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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정치/중국과 일본

일본은 왜 대경유전(大慶油田)을 발견하지 못하였는가?

by 중은우시 2006. 11. 4.

20세기에 자원, 특히 석유는 모든 국가가 확보하고자 하는 중요한 물자이다. 20세기초, 일본인들도 이것을 잘 알고 있었다. 일본이 중국을 침략했을 때, 동북지구에 대하여는 대규모의 지질조사를 실시했고, 광산자원을 기록하는 동시에, 유전에 대하여도 탐사하였다. 현재까지 알려진 자료에 의하면 일본인들은 옛 동청철로부근의 목단강, 요녕금주, 부신, 내몽고 자라이노얼, 하북성 풍녕일대에서 석유를 탐사했다. 그런데, 일본인들은 왜 대경유전은 못찾았을까?

 

일찌기 만철지질조사소의 참사로 일했던 일본인 지질전문가인 신대국태랑의 기록에 의하면, 1928년초, 당시 여러 방면에서 만주에 석유가 묻혀 있다는 흔적이 나타나서 일본인들은 석유를 찾기로 결정한다. 1929년 봄에 신대국태랑은 다른 한 명의 일본인, 10여명의 러시아인과 함께 현지의 가이드를 데리고 20필의 노새를 끌고, 동청철로를 따라 목단강 상류의 삼림지대부터 석유를 찾기 시작한다. 2개월여의 탐사를 통해서 아무런 성과를 얻지 못한다.

 

다음해 4월, 미국 하얼빈영사관에서 일하던 러시아후예의 미국인인 토리스키의 지적에 따라, 신대국태랑등은 기차를 타고 만주리로 가서 석탄광산에서 두번째로 석유탐사를 실시한다. 그들이 채광한 광물샘플을 대련으로 가져갔는데, 만철중앙시험연구소의 화학분석과 일본도쿠야마해군연료연구소의 분석을 거쳐 샘플에는 석유류의 역청이 있다고 결론내린다. 2개월후, 하얼빈의 러시아어와 일본어 신문에는 이번 발견을 보도하면서 "만철을 많은 경비를 들여 북만주에서 석유자원을 조사하고 있으며, 여러해를 거쳐 마침내 유전을 발견하였다. 이를 위하여 만철은 이미 3만여일엔을 투입하였다.운운" 당시의 북경정부도 지질전문가를 보내어 조사하였다.

 

"9.18"사변후, 일본제국주의자들은 동북지방을 점령하였고, 일본인들의 자원조사는 더욱 광범위하게 진행되었다. 만주리 자라이노얼일대는 계속 중요시되던 곳이었다. 그후의 3년동안 일본인들은 대량의 인력, 재력을 동원하여, 1200미터이상을 팔 수 있는 유정탐사기, 중력탐광, 지진계탐광등 선진적인 설비와 방법을 사용하여 석유를 찾았으나, 그들은 진정한 유전을 찾아내지 못하였다.

 

1939년 요녕부신에서 만주탄광주식회사는 석탄광산을 탐측하다가 석유층아래에서 석유류의 광물을 발견한다. 그러나, 채굴가치가 낮아 포기한다. 사실, 이곳은 해방후에 발견된 요하유전(遼河油田)과 단지 산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을 뿐이다.

 

1940년 8월, 일본석유회사의 조사부장 대촌선고는 "만주에서는 석유를 찾는 것이 이미 매우 힘들게 되었다. 역시 남쪽으로 가서 유전을 찾는 것이 좋겠다"고 말한다. 그리하여, 일본군부와 석유회사는 중국만주지역에서 석유를 찾는 계획을 포기한다. 1941년이 되어, 미국이 항공유의 수출을 금지하였으므로 일본군부는 매우 시급하여, 석유와 관련한 탐사대원을 모두 징용하고, 그들을 인도네시아의 수마트라등으로 보낸다. 동북지방에는 약간의 소형설비만 남긴다.

 

탐광기술의 면에서 당시 일본의 물리탐광기술은 아주 낙후되어 있었다. 1928년부터 미국에서 물리탐광기술을 배웠으나, 방법에 있어서는 반드시 광석이 나타난 후에야 지질구조를 조사할 수 있었다. 그래서 아주 작은 범위내에서만 광산탐사를 시행할 수 있었다. 중국만주지역과 같은 광대한 지역에서 탐사를 진행하려면 일반적으로 지진탐광의 방법을 사용하여야 한다. 일본인은 탐사방법에서 제한적이었다.

