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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장개석)

장개석의 프랑스군단

by 중은우시 2007. 1. 3.

1945년 3월의 어느 날, 중국-월남 국경을 지키고 있던 중국군대진지에는 일대 소동이 일어났다. "일본군이 왔다. 모두 주의하라" 초병의 긴장된 고함소리와 함께 방대한 한 무리의 군대가 중국군대의 진지앞에 나타났다. 그런데, 이 '일본군'은 아주 이상했다. 그들은 복장이 흐트러져 있을 뿐아니라, 가족들을 이끌고 있었으며, 대부분이 백인종이었다. 그들이 가까이 다가온 후에야, 중국군대는 그들이 누구인지 확실히 알 수가 있었다. 원래 이들은 프랑스의 인도지나주둔 식민군이었다. 그렇다면, 이 군대는 어찌하여 이렇게 낭패한 모습으로 중국으로 도망쳐오게 되었는가? 근원은 5년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40년 6월, 프랑스는 독일의 전격전에 패배하였고, 새로 성립된 비시정부는 히틀러의 괴뢰가 되었다. 프랑스식민지를 오랫동안 노리던 일본으로서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이해 9월, 중국의 남방에서 온 일본군은 프랑스령 인도지나로 쇄도해 들어갔다. 히틀러의 동맹군의 침입앞에 인도지나에 주둔하고 있던 프랑스군은 감히 반항할 수 없었다.  일본군은 총탄하나 쏘지 않고, 프랑스령 인도지나의 전체 영토를 점령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일본군은 스스로 인원이 모자라는 점을 잘 알고 있었고, 전체 지역을 통치하기에 무리가 있다는 점을 잘 알았다. 그래서, 일본인들은 원래의 프랑스식민지군대를 이용하기로 결정한다. 일본군은 현지의 프랑스식민정부와 <<공동방어협정>>을 체결한다. 프랑스식민정부는 비록 일본군의 의도를 잘 알았지만, 협정을 체결하여, 어느 정도 체면을 보존하는 이외에 다른 방법이 없었다. 프랑스의 시시정부는 일본군의 인도지나에서의 행동에 대하여 그저 꾹 참고 있을 수밖에 없었고, 묵인하였다. 그래서 1940년 9월부터 1945년 3월까지, 인도지나에는 일본군과 프랑스군의 쌍두통치국면이 나타나게 된다.

 

1945년 3월초, 이런 괴이한 공존국면이 끝나게 된다. 2차대전이 말기에 접어들면서, 일본군은 태평양전투에서 계속 패퇴한다. 전력을 유지하기 위하여 일본군은 동남아지구의 전략물자를 약탈할 필요가 더욱 강해졌고, 인도지나에 잔존하고 있던 프랑스세력은 일본군이 마음대로 움직이는데 장애가 되었다. 일본군을 더욱 우려스럽게 한 것은 일반 동맹군이 인도지나에 상륙하면, 이 프랑스인들이 기회를 틈타 반격할 것이 두려웠다. 그렇게 되면 일본군은 앞뒤로 적을 맞이하는 결과가 될 것이었다.

 

그래서 3월 9일 밤, 일본군은 프랑스의 인도지나에서의 세력을 철저히 뿌리뽑기로 결심한다. 그날 밤 9시 20분, 일본군은 소위 "3.9정변"을 일으키고, 인도지나 전 지역의 프랑스군에 대하여 습격을 가한다. 프랑스군은 하노이, 하양, 양산등지에서 미약하게 저항한 것을 빼고는 3월 10일 오후, 대다수의 프랑스군은 일본군의 포로가 되었다. 프랑스의 사이공에 있는 총독부는 일본이 프랑스군 고위장교를 감금하는 포로수용소로 바뀌었다. 그러나, 월남 서북부 및 라오스의 일부분에 주둔하던 프랑스군은 일본군의 공세를 피했고, 이 프랑스패잔병들은 일본군의 추국을 피해 중국의 서남국경을 따라 도망쳤다. 그 중 대부분은 중국의 운남성 경내로 들어갔고, 양산의 일부분 프랑스군만이 광서의 십만대산으로 들어갔다.

 

