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나라 역사연구가들에 의하면 역사상의 쑤마라구는 확실히 존재하였고, 또한 신비스러운 인물이다. 그녀는 몽고족이었고, 커얼친(科爾沁)초원에서 가난한 유목민의 딸로 태어났다. 개략 명나라 만력40년(1612년)전후에 태어났다. 최초의 이름은 쑤모얼(蘇茉兒 또는 蘇墨爾)였는데, 몽고어의 한자음역이다. 몽고어의 뜻은 "털로 만든 주둥이가 큰 주머니"라는 뜻이다. 순치 만년 혹은 강희 초기에 그녀의 이름은 만주이름으로 "쑤마라"라고 바뀌었는데, 의미는 "주둥이가 절반인 큰 주머니"라는 뜻이다. 그녀가 병으로 사망한 후 궁중에서는 그녀를 존경하여 "쑤마라구"라고 불렀다.
쑤마라구는 아주 총명하였던 것으로 알려진다. 그래서 커얼친 패륵부(貝勒府, 패륵은 현지의 지배자)에서 그녀를 잘 봐서 패륵인 차이상의 둘째딸인 부무부타이(布木布泰, 또는 本布泰)의 시녀가 되었다. 이 부무부타이는 다른 사람이 아닌 나중에 그 이름도 유명한 효장황태후이다. 후금 천명십년(1625년), 부무부타이는 13세의 나이였으나, 이미 미인으로 주변에 유명하였다. 이 해에 부무부타이는 오빠인 우커샨(吳克善)을 따라 먼 길을 걸어서 후금의 수도인 성경(盛京, 지금의 심양)에 도착하고, 후금의 칸인 누르하치의 여덟째 아들 황타이지(나중의 청태종)과 결혼한다. 당시 황타이지의 나이는 34세였다. 쑤마라구는 부무부타이의 시녀로 주인을 따라 성경으로 온다. 이후 순치원년(1644년)에 청나라군대가 북경을 점령한 후에 쑤마라구는 역시 이미 황태후가 된 부무부타이를 따라서 북경으로 오고 자금성에서 거주하게 된다.
이 몽고출신의 여인은 패륵부에 들어간 후로 보는 것도 많아지고, 문화소양도 기르게 된다. 그녀는 몽고어를 잘 할 뿐아니라, 만주어와 중국어에도 능통했다. 특히 만주어는 아주 글을 잘 써서, 궁중의 모든 사람들이 칭찬할 정도였다. 그녀는 황태후의 명을 받아 강희제의 첫번째 만주어 교사가 되기도 한다.
그녀는 또한 손재주가 뛰어나서, 재단, 재봉이 훌륭했다. 그녀가 만든 옷은 몸에 딱맞을 뿐아니라 보기도 좋았다. 그래서 그녀는 청나라의 관복의 모양을 제정하는데도 참여한다. 그리고 몽고초원에서 자라서 말을 잘 탔으므로 황태후를 위하여 궁중바깥을 다니면서 일을 처리하기도 하였다.
효장황태후와 쑤마라구는 주종관계였지만, 두 사람이 있을 때는 자매와 같았다고 한다. 효장황태후도 그녀를 부를 때 거거(格格)라고 불렀는데, 이 말은 '아씨'와 같이 황실의 여인들에게만 쓰는 말이었다. 순치황제는 그녀를 평배(平輩)로 대했고, 강희황제는 그녀를 '어냥(額娘)' 즉 어머니로 호칭했다. 그리고 강희의 자손들은 모두 그녀를 할머니로 대했다. 쑤마라구는 그러나 매우 조심하고 공손하게 사람들을 대했으므로 모든 사람의 존경을 받았다.
강희26년(1687년)에 효장황태후가 사망한다. 이때 쑤마라구는 이미 70세의 노인이었으며 깊은 슬픔에 빠진다. 강희황제는 그녀를 위하여 한가지 조치를 취한다. 즉, 황십이자(皇十二子)인 윤도(允도)를 그녀에게 맡겨서 기를 것을 부탁한다. 윤도는 서비인 만류합씨(나중의 정비)에게서 태어났으며 당시 3살이었다. 청나라 황궁의 관례에 따르면, 적어도 빈(嬪)이상의 직급을 가진 후궁만이 황자를 기를 수 있었는데, 쑤마라구에게 황자를 돌보도록 요청한 것을 보면 강희제가 그녀를 얼마나 중시했는지 알 수 있다. 쑤마라구는 황십이자 윤도를 잘 기른다. 윤도는 옹정제의 즉위후 강희제의 아들중 대부분이 불운한 삶을 마쳤지만, 그는 정치에 거리를 두면서 강희의 35명의 황자들중 가장 장수하여 79세까지 산다. 그리고 화석이친왕에 오르고 의정대신에까지 오른다.
