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모택동)

모택동의 정치유언

by 중은우시 2007. 1. 8.

전혀 중요하지 않은 문제가 왕왕 역사의 발전이나 방향을 뒤바꿔놓는다. 젊은이들은 이해하기 어렵겠지만, 강청의 시대에 이런 일이 발생했었다.

 

"사인방"은 모주석이 "기존에 정한 방침대로 하라(按旣定方針辦)"고 하였다고 하고,

화국봉은 모주석이 "과거의 방침에 따라 하라(照過去方針辦)"고 하였다고 하였다.

 

그중에서 겨우 3개의 글자가 서로 다르다.

 

바로 이 세글자가 다른 것은 "사인방"이 무너뜨리는데 하나의 적합한 이유가 되었었다. 모주석의 임종유언을 위조하였다는 것이다. 이로써, "사인방"의 10년 세도는 끝이 나고, 중국역사는 방향이 바뀌었다.

 

1976년의 10월 6일 저녁, 왕홍문, 장춘교, 강청, 요문원의 "사인방"은 일거에 분쇄되었다. 그러나, 이 투쟁의 직접적인 도화선은 "사인방"이 여론매체를 동원하여 대대적으로 선전하던 "기존에 정한 방침대로 하라"는 것이었다. 바로 이 "기존에 정한 방침대로 하라"는 말이 요란스러울 때, 섭검영등 노원수들의 추호도 놓치지 않는 통찰력에 의한 일깨워줌에 따라, 화국봉은 강경한 조치를 취할 결심을 하였던 것이다.

 

지금 되돌아보면, 모주석이 화국봉에게 써준것은 확실히 "과거의 방침에 따라 하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화국봉 자신도 글자 하나 틀리지 않게 모주석이 지시한 것은 "기존에 정한 방침대로 하라"는 것이라고 말한 바 있는데, 이것은 또 어떻게 된 일인가?

 

갑작스러운 변화

 

1976년 9월 9일 중화인민공화국의 창건자인 모택동이 서거하였다. 최초의 비통한 한 주일동안 형세는 망연했고, 어디로 가야할 지, 모두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한편으로 문제되는 것은 "사인방"이었다. 이 네 사람은 문혁중에 가장 날리던 사람이었다. 모택동의 부인 강청, 당의 "10차대회"회의상에서 임표를 대체한 새로운 후계자로 배양되는 상해노동자조반사령관, 당시 나이 겨우 38세의 왕홍문, 그리고 상해시위원회 서기출신의 당시 부총리 장춘교, 여론총괄 요문원이었다. 장춘교는 중국인민해방군 총정치부 주임도 맡아서, 문무의 양쪽을 모두 장악하고 있었다. 그들은 득의만면했고, 원하는 것은 다 얻을 것처럼 보였다. 강청은 당의 주석에 오르고자 하였고, 왕홍문은 전인대상무위원장이 되고자 하였으며, 장춘교는 총리가 되고자 했다. 편집인출신의 요문원은 계속하여 매체의 대권을 장악하고자 하였다.

 

다른 한 측면으로는, 모택동이 임종시 맡긴 어렵게 찾아낸 각파정치역량의 균형을 잡을 인물, 과도기적인 인물인 화국봉이었다. 4.5천안문운동으로 인하여 의외로 국무원총리에 발탁된 당의 제1부주석 화국봉은 표면상으로 제1인자였다. 그러나 자리는 안정적이지 못했다. 뒤에서는 그는 그저 당위원회 서기를 맡을만한 인물이라는 수군거림이 있었따. "사인방"은 그를 별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고, 나이든 혁명1세대들도 그와의 거리를 좁히려고 하지 않았다.

 

세번째 측면으로는 섭검영, 이선념등을 대표로 하는 중공중앙정치국에서 위기국면을 지탱하는 노혁명세대였다. 그들이 정신적으로 의지하는 것은 금방 타도된 등소평이었다.