이 수천명의 가족을 데리고 나타난 프랑스 패잔병들을 두고, 중국정부는 고민에 빠졌다. 당시의 "운남왕"인 용운(龍雲)은 장개석에게 이들 프랑스 패잔병들을 받아들이는 것은 좋으나, 반드시 그들의 무기를 수거하여, 양호위환이 되는 것은 막아야 한다고 건의했다. 동맹군과 장개석은 그러나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미국을 위시한 동맹군은 이 자들은 인도지나에서 오래 살았으므로, 현지 사정에 익숙할 것으로 보았다. 그래서 동맹군이 일단 반격을 하는 경우에는 이들이 아주 좋은 선봉대가 될 수 있다고 보았다. 장개석도 자신의 머리를 굴렸다. 당시 장개석은 바로 Stillwell사건으로 미국과 관계가 좋지 않았으며, 프랑스와 연합하여 미국에 대항하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일찌기 1944년 10월, 장개석은 드골의 자유프랑스정부와 외교관계를 회복하였고, 프랑스의 주 중경대사에게 일단 인도지나의 프랑스군이 일본군에 공격을 받고 중국으로 도망쳐오면, 중국은 형제와 같은 대우를 해주겠다고 약속한 바 있었다 .이로 인하여, 장개석은 이 프랑스 패잔병을 받아들이는 것을 동의했을 뿐아니라, 그들에게 무기를 계속 보유하도록 승인했다. 협상을 거쳐, 이 프랑스군은 중국육군총사령부의 지휘를 받는 명의상으로는 장개석의 "프랑스군단"이 되었다.

 

이후 프랑스군단은 중국경내에서 1년에 가까운 시간을 주둔했다. 이 기간동안 프랑스는 현지주민과 사이좋게 잘 지냈으며 매우 깊은 우의를 다졌다. 중국서남변경의 소수민족은 성격이 순박하고 손님대접을 열정적으로 하므로, 그들은 프랑스군을 먼 곳에서 온 친구로 생각했고, 생활에 있어서 여러가지 편의를 봐주었다. 한번은 한 프랑스 장교가 이질에 걸렸고, 며칠동안 설사가 멈추지 않았었다. 한 주민이 이를 알고는 밤에 떠나서 깊은 산에서 병을 치료할 수 있는 벌꿀을 따다가 주었다. 당시는 우기여서 산길이 험하고 미끄러웠는데, 이 주민은 여러 차례 미끄러지면서도 한 오래된 나무에서 벌집을 찾았다. 그가 벌집을 따려고 할 때, 놀란 벌들의 공격을 받았으나 결국 벌집을 캐낼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주민은 얼굴은 깊은 상처를 입었다. 독일군을은 이에 아주 감동했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항복을 선언했다. 동맹군의 규정에 따라, 당시 프랑스령 인도지나의 일본군은 장개석에 투항해야 했다. 그러나, 프랑스는 적극적으로 영미를 부추겨서 자기들이 다시 인도지나로 돌아갈 수 있도록 해달라고 요구했다. 자기의 이익을 위하여 영국과 미국도 프랑스의 요구사항을 들어주었다. 그러나, 프랑스 패잔병들이 돌아가는데는 중국측의 반대에 부딛쳤다. 특히 중국서남지방세력의 반대가 컸다.

 

중국의 입장에서 보면, 프랑스는 항일전쟁에서 전혀 힘을 보태지 않았을 뿐아니라, 오히려 장기간 일본의 침략도구로 사용되었는데, 이제 반파시스트 전쟁에서 막 승리하였는데, 그들은 여전히 이익을 챙기려고 한다고 보았고, 이는 참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 외에 중국에서는 프랑스의 식민지였던 월남이 독립하고 민족해방이 실현되기를 바랐다. 그래서 프랑스 패잔군은 할 수 없이 중국변경에 머물러 있었다. 이렇게 하여 일본군이 투항한 후 몇개월내에 프랑스가 일보 인도지나의 관리를 임명하기는 하였지만, 그러나 아무 것도 없는 정부가 되었고, 군대가 뒷받침을 해주지 못하였다.

 

이런 국면이 되자, 프랑스 주북베트남 프랑스군 사령관으로 임명된 싸랑은 아주 조급해졌다. 아무 것도 없는 사령관인 싸랑은 중국에 머물던 패잔군으로 역량을 강화할 필요가 컸다. 그래서 싸랑은 중경으로 와서 친히 장개석을 만났다. 회견시, 싸랑은 장개석을 높이 받들고 여러 가지 방법으로 장개석이 자신의 요구를 들어줄 수 있도록 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 때, 장개석은 프랑스군대를 베트남으로 돌려보내는데 대한 입장이 미묘하게 변화하였었다. 당시의 일본군의 항복을 받는 일이 기본적으로 완성되었으므로, 동북문제가 장개석의 가장 골치아픈 문제였다. 그는 국민당군대가 장기간 월남에 머무는 것을 원하지 않았고, 이 군대를 동북지방으로 보내고 싶어했다. 그리하여, 공산당의 군대와 동북지방의 지배권을 다투고 싶어 했다. 그래서 싸랑의 요구에 대하여 장개석은 더 이상 반대하지 않았다. 장개석의 입장이 누그러진 것을 본 싸랑은 즉시 프랑스군을 월남으로 빼냈다.

 

1946년 1월, 중국으로 도망쳐왔던 프랑스 패잔병은 마침내 인도지나로 되돌아 갔다. 당연히 인도지나로 돌아간 후에는 즉시 인도지나 인민들의 반항에 부딛쳤고, 그들 중의 많은 사람은 다시는 고향땅을 밟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