청나라가 중원으로 내려오기 전에 청나라에 투항했다. 청나라 초기 삼번의 하나. 자는 운태(雲台), 조상은 산동출신이나 나중에 요동성 개주위로 옮겼다. 명나라때 등주참장으로 모문룡(毛文龍)의 옛 부하이다. 원숭환이 독사계요를 맡으면서 모문룡을 죽였고, 경중명은 산동순무 손원화의 휘하로 좌천된다. 이후 공유덕과 함께 후금부대를 막을 때, 지원양식이 부족한데 원한을 품고 두 사람은 함께 명나라 숭정6년(1633년) 부대를 이끌고 바다를 건너 후금에 투항한다. 숭정원년(1636년), 청나라는 경중명을 회순왕(懷順王)에 봉하고, 한군정황기에 소속된다. 청나라가 중원에 들어온 후, 농민군을 진압했다. 순치6년(1649년)에 정남왕(靖南王)으로 변경되며, 상가희와 함께 광동으로 진군한다. 그 도중에 사망한다. 아들 경계무(耿繼武)가 작위를 이어 광주에 주둔하였고, 나중에 복건으로 옮긴다. 강희10년(1671년) 경계무도 죽고, 그의 아들 경정충(耿精忠)이 작위를 이어받는다. 이어서 오삼계를 따라 반청대열에 선다.

 

4. 평남친왕(平南親王) 상가희(尙可喜) (1604-1676)

 

명나라 말의 장수. 청나라가 중원에 들어오기 전에 청에 투항했다. 오삼계, 경정충(경중명의 손자)과 함께 삼번할거세력을 형성했다. 선조는 산서홍동에서 형수로 옮겼다가 나중에 요동의 해주로 옮겼다. 명나라때는 광록도 부장을 지낸다. 천총8년(1634년), 후금에 투항한다. 숭덕원년(1636년) 청나라는 상가희를 지순왕(智順王)에 봉한다. 나중에 한군 상남기에 속하게 된다. 순치6년(1649년) 평남왕(平南王)으로 고친다. 병사를 이끌고 경중명과 함께 광동으로 들어와서 광동지역의 명나라 군대를 물리친다. 광동에 주둔한다. 상가희는 광동에서 부하들로 하여금 소금상을 빼앗고, 사사로이 시장을 열고 세금을 거둔다. 이 때 광주는 대외통상창구였다. 상가희는 비교적 청나라조정에 충성했다. 그러나 나이들고 병이 많다보니 병사에 관한 권한을 아들 상지신에게 위임했다. 상지신은 횡포가 심하여 관리와 백성들의 원망이 많았고, 폭음을 하고 사람을 잘 죽였다. 강희12년(1673년) 상가희는 청나라에 청하여 요동으로 돌아가고, 상지신은 계속 광동에 남았다. 조정은 상지신의 발호를 제지하기 힘들다고 보고 삼번을 철폐하였다. 오삼계, 경정충이 반란을 일으킬 때 상지신도 가담했다. 상가희는 이에 우울해하다가 죽었다.

 

5. 다라의친왕(多羅義親王) 손가망(孫可望) (?-1660)

 

명나라말기의 농민군 장수. 섬서성 연장현 사람이다. 일설에는 미지 사람이라고도 한다. 어려서부터 장헌충을 따라 반란에 가담했고, 장헌충의 양자가 되었다. 순치3년(1646년) 이정국의 대군과 운남,귀주로 들어가서 서남의 반청기지를 건립한다. 다음해에 이정국등과 함께 왕으로 칭하였다. 그는 나중에 남명 영력정권과 연합하여 청에 대항하였고, 진왕(秦王)의 작위를 받았고, 순치9년, 병사를 이끌고 북진하여 승리를 거두었다. 개인적인 야심이 커지고, 이정국이 공을 많이 세우는 것을 질투하여, 이정국을 항주(沆州, 호남성 지강현)으로 보내면서 그를 죽이고자 하였으나, 사전에 발각되어 성공하지 못한다. 이정국은 손가망의 분열주의활동을 저지하기 위하여 여러차례 사람을 보내거나 서신을 보내어 권하였으나 듣지 않았다. 나중에 병사 14만을 데리고 운남에 들어가서 결전을 벌이나 손가망의 군대는 궤멸하고, 귀양으도 도망쳐 온다. 순치14년에 청나라에 투항하고, 서남의 군사상황을 누설하여, 서남의 항전활동이 꺽이게 된다. 청나라조정은 그릉 의왕으로 봉하고 한군 정백기에 소속된다. 나중에 사냥할 때, 청나라 병사가 쏜 화살에 맞아 죽는다.

 

6. 일등숙의공(一等肅毅公) 홍승주(洪承疇) (1593-1665)

 

자는 언연(彦演)이고 호는 형구(亨九)이다. 명나라 만력21년 9월 22일에 태어났다. 천주부 남안현 27도영산 하미향 사람이다. 홍승주는 명문출신인데, 무영옹산 홍씨의 제12대손으로 동헌오방에 속한다. 그의 증조부에 이르러 집안이 몰락하였고, 부유하지 않게 되었다.