 

역량대비, 강약분명

 

1주일후, "사인방"이 통제하던 여론은 이 여섯글자를 내세웠다: "안기정방침판(기존에 정한 방침대로 하라)" 이것은 많은 사람들 특히 강청에 의지하여 득세했던 사람들에게는 안정제의 역할을 하였다. 원래, 모택동의 방침이 변경되지 않으면, "등소평을 비판하고, 우경화에 반격하는" 투쟁은 계속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어진 돌변은 사람들의 눈이 번쩍 뜨이고, 말문이 막히게 하는 것이었다. 화국봉은 섭검영 이선념등 노혁명가들의 협조하에, 중공중앙판공청주임, 중앙경위국국장 왕동흥이 나타나서 중국공산당역사상 처음으로 전무후무한 '아오바이체포(강희황제가 당시의 권신 아오바이를 체포한 일)극'을 벌였다. 궤계가 많았던 "사인방"의 악몽처럼 한꺼번에 모두 체포되었다.

 

그들을 체포한 중요한 직접적인 원인은 그들이 모주석의 임종유언을 위조하였다는 것이다. 그들은 모주석이 말한 것이 "기존에 정한 방침대로 하라"는 것이라고 하였으나, 실제로 모주석이 말한 것은 "과거의 방침에 따라 하라"는 것이었다. 그 중에 3개의 글자를 틀리게 말했다는 것이다.

 

중국역사는 바로 이 세 글자로 인하여 달라지게 된다.

 

모택동은 "기존에 정한 방침대로 하라"는 말을 한 적이 있는지 여부

 

많은 해가 지난 후, 사람들은 이 문제를 생각해보게 된다. 즉, 모주석이 도대체 "기존에 정한 방침대로 하라"는 말을 한 적이 있는 것인가 아닌가?

 

"사인방"은 계속 수중에 모주석의 이 말이 있다고 하였고, 싸움에서 승리할 것이라고 하였다. "사인방"은 아마도 자신들의 기반이 화국봉보다 충분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화국봉은 정치적인 기반이 없었고, 외로웠다. 정치국에서 "사인방"은 그 자체로 4표였다. 나머지 사람들도 대부분 모두 강청 일파였다. 회의만 개최하면, 그들은 합법적으로 그들이 원하는 것을 얻어낼 수 있었고, 그들을 반대하는 자들을 몰아낼 수 있었다. 더구나, 그들의 수중에는 모주석의 최후유언을 가지고 있었다: "기존에 정한 방침대로 하라"

 

1976년 9월 16일, "사인방"은 두 신문과 한 잡지에 "모주석은 영원히 우리의 마음 속에 살아계신다"는 글을 발표한다. 검은 글자로 정식으로 모주석의 임종유언인 "기존에 정한 방침대로 하라"는 말을 내놓는다. 바로 이 한 문구로 모주석의 "기존에 정한 방침"의 최후 해석권은 전부 자신들의 수중에 들어왔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섭검영은 이것을 읽은 즉시 문제가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즉시 "기존에 정한 방침대로 하라"는 6글자에 동그라미를 치고 화국봉에게 보내서 보게 했다. 화국봉은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그는 아무 것도 느끼지 못한 것이다.

 

해석은 그저 하나이다. 바로 모주석이 "사인방"에게 확실히 "기존에 정한 방침대로 하라"는 말을 하였다는 것이다. 1980년 9월 4일, 요문원은 심문을 받으면서 모주석이 이 말을 한 시기를 고의로 모호하게 하였다. 사론의 원문은 "모주석이 병중에 우리에게 당부했다"고 하였는데, 요문원은 심문시에는 "병중에"라는 세글자를 빼버렸다. 요문원은 이 말을 그들이 만들어낸 것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심문에서도 이 말의 진위문제에 대하여 더 이상 조사하지 않았다. 그저 이 말을 한 적이 있었다는 것만 밝힌 것이다. 당시의 심문내용은 다음과 같다.