 

일본현대사에서 자조 보는 것은 "만일 당초에 대경유전을 발견했더라면 어쩌고 저쩌고.."라고 쓰여있는 것을 많이 보게 된다. 그들은 전쟁종결전에 대경유전을 발견하지 못한 것을 시종 유감으로 느끼는 것같고, 그 원인에 대하여 반성하고 있다. 동경공업대학교수인 삼천청은 "만주의 석유개발"을 회고하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대경유전을 찾지 못한 이유는 "전전의 일본의 천공의 깊이는 개략 700-800미터였다. 더 깊은 천공기술을 가졌는지는 모르겠지만 더 깊이 갈수록 더 어렵다. 듣기로는 실제로 천공을 하지도 못했다고 한다. 그리고 대경유전의 가장 얕은 유전층이 1000미터깊이이므로 아직 200미터가 부족하였다." 삼천청은 전쟁전의 일본의 천공기술이 충분한 깊이에 도달하지 못한 것으로 알고 있는 듯하다. 실제로는 대경유전의 첫번째 유정인 송기삼정은 마침 1357-1382미터의 사이에서 석유가 나왔다는 점에서 이 주장은 어느 정도 인정되는 측면이 있다.

 

그리고, 일본작가인 초류대장은 <<실록만철조사부>>에서 "석유탐광은 만철과 일본석유회사가 진행하였다. 흥안북성의 하이라얼에서 열하성의 이런 범위내에서 광범위하게 탐사했다. 일본석유회사는 심지어 상주주택을 건설하고 1000미터깊이의 석유공을 시추했다. 만철의 시추기술은 1800미터까지 가능했다. 이런 선진적인 시추기술에도 대경유전을 발견하지 못한 것은 매우 유감이다" 초류대장은 시추기술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깊이 시추하지 않았을 뿐이라는 것이다.

 

대경유전의 발견에 대하여, 중국의 지질대가 황급청 선생의 주장은 더욱 권위있다. 그는 "육지지층에서 석유가 생긴다"는 이론을 내놓은 사람이고, 대경유전의 주요한 발견자의 하나이다. 그는 일찌기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일본인은 동북에서 꼬박 30년을 찾았지만 유전을 찾지 못했다. 그들의 유전탐사기술은 우리보다 뛰어나다. 왜 발견하지 못했는가? 우리는 5년만에 대유전을 발견하였지 않는가. 그것은 그들이 육지지층에도 석유가 나올 수 있다는 점을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것이 일본인들이 대경유전을 발견하지 못한 또 하나의 해석이다". 이에 대하여, 일본지질사학자 소송직간도 탐사범위와 밀도가 충분하지 못했던 것 이외에 근본적으로 시추설비가 부족했다고 볼 수는 없고, 탐사개념과 탐사기술의 문제였다는 것이다.

 

일본인의 견해이든, 중국인의 해석이든 서로 모순되지는 않고, 서로 보완될 수 있다. 만일 황급청 선생의 해석에서 일본인이 과학이론상의 예견성이 결핍된 것을 말했다면, 삼천청의 견해는 일본인의 기술수준에서의 가행성이 부족했다는 것이고, 초류대장의 견해는 그저 주사위를 던지는 문제였다는 것이다. 이러한 예가 보여주는 것은 기술발전과 응용에 있어서 선진적인 이론이 선진적인 기술수단보다 중요하고, 이론이 이끌어주지 않으면 선진적인 수단도 의미를 잃는다는 것이다.

 

대경유전의 발견에 관하여 최근들어 일본에서는 하나의 풍문이 돌고 있다. 즉, 1920년에 일찌기 미국의 모빌석유회사가 대경유전을 발견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미국정부는 모빌석유회사에 이 발견을 공포하지 못하게 하고, 거꾸로 모빌회사로 하여금 중국만주에는 석유를 찾을 수 없었다고 발표하게 하였으며 중국에는 석유가 없다는 이론을 내세우게 하였다. 미국에서 이렇게 한 것은 당시 만주가 일본의 지배하에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일본은 90%의 석유를 미국에서의 수입에 의존하였는데, 미국은 일본이 석유를 가지는 것을 두려워하였고, 일본을 통제할 유효한 수단을 잃을 것을 두려워 하였다는 것이다. 일본인들은 비록 중국만주지역에서 석유탐사를 하였으나, 미국인들이 지나갔던 곳은 다시 가지 않았다. 그들은 미국인들이 석유가 없다고 한 곳은 진짜로 석유가 없다고 보았던 것이다. 누가 알았으랴. 일본은 미국에 속은 것이고, 미국인들의 중국빈유론에 속은 것이다. 그리하여 동북에서의 석유탐사작업을 중지하고, 동남아로 방향을 튼 것이다. 이런 주장은 추가 확인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