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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장개석)

장개석이 황포군관학교 교장의 직을 차지한 내막

by 중은우시 2006. 12. 18.

장개석이 황포군관학교의 교장이 된 것은 일반 사람들이 상상하는 것처럼 그렇게 순조롭게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황포군관학교 교장의 직위는 원래 장개석이 맡기로 되어 있던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최종적으로 이 직위를 차지한 것은 장개석이었다. 그는 이 직위를 맡기 위하여 아이디어를 짜내고 각종 수단을 사용하여, 여러 차례의 풍파를 거쳐 얻어낸 것이다.

 

1923년, 국민당은 소비에트러시아에 보내는 시찰단을 조직했다. 대표단의 단장은 장개석의 마음을 달래기 위하여인지, 손중산은 장개석에게 맡겼고, 그는 "손일선박사대표단"을 이끌고 소비에트러시아로 가서 군사를 시찰했다.

 

나중에 장개석이 황포군관학교 교장을 맡게 된 것은 소련파견대표단과 많은 관계가 있다.

 

1923년 8월 16일, 장개석 일행은 "신전환(神田丸)"을 타고, 상해에서 출발하여 대련으로 갔다. 여기서 기차를 타고 동북지구를 통해 국경을 벗어나서 시베리아철도를 거쳐 9월 2일 오후 1시에 모스크바에 도착했으며, 소련의 신식군대에 대한 현지시찰을 진행했다.

 

장개석은 12월 15일 오전 9시에 상해로 돌아왔고, 즉시 맹형 장정강(張靜江)을 방문한다. 그날 오후 손중산에게 <<러시아방문보고서>>를 부친 후에 배를 타고 봉화의 고향집으로 돌아간다.

 

손중산은 장개석의 이런 행동에 매우 불만이었다. 이기간동안 소련이 광주로 파견하는 상설대표 포라정(鮑羅廷)은 일찌기 도착해 있었고, 군관학교를 설립하는 일은 초미의 일이었다. 손중산은 장개석으로 하여금 군관학교 준비위원장을 맡게 하려고 하였는데, 장개석은 굳이 오지 않고 있었다. 손중산은 12월 30일, 장개석에게 전보를 보냈다. "형의 이번 일은 책임이 막중하니, 급히 광주로 와서 일체를 보고하고, 중국러시아합작방법을 기획하여 주기 바람"

 

군관학교 학생모집, 시험이 곧 닥치게 되었다.그러나, 광주에는 장개석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손중산은 화급해져서, 요중개, 왕정위, 호한민등으로 하여금 연속 6번의 전보를 보내어 장개석에게 광주로 오도록 재촉한다.

 

장개석은 전보를 받은 후, 계속 계구자암에서 2주를 더 머물렀고, 매일 향을 사르고, 조상묘를 돌아봤다. 1924년 1월 16일이 되어 광주로 돌아와 손중산에게 보고했다. 1월 24일, 장개석은 군관학교 준비위원장으로 임명된다.

 

이 때, 국민당 제1차 전국대표대회가 마침 광주에서 거행되었다. 광주내외는 경축분위기였고, 황포군관학교를 만든다는 소문이 급히 퍼져갔다.

 

장개석은 비록 국민당 제1차 전국대표대회에 참석하였지만, 165명의 대표중에서 그다지 드러나지 않는 지위였으며, 대회에서 뽑힌 24명의 중앙집행위원중에 장개석의 이름은 보이지 않았다. 후보중앙위원 17명의 이름중에도 임백거, 모택동, 장국도, 구추백등 공상당원들은 있었지만, 장개석의 이름은 보이지 않았다. 장개석은 절강성의 대표도 아니었다. 절강성대표는 6명이었는데, 3명은 손중산이 지명했고, 나머지 3명은 절강성의 당원들이 선거로 선출했다.

 

장개석은 마음속으로 불만이 가득했다. 그는 손중산이 그를 군관학교 준비위원장으로만 임명하고, 그가 군관학교 교장이 될 것이라고 명확히 밝히지도 않았다. 게다가 준비위원회에 참가하는 사람들 중에는 몇몇의 공헌도 높고, 자질도 뛰어난 사람들이 들어 있어서 그가 교장이 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닌 것처럼 보였다. 그는 화가나서, 1924년 2월 21일 사직을 청하는 글을 남기고, 인사도 없이 떠나버렸다.

 

장개석이 처 진결여를 데리고 상해 서장로의 장정강의 집으로 갔을 때, 장정강은 매우 이상하게 생각했다. 군관학교는 3월 21일에 입학시험을 거행할 계정인데, 입학시험을 주관해야 할 위원장이 광주의 황포에 있지 않고, 상해로 날아오다니. 그는 이해되지 않아서 장개석에게 물었다. "개석, 중산선생은 너를 중시하고,너에게 군관학교 일을 맡겼으며, 나중에 국민당의 명맥을 너에게 위임할 것이니, 책임이 중대하니, 너는 전력을 다하여 일을 해야 하지 않겠는가? 왜 이렇게 상해로 왔는가? 만일 자금이 부족해서 그런 것이라면 내가 좀 도와주겠다."