 

요문원: 모주석의 서거전후의 상황은, 내가 느끼기로, 이 말로서 적어도 일정한 기간동안 안정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바로 "사인방"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즉시 발생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다.

 

심문인: "기존에 정한 방침"은 무엇을 말하는가? 왜 너는 이 어록으로 "국면을 안정시킬 수 있다"고 얘기하는가?

 

요문원: 나는 이런 뜻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과거에 결정된 것은 모두 그대로 집행하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무엇을 포함하는지는 생각해보지 않았다.

 

왕홍문의 진술에서는 이것이 위조되었다고 말하지 않았다. 그의 진술은 막다른 골목에 몰려서 완강하게 저항하는 모습도 아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이미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그의 진술은 이렇다.

 

요문원: 나의 기억으로는 "기존에 정한 방침대로 하라"는 것은 장춘교가 추가한 것이다. 왜냐하면 이전에는 그는 나에게 말한 바가 있었기 때문이고, 그가 마지막으로 모주석을 만났을 때, 주석은 그의 손을 잡아끌면서 낮은 소리로 말하였다? "기존에 정한 방침대로 하라". 도대체 이런 일이 있었는지 아닌지는 나는 알지 못한다.

 

그렇다면, 장춘교가 이 임종유언을 위조하였는가? 통상적인 이치로 추론하면, 장춘교는 모주석의 말을 날조할 담량이 없다. 장춘교가 최후로 모주석을 만난 것은 사실이다. 시간은 1976년 9월 5일이다. 바로 모택동이 서거하기 4일전이다. "임종유언"이라는 것은 말이 되기는 한다.

 

모주석이 화국봉에게 말한 것은 확실히 "과거의 방침대로 하라"는 것이었다. 모주석은 1976년 4월 30일 저녁 그의 유명한 옛날 책이 쌓여있는 서재에서 뉴질랜드 총리 마르틴을 회견했고, 회의가 끝난 후, 그는 회견에 배석한 화국봉을 남으라고 했다. 화국봉은 모주석에게 몇개 성의 "등소평 비판, 우경사건반격바람"의 혁명정세가 낙관적이지 않다는 점을 보고하자, 모택동은 화국봉에게 몇 마디를 한다. 화국봉은 정확히 듣지 못했다고 표시했다. 그러자, 모주석은 떨리는 손으로 종이에 세 가지를 적어주었다. 그것은 바로

 

1. "만만래, 불요초급(慢慢來, 不要招急)" : 천천히 하고 서두르지 말라(招는 着의 오자)

 

2. "조과거방침판(照過去方針辦)": 과거의 방침을 따라 하라.

 

3. "니판사, 아방심(你辦事, 我放心)": 네가 처리하면 내가 안심하겠다.

 

원래 화국봉의 자본은 매우 얇았는데, 이 세 마디 말을 얻고나서는 화국봉은 안정제를 먹은 것같았다. 모택동이 장춘교에게 말했다는 "기존에 정한 방침대로 하라"는 것은 시간적으로 화국봉보다 많이 늦다. 모택동은 그때까지 말을 분명하게 하였으므로, 장춘교는 모주석의 말을 명확히 들었을 것이다. 그래서 글로 남기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사인방"에게는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남겨준다. 증거를 제출할 수 없게 된 것이다. 말로만 들은 것은 입증이 되지 않는다. 반대로, 모택동이 정치국 회의에서 사인방을 비판한 내용은 모든 사람이 알고 있다.

 

화국봉은 이후의 정치국회의에서 그는 그저 모주석의 앞의 두 가지 말만 전달했고, 마지막 말은 전달하지 않았다. 화국봉이 이 두 마디 말을 전달할 때, 정채국 구성원들이 모두 있었고, 강청, 왕홍문은 기록ㅇ르 남겼고, 아무런 이의도 제출하지 않았다.