 

증조부 홍이선은 수재이다. 조부 홍유일은 공생이며, 문장이 매우 뛰어났으나 젊어서 과거보러가는 도중에 사망했다. 부인 대씨는 홍유일이 죽은 후 유복자 홍계희를 낳는데, 바로 홍승주의 부친이다. 홍계희는 수재이며, 성격이 장중하고 효자로 이름을 날렸다. 부씨를 처로 삼았는데, 명문규수이다. 아들을 셋 낳았는데, 장자가 승주이고 차남이 승완 삼남이 승준이다. 승완은 어려서 죽었으나, 승준은 천주일대에 이름을 떨친 서예가였다.

 

7. 삼등동안후(三等同安侯) 정지룡(鄭芝龍)

 

정지룡의 자는 명계이다. 처음에는 안사제(顔思齊)를 따라 도적이었으나 안사제가 죽은 후 그 무리를 이어받았다. 숭정초에 명나라에 귀순하여 유격장군이 되어 해적을 잡는다. 청나라군대가 남하할 때, 당왕의 명을 받들어 복건에 들어간다. 평국공(平國公)을 받는다. 청나라 장수인 홍승주는 정지룡과 같은 현 출신이어서 글로써 그에게 투항을 권하자, 투항한 후 북경으로 가서 동안후의 작위를 받는다. 한군 정황기에 속하게 된다. 나중에 아들 정성공을 투항하도록 권하는 글을 쓰게 했으나, 정성공이 듣지 않자, 그의 사신을 다른 사람이 고발하여, 작위를 박탈당하고 하옥되며, 아들 세충, 세사, 세음, 세묵이 모두 영고탑으로 귀양간다. 강희제때 북경에서 참수한다.

 

8. 일등해징공(一等海澄公) 정극상(鄭克爽)

 

정극상은 명나라 연평왕 정성공(鄭成功)의 손자이다. 부친은 정금(鄭錦)이다. 부친 정성공의 가풍을 이어 큰 뜻을 품고 군사제도를 정비하며 시장을 열고 현명한 인재를 등용해서 일시에 영국, 섬라(태국), 안남(월남)등지의 배들이 모두 왔다. 그의 통치하에 대만은 아주 평화로웠다. 그러나 불행히도 젊어서 사망했다. 정극상의 큰 형이 원래 능력이 있었으나, 당시의 간신 풍석범등이 유약한 정극상으로 하여금 왕위를 잇게 한다. 모든 일은 풍석범등이 처리했다. 이전부터 남아있던 영정왕등의 인물은 모두 자살하였다. 정극상은 나중에 한군 정홍기의 아래에 소속되었으며 우울하게 살다가 죽었고, 후사가 없었고, 작위도 박탈당한다.

 

9. 삼등정해후(三等靖海侯) 시랑(施琅)

 

시랑의 자는 탁공이다. 북건성 진강 사람이다. 처음에는 명나라 총병 정지룡의 부하였다. 정지룡을 따라 청나라에 투항했고, 광동을 정벌하였다. 정성공이 시랑을 불렀으나 따르지 않았다. 시랑의 부친, 동생, 조카등이 모두 정성공에 의하여 살해당한다. 이러한 사사로운 원한으로 병사를 일으켜 네덜란드와 연합하여 수군으로 금문도를 빼앗는다. 이 공로로 수사제독의 직위를 받고 한군 상황기에 속하게 된다. 대만의 정극상이 유약하고, 내부불화가 있는 틈을 타서 대만을 함락시키고 정해장군이 되고, 정해후의 작위를 받는다.

 

10. 일등해징공(一等海澄公) 황군선(黃君宣)

 

원명은 오(梧)이다. 복건 평화사람이다. 처음에는 정성공의 총병이었고, 해징을 지켰다. 나중에 수비장수를 참하고 청에 귀순한 후 해징공의 작위를 받는다. 장주에 주둔한다. 그는 시랑을 추천하고, 도적을 멸할 계책을 올리며, 정성공의 부친 정지룡을 죽이도록 주청한다. 청나라 조정은 그의 의견에 따라 시랑을 등용하고, 정지룡을 죽인다. 삼번의 난 때 정성공의 부대와 경정충의 부대의 합공으로 장주성이 함락된다. 정성공과 경정충의 부대에 의하여 그의 아들, 모친, 처가 모두 죽고, 친척들중 죽은 자가 30여명이고, 그의 관도 열리고 시신이 훼손당한다.

 

11. 일등모용공(一等謀勇公) 손사의(孫士毅)

 

손사의의 자는 지치이고 절강성 인화 사람이다. 진사출신이며, 건륭제의 남순때 발탁되어 운남순무에까지 오른다. 운귀총독 이시요의 뇌물사건에 연좌되어 이리(伊犁)로 귀양간다. 그는 문재가 뛰어나 사고전서를 편찬하는데 뽑혔고, 한림원편수가 된다. 나중에 양광총독이 되고, 대만 임상문을 평정하는데 공을 세운다. 이 공으로 일등모용공의 직위를 얻는다. 얼마되지 않아, 안남에서 패배하면서 작위를 박탈당한다. 나중에 사천총독으로 가고, 과얼카전투에서 공을 세운다. 나중에 호남성의 토묘족을 토벌하다가 장독에 걸려 군중에서 사망한다. 유서로 청나라 정부에 청하여 팔기에 들게 해달라고 하고, 청나라 조정은 그를 한군 정백기에 편입시켜주고 공의 작위를 추서한다. 손사의는 화신과 가까웠으므로, 향후 화신이 쫓겨난 후 연좌되어 작위를 다시 박탈당하고, 그의 자손도 정백기에서 쫓겨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