 

"정강형,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고 있습니다. 중앙상임위원회는 손중산 선생에게 교장을 겸임하게 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손중산 선생은 정잠(程潛)과 허숭지(許崇智)를 마음에 두고 있습니다. 나와 이제심(李濟深)은 그저 부교장을 하도록 생각하고 있습니다. 나는 다른 사람을 위하여 일을 해주고 있는 격입니다"

 

장개석의 이 말에 장정강은 왜 그가 화가나서 상해로 왔는지 분명히 알게 되었다. 물러나겠다는 것으로 손중산에게 압력을 가하고, 협박하는 것이었던 것이다.

 

"너는 돌아가라" 장정강은 자기의 맹제(盟弟)가 이처럼 억울한 일을 당하자 탁자를 치며 말했다. "내가 즉시 손중산에게 글을 쓰겠다. 교장직은 네가 맡지 않으면 안된다. 내 말을 그는 듣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분명히 너에게 교장직을 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미 총리에게 사직서를 제출했습니다. 먼저 봉화로 가서 돌아가는 사정을 봐서 행동하겠습니다"

 

"맞다. 그가 너에게 교장직을 주지 않으면, 나오지 말아라"

 

장개석은 원래 그가 떠나고 나면 군관학교를 설립하는 일은 완성되지 않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장개석이 화가나서 떠난 후에 손중산은 즉시 요중개에게 장개석을 대신하여 계속 군관학교를 설립하는 일을 진행하도록 지시했다. 동시에 2월 29일 친히 장개석의 복직을 알리는 전보를 보냈다. "군관학교는 형이 맡아서, 설립하여야 함. 현재 준비작업이 이미 진행되고 있고, 경비도 마련되었으며, 군관 및 학생도 멀리서 찾아오는 자가 수백명을 넘었으며, 많은 사람들이 형이 군관학교 일을 주재하기를 바라고 있으니, 이런 열성을 지닌 사람들이 실망하여 돌아가지 않도록 하기 바람"

 

3월 2일, 장개석은 손중산에게 장문의 편지를 쓰고, 곧 돌아갈 것이라고 말하였지만, 시기가 성숙되기 전에는 돌아갈 생각이 없었다.

 

장개석이 떠난 후, 황포군관학교의 일체의 준비작업은 요중개가 처리했다. 그러나, 장개석의 이름을 걸고 있었으므로, 그가 돌아오지 않으니 처리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그러나, 장개석은 계속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요중개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3월 26일 장개석에게 전보를 보냈다. "개석형 보시오. 돌아올 것이오 말 것이오. 즉시 답변바랍니다. 아니면 제가 스스로 결정하겠습니다" 그 말에 담긴 뜻은 올 것인지 말 것인지 분명히 대답하라는 것이고, 온다고 말하고 떠나지 않는 짓은 하지 말라는 것이다. 안오면 이쪽에서 알아서 처리하겠다는 의미이다.

 

장개석도 알고 있었다. 군관학교가 그의 사직으로 설립되지 못하는 것이 아님을. 그래서 완곡한 글로 요중개에게 답신을 보냈다. "보내신 서신은 잘 받아보았습니다. 동생은 반드시 광주로 갈 것이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전보에서 학교업무에 대하여 몇가지 처리를 하였다.

 

장개석은 또 날짜를 끌었다. 손중산은 더 이상은 기다릴 수 없었다. 부득이 월군총사령이면서 장개석의 맹형인 허숭지를 봉화로 보냈다. 무슨 일이든 즉시 돌아오라. 그렇지 않으면 손중산이 화를 낼 것이라고 말했다.

 

허숭지는 아주 엄숙하게 장개석에게 말했다. "네가 즉시 군관학교로 돌아오지 않으면, 좋은 기회를 잃게 되는 것이다. 손선생은 이미 말했다. 네가 이번에 나와 함께 돌아오지 않으면, 교장직은 다른 사람을 생각하겠다고"

 

허숭지는 눈빛을 빛내며 장개석의 얼굴을 보았다. 그리고 시기가 되었다고 생각하고는 말을 돌렸다. "그러나 선생은 너를 아주 아낀다. 원래 너에게 학교를 맡기고 군을 맡기려고 하였다. 게다가 너의 맹형 장정강이 서신을 보내고 전보도 보냈다. 그래서 선생은 너를 교장으로 삼기로 결정했다"

 

여기까지 듣고서야 장개석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자기가 원하는 것을 다 얻었다는 것을 알았다.

 

장개석은 여러 사람의 호응속에 남으로 돌아갔다. 결국 1924년 4월 21일 광주로 갔고, 26일 황포로 가서 군관학교일을 처리했다.

 

5월 3일, 손중산은 정식으로 장개석을 황포군관학교 교장 겸 월군참모장에 임명했다. 그리고, 그에게 군관학교의 인사, 재정상의 권한을 많이 주었다. 요중개는 5월 9일 황포군관학교의 중국국민당대표를 맡았고, 손중산은 스스로 군관학교의 총리를 겸임했다.

 

손총리, 요당대표의 아래에 장개석은 3위의 인물이었다. 다음 해에 손중산, 요중개가 차례로 사망하면서 장개석은 진정으로 황포군관학교의 최고책임자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