 

1976년 7월 30일 밤, 중앙정치국의 화국봉, 왕홍문, 강청, 오덕, 기등규, 소진화, 예지복등은 전국계획공작좌담회에 출석한 사람들을 접견하였다. 회의기록은 명확히 남아 있다. 모주석의 말을 화국봉이 전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모주석은 최후로 우리에게 지시했다. 국내문제를 주의하라. 그리고 우리에게 지새했다. 기존에 정한 방침대로 하라. 각 지구, 각부서는 반드시 모주석의 지시에 따라야 하고, 중앙의 규정에 따라야 한다. 각급 지도자와 관부는 등소평비판을 깊이 연구하고 학습해야 하며, 혁명을 잘 해야 한다...." 보라, 화국봉이 여기서 사용한 것은 "과거"가 아니라 "기정"이었다.

 

화국봉도 "기존에 정한 방침대로 하라"고 말한 적이 있는데, 증명하지 않더라도 이는 분명하다. 모주석은 아마도 "기존에 정한 방침대로 하라"는 말도 한 적이 있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화국봉이 이렇게 인용하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동시에 이것은 모주석이 이 말을 한번만 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고, 장춘교에게는 그저 다시 강조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도대체 무슨 방침에 따르라는 것인가?

 

섭검영이 처음에 화국봉을 일깨워주었으나, 화국봉이 반응이 없던 다음 날, 즉, 1976년 9월 17일, "사인방"은 "기존에 정한 방침대로 하라"는 것이 모주석의 임종유언이란 내용을 북경의 크고작은 모든 신문에서 전면적으로 선전하기 시작했다. 특히, "사인방"의 정치적기반인 상해의 "해방일보"는 제목을 "모주석의 유언에 따라 기존에 정한 방침대로 하자"로 달았고, 아래의 네개의 작은 표제도 "기존에 정한 방침대로 하고, 모주석의 혁명노선을 준수하자:" "기존에 정한 방침대로 하고, 주자피에 대한 투쟁을 견지하자" "기존에 정한 방침대로 하고, 등소평비판을 깊이 연구학습하는 것을 계속하자" "기존에 정한 방침대로 하고, 혁명을 장악하고, 생산을 촉진하며, 업무를 촉진하고, 전쟁준비를 촉진하자"로 되어 있다. 이것은 그들의 공격목표가 누구인지 명확하게 밝힌 것이다. 화살은 활시위에 당겨져 있고, 초미의 급한 일이 되어 버렸다.

 

화국봉은 느꼈다. "사인방"이 모택동의 말에 대한 전용해석권을 가지고, 정치적인 타격을 가한다면 그 범위는 너무 넓을 것이라는 것을. 모주석은 자기에게 "과거의 방침에 따라"하라고 하였는데, 왜 그들은 갑자기 "기존에 정한 방침대로 하라"로 바꿔서 말하는 것일까? 이치로 말하자면, 이 글자들은 의미에 있어서 큰 차이가 없다. 다만 문제는 이 말을 누가 점유하느냐는 것이다. 누가 점유하면 그가 바로 모주석의 대변인이 되는 것이다. 사정은 이렇게 간단하고, 이렇게 무서운 것이다.

 

모주석이 막 서거하였고, 어떤 사람들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다. 뭘 해야 할지 모르고 있고, 다가온 위험도 못느끼고 있다. 왕동흥이 가장 좋은 예이다. 왕동흥은 모주석의 침대앞에서 그가 가는 것을 바라다본 몇 안되는 사람중의 하나이다. 그는 며칠을 울면서 음식도 입에 대지 않고 그저 울기만 했다.

 

한번은, 이선념이 그를 찾아서 일을 처리하려고 했는데, 그가 울기만 하는 것을 보고는 그에게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왕형, 이 시기에 그대는 어찌 어린아이처럼 울기만 하는가? 모주석의 후사가 중요하다. 현재는 당이 모두 비상시기이고, 우리는 중국공산당원으로서 모두 엄중한 시험에 들었다. 화국봉 동지가 막 취임했는데, 우리는 그들 대신해서 여러가지 복잡한 상황을 생각해야 한다."  왕동흥은 그제서야 정신을 차렸고, 모주석이 없으면 어떻게 할지를 생각했다.