쑤마라구는 평생 시집가지 않았으며 계속 황궁에서 생활했다. 효장황태후가 죽은 후에도 18년을 더 궁중에서 지낸다. 윤도가 성장한 이후에는 그녀가 돌볼 필요가 없어짐에 따라, 그녀는 불교와 인연을 맺게 된다.
쑤마라구는 생활에서 두가지 기이한 습관이 있었다고 한다. 첫째는 일년간 절대 목욕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다만, 일년이 끝나는 마지막 날에 약간의 물로 몸을 씻고 그 후에 몸을 씻은 더러운 물을 모두 마셨다는 것이다. 둘째는 평생 약을 먹지 않았다는 것이다. 아무리 병세가 중하더라도 아무런 약도 먹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녀의 이러한 괴이한 습관은 황제도 알았을 정도로 유명했다. 그 이유에 대하여는 여러가지 서로 다른 해석이 있으나 아직도 모든 사람이 납득할만한 이유는 내놓지 못하고 있다. 그렇지만 그녀는 매우 건강했고, 90여세까지 아무런 문제없이 살았다.
강희44년(1705년) 8월 27일, 쑤마라구의 병세는 악화되어 병상에 눕는다. 이틀후 병세는 더욱 악화되었다. 당시 강희황제는 새외지방을 순시중이었고, 자금성에 없었다. 황삼자 윤지, 황팔지 윤사, 황십이자 윤도등이 그녀에게 치료를 받을 것을 권하였으나, 그녀는 거절한다. 마음이 급한 황자들은 그녀를 업고 어의에게 달려갔으나, 어의는 이미 그녀를 구할 방법이 없다고 한다. 강희44년 9월 7일 (1705년 10월 24일) 그녀는 숨을 거둔다.
쑤마라구가 죽은 후에 청나라 황실에 그녀에게 한 대우도 아주 특수한 점이 많다.
장례일에, 황오자 윤기, 황십자 윤아는 황태후를 돌보기 위해 남고, 황십사자 윤제가 자금성밖에 나가 있었던 것을 제외하고는 강희제의 모든 황자들이 장례의식에 참가하였다. 쑤마라구의 장례의식이 끝난 후에야 황자들은 각자 집으로 돌아갔다. 그 중 황십이자 윤도는 "어릴때부터 저를 길러주셨고, 나는 아직 보답하지를 못하였으니, 저는 며칠을 머물면서 백일동안 밥을 올리고, 3.7일동안 독경을 하고자 합니다"라고 청한다. 관례에 따르면, 쑤마라구는 시녀에 불과하므로 황자가 밥을 올리거나 3.7일 독경을 하는 선례는 없었다. 황삼자 윤지는 스스로 결정하지 못하고, 강희제에게 물어보는데, 강희제는 "12째의 말이 맞다. 그가 원하는대로 하게 하라"고 지시한다. 윤도는 빈궁에서 쑤마라구를 위하여 관을 지키고 밥을 올리고, 경을 읽어준다. 다른 황자들도 돌아가면서 매일 한 사람씩 윤도와 함께 지켜주었다.
강희제는 조모가 일을 당했으니 7일후에 다시 입관하라고 지시한다. 이것은 아직 황궁에 돌아오지 못했으므로 스스로 마지막으로 쑤마라구를 보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일로 7일내에 돌아올 수 없게 되자, 다시 지시를 내려 7일을 더 기다리라고 한다. 그리고, 쑤마라구의 관을 당시 효장황태후의 관을 모셔놓았던 준화 창서산 아래의 잠안봉전내에 같이 모셔두게 한다.
강희황제는 생전에 조모인 효장황태후의 능침문제를 해결하지 못하여, 효장과 쑤마라구의 관은 계속 잠안봉전내에 모셔져 있었다. 다음 황제인 옹정제는 즉위후에 효장황태후를 잠안봉전에 모신 후에 청나라의 운세가 좋고 나라가 융성하자 그 위치의 풍수가 좋다고 보고, 잠안봉전을 소서릉으로 고치고 효장황태후를 소서릉에 모신다. 그러나, 시녀이고 애신각라후손도 아니고 후궁도 아닌 쑤마라구를 같은 곳에 묻을 수는 없어, 남으로 1.5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별도로 묘지를 마련한다. 쑤마라구의 묘는 옹정3년 2월에 공사를 시작하여 7월에 완공하고 8월 7일에 정식으로 안장한다. 지궁에는 보정을 만들고, 앞에는 침문을 3개 만들고 건물을 세칸, 대문을 세칸, 둘레는 붉은 담장으로 둘렀고, 문밖에는 동서치방, 동서상방을 만들었다. 이 정도의 규격으로 능묘를 만들어주는 것도 파격적이라고 할 수 있다.
아쉽게도 1900년에 쑤마라구의 능은 도굴을 당하고 만다. 지금은 능의 보정(寶頂, 봉분덮개)만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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