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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청 초기)

홍승주(洪承疇)는 왜 변절하였는가?

by 중은우시 2007. 6. 26.

글: 왕일가(王溢嘉)

 

자아조절능력이 뛰어난 경우에 좋은 측면으로는 탄력성이 있고, 변통할 줄 안다는 것이고, 나쁜 측면으로는 카멜레온같고, 기회주의자라는 것이다.

 

<<소정잡록(嘯亭雜錄)>>에는 이런 이야기가 실려있다: 명나라말기의 변방의 대장군이던 홍승주는 전투에 패배한 후 포로로 붙잡혔다. 청태종은 범문정(范文程)을 파견하여 그를 설득하여 투항시키고자 했다. 홍승주는 계속 입만 열어 그를 욕해댔다. 범문정을 그래서 좋은 말고 그를 다독거리면서, 그와 화제를 바꾸어 고금역사상의 사람과 사건에 대하여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렇게 한담을 나누고 있는데, 뇌옥의 서까래위에서 먼지가 홍승주의 옷에 떨어졌다. 그때 범문정은 홍승주가 계속 손으로 소매에 묻은 먼지를 털어내는 것을 보았다.

 

범문정은 뇌옥을 나와 청태종에 보고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홍승주는 죽지 않을 것입니다. 신이 보기에 그는 자기가 입은 옷도 그렇게 아끼는데, 자기의 생명이야 어떻겠습니까." 나중에 홍승주는 과연 투항하여 귀순했고, 범문정이 사전에 예측한 대로의 인물이었던 것이다.

 

우리는 범문정의 판단은 바로 "견미지착(見微知着, 사소한 것을 보고 큰 것을 알아내다)"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현대심리학의 측면에서 보자면 우리는 홍승주의 "계속하여 손으로 소매에 묻은 먼지를 털어내는 것"은 그가 의복을 중시한다는 것을 알 수 있고, 자기의 외부적인 이미지를 중시한다는 것을 알 수 있고, 자아조절능력이 뛰어나다는 것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외재적인 환경의 요구사항과 내재적인 이념간에 충돌이 발생하면, 자아조절능력이 뛰어난 사람은 통상적으로 자신을 조정하며, 개인적인 이념을 버리고, 외재적인 상황의 요구에 맞추게 된다. 홍승주는 처음에는 아마도 귀순하고 투항할 의도가 없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나중에 대세가 이미 기울었다는 것을 알고, 그는 더 이상 원래의 생각을 고집하지 않고, 외재적인 요구에 타협해버린 것이다.

 

왜 이렇게 말할 수 있는가? 리서치결과에 의하면, 자아조절능력이 뛰어난 사람은 자신을 인생무대에서 각종 서로 다른 역할을 수행하는 연기자처럼 생각한다는 것이다. 서로 다른 경우에, 서로 다른 사람들 앞에서 서로 다른 표현과 행위를 한다는 것이다. 환경이 엄숙할 것을 요구하면 그는 바로 엄숙해지고, 상황이 그에게 활달할 것을 요구하면 바로 그는 활달해진다. 즉, 그는 자신을 잘 조절해서 사회가 요구하는 바에 맞추게 된다는 것이다. 좋은 측면으로 보자면, 자아조절능력이 높다는 것은 탄력성이 있다는 것이고, 변통할 줄 안다는 것이고, 인생의 각종 역할의 요구를 만족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나쁜 측면으로 보자면, 쉽게 허위적일 수 있고, 카멜레온처럼 될 수 있고, 기회주의자가 될 수 있으며, 신뢰하기 힘든 측면이 있는 것이다.

 

생활에 있어서, 자아조절능력이 강한 사람은 비교적 외부적인 이미지를 중시한다. 자기 뿐아니라, 교유하는 사람의 외관도 중시하고, 구매하는 집, 차량, 의복의 외관도 중시하여, 자기 개인의 이미지에 맞도록 하고자 한다. 자기 개인의 외부적인 이미지를 해치는 사물이나 비평에 대혀 그는 깊이 좌절한다. 좌절이나 불쾌한 일을 만나면 그는 환경을 바꾸고 마음을 바꾸게 된다.

 

자아조절능력이 뛰어나고 아니고는 사람마다 다를 뿐아니라, 동일한 사람이라도 사안에 따라 시기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일반적으로 말하면, 일이 중대하다고 느끼면 느낄수록, 더 많은 사람들이 개인의 내재적인 이념을 희생하고 외재적인 환경의 요구에 순응하고자 한다. 18세부터 73세까지의 집단에 대한 연구결과에 따르면, 자아조절능력은 연령이 지남에 따라 저하한다. 즉, 많은 사람들이 젊을 때에는 다른 사람의 요구조건을 맞추려고 하고, 외재적인 환경에 적응하려고 하나, 나이가 들면 들수록, 자기의 내재적인 욕구에 따르게 된다는 것이다.

 

아인슈타인이 노년이 되었을 때 이렇게 말한 바 있다: "내 나이는 이미 남이 양말을 신으라고 해도 신지 않을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사교적인 경우에 양말을 신는다는 것은 매너이자, 외부상황이 요구하는 것이다. 개성이 솔직한 아인슈타인은 비록 원래 자아조절능력이 아주 낮은 사람이지만, 젊을 때에는 사교활동에 참가할 때, 양말을 신었다. 그러나, 나이가 들면서 자기가 하고싶은대로 하게 되었고, 갈수록 규칙을 어기게 되며, 결국 양말도 신지 않게 된 것이다.

 

당연히 이것이 바로 자아조절능력이 뛰어난 사람은 모두 홍승주처럼 기회주의자가 된다는 의미는 아니다. 모든 사람의 자아조절정도는 다 다르다. 그리고 매 사건마다 여러가지 많은 요소가 관여된다. 자아조절성은 그저 우리에게 새로운 시각을 제공하는 것이고, 우리에게 좀 더 생각할 여지를 주는 것이다. 사실, 자아조절능력이 높고 낮은 것은 장단점도 아니고, 사람마다 다 다르다. 그다지 마음에 둘 필요는 없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