 

사실, 화국봉의 상태도 왕동흥과 그다지 다르지 않았다. 아무도 일깨워주지 않았다. 그는 이미 함정에 빠진 줄도 몰랐고, "사인방"의 다음 차례 타도대상이 되었고, 지위도 지키지 못하게 될 것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섭검영은 이미 칼가는 소리를 들었다. 이번에는 그가 그냥 암시만 주지 않고 그자리에서 분명하게 화국봉에게 말하였다. 돌연히 "기존에 정한 방침대로 하라"는 말이 왜 나왔겠는가? 이것은 정치국에 전달한 것과 다르다. 6글자중에 3글자가 다른 것이다. 누가 누구에게 말했는가? 실제로, 당시에 섭검영은 화국봉 본인조차 "기존에 정한 방침대로 하라"는 말을 꺼냈었다는 것은 몰랐다. 왜냐하면 섭검영은 이미 모주석의 지시사항이 나올 때는 그가 병중이어서 그의 업무는 전부 진석련에게 넘겨서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화국봉은 그제서야 확연히 깨달았다. "기존에 정한 방침대로 하라"는 말을 떠드는 이유를 알았고, 이것이 그를 향한 것이라는 것도 알았다. 그가 깨닫지 못했으면 칼아래의 원귀가 되었을 것이다. 비록 같은 말을 자신이 인용한 적도 있지만, 그는 자신이 한 말을 수정해야할 필요가 생겼다. 모주석이 말을 한 적이 있건 없건간에, "사인방"에게 이 말의 특허권을 빼앗긴다면 안되는 것이다. 그저 자기가 얘기한 "과거의 방침에 따라 하라"는 말만이 유효한 것이다. 이것은 글자도 있고, 증거도 있다.

 

화국봉은 더 이상 "사인방"을 따르지 않고, "기존에 정한 방침대로 하라"는 말을 하지도 않았다. 다음날 9월 18일, 모주석 추도회가 천안문광장에서 거행되었다. 전중국은 모두 화국봉이 추도사를 읽는 것을 보았다. 한편에 서 있던 왕홍문은 고개를 빼들고 화국봉의 추도사원고를 보았다. 마치 그의 입에서 "기존에 정한 방침대로 하라"는 여섯 글자가 나오기를 바라는 것처럼. 그러나, 화국봉은 시종 이 말을 하지 않았다.

 

화국봉은 즉시 "기존에 정한 방침대로 하라"는 6글자를 없애는 일에 착수했다. 다시는 이 여섯 글자가 나오지 못하도록 하였고, 이 여섯 글자를 언급하는 자에게는 용서가 없었다. 먼저 타격을 받은 것은 천리나 떨어지고, 이 사정을 모르는 사람이었다. 즉, 유엔에서 중국대표로 발언한 외교부장 교관화였다. 1976년 10월 2일, 외교부장 교관화는 유엔에서의 발언원고를 화국봉에게 보내었고, 화국봉은 아무런 망설임없이 원고를 심하게 질책하는 지시를 내린다. "글중에 모주석의 유언을 나는 자세히 보았는데, 모주석이 친필로 쓴 것과 3글자가 틀린다. 모주석이 써서 내가 정치국회의에 전달한 것은 모두 '과거의 방침에 따라 하라'는 것이었다. 잘못 전달되는 것을 피하기 위하여 내가 삭제한다" 교관화는 이 일로 인하여 "사인방"타도시에 "사인방"을 도와서 유언을 조작한 방조범의 죄명을 얻게 된다.

 

섭검영: '사인방'을 상대하는데에는 빠름으로 늦음을 제압하는 수밖에 없다

 

사인방은 모주석이 화국봉에게 "과거의 방침에 따라 하라"는 말을 했다는 것을 부인한 적은 없다. 장춘교는 화국봉이 갑자기 "기존에 정한 방침대로 하라"는 말을 승인하지 않는 것을 본 후에, 왕동흥에게서 화국봉이 중앙계획회의 때 친히 "기존에 정한 방침대로 하라"는 말을 한 기록을 찾아낸 후, 기록을 보관하고 있던 왕동흥에게 말하였다: "모주석이 화국봉동지에게 써준 것은 '과거의 방침에 따라 하라'는 것이다. 이것은 그가 관련 성, 시의 상황을 보고할 때 한 말이다. 당연히 맞다. 주석이 말한 '기존에 정한 방침대로 하라'는 것은 우리가 당중앙과 모주석이 미미 결정한 방침과 정책에 따라 일을 하라는 것이다. 양자는 근본적으로 무슨 차이가 없다"

 

화국봉은 모택동이 "기존에 정한 방침대로 하라"는 말을 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다. "사인방"도 물러서지 않았다. "기존에 정한 방침대로 하라"는 것은 사인방에게는 구명줄이었다. 비록 진실한 구명줄이라고 하더라도, 화국봉은 "과거의 방침에 따라 하라"고 고집했고, "사인방"에게 있어서는 그들의 전가의 보도는 무슨 위력을 발휘할 수 없었다. 그래서, "사인방"은 즉시 여론도구를 동원했고, 양효가 서명한 글 <<영원히 모주석의 기존에 정한 방침에 따라 처리한다>>는 글을 써서 화국봉을 경고했다. "기존에 정한 방침대로 하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배반이라는 것이다. "어떤 수정주의분자도 감히 모주석이 기존에 정한 방침을 어기지 못할 것이며, 절대로 좋은 결과가 나오지 않을 것이다"라고 썼다.

 

"사인방"을 분쇄하는 데서 관건적인 역할을 한 것은 섭검영이다. 섭검영은 "사인방"의 정치음모를 잘 알았다. 그들은 반드시 "기존에 정한 방침대로 하라"는 문장을 내놓은 후 일을 벌일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사인방"은 한 손으로는 군대를 장악하여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려 했고, 다른 한 손으로는 제10기 3중전회를 준비했다. 이로써 회의상에서 다수를 차지하였으며, 첫번째로 섭검영, 이선념등 노혁명가들을 내몰려고 하였으며, 이후 쉽게 화국봉의 힘을 약화시키려고 하였다. 주요한 것은 문장으로 싸우는 것이었고, 그래서 시간이 필요했다.

 

섭검영은 "사인방"에 대응하려면, 반드시 빠름으로 늦음을 제압하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 생각에 따라, 중국공산당의 역사는 전례는 없었지만, 인심을 얻는 행동을 취한다. 즉, 경위부대의 '군사'수단으로 정치적인 적수를 제거하는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전국인민을 위하여 통쾌한 행위를 했고, 사인방은 축출되었다.

 

일은 비록 순조롭게 진행되었지만, "사인방"이 "기존에 정한 방침대로 한다"는 말을 고집하고 있던 것은 그들이 당시에 처한 역사적인 상황에 맞았었다. 실제로, 화국봉은 "기존에 정한 방침대로 한다"는 말을 한 적이 있을 뿐아니라, 그가 나중에 말한 "두개의 무릇"원칙도 바로 이 "기존에 정한 방침대로 한다"는 말과 같은 맥락인 것이다. 만일 "사인방"이 그의 위치를 위협하지 않았따면, 그리고 그가 "사인방"의 지원하에 제1인자의 의자에 앉을 수 있었다면, 그는 충심으로 "기존에 정한 방침대로 한다"는 말을 옹호하였을 것이다. 이것은 "두개의 무릇"원칙보다 훨씬 명백하고 분명하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은 자신의 역사적인 한계를 벗어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