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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장개석)

장개석-장경국 부자승계의 내막

by 중은우시 2007. 1. 14.

장경국-장개석 부자 

 

 

작자: 왕행복(汪幸福)

 

장경국이 대만에서 장개석의 후계자가 된 건에 대하여 말들이 많다. 많은 사람들은 장개석이 노인들을 제거하고 아들을 후계자로 삼기 위하여 길을 닦았다고 말한다. 사실, 장개석이 아들에게 후계를 맡기기 위하여 정치적인 거래를 하였고, 동시에 다른 사람의 입을 막았다.

 

1940년대말에 장개석이 대륙에서 대만으로 데려간 군정요인들은 대만의 거의 모든 관직을 독차지 했다. 대만출신인사들은 과장의 직위를 하나 얻기도 쉽지 않았다. 이것은 대만으로 도망온 대륙출신 군정요인들과 대만출신인사들간의 모순을 격화시켰고, 대만의 민중들도 아주 불만이었다.

 

1950년대에서 1960년대의 기간동안, 미국일본의 두 나라 특히 일본우익정부는 여러 채널을 통하여 대만당국에 압력을 가하였다. 장개석으로 하여금 대만성장의 직위를 대만인에게 하도록 하여, 모순을 완화시키라고 하였으며, 오삼련(吳三連), 황조금(黃朝琴), 사동민(謝東閔)등을 극력 추천했다. 아들을 후계자로 키우려고 생각하고 있던 장개석은 계속하여 핑계를 대고 빠져나갔다.

 

1971년 년말이 되자, 노련한 장개석은 아들이 후계자로 되는데 장애가 되는 세력은 이미 다 제거했다고 보고, 게다가 본인의 나이도 많았으며, 아들 장경국도 이미 60세가 되었으므로, 후계에 관한 일을 의사일정에 올리기로 결정하였다.

 

1972년 2월말, 장개석, 송미령부부는 장경국을 데리고 대만남부의 일월담(日月潭)에서 휴식을 취했다. 그들 일가는 일월담 함벽루(涵碧樓)에서 이틀을 머물렀다. 장개석은 시종에게 대만성의회의장 겸 대만출신정객인 사동민과 남투현장(南投縣長) 임양항(林洋港)을 일월담으로 불러서 만났다.

 

장개석의 접견은 표면적으로는 지방업무에 대한 보고를 받는 것이었지만, 실제로는 두 사람의 장씨집안에 대한 충성도를 보는 것이었다. 마지막으로 장개석은 특별히 한 가지를 물었다. 장경국이 그를 따라 대만으로 와서 일을 한지, 1,2십년이 되었는데, 사회에서 장경국을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것이었다.

 

사동민은 지방정치계에서 여러해를 굴렀고, 아주 말을 잘했다. 장개석이 제기한 문제에 대하여 특히 장경국의 문제에 대하여 사동민은 아주 흡족하게 답변했다. 그리고 이 기회를 빌어 장개석과 장경국에 대하여 크게 아부성의 발언도 하여, 장씨부자를 아주 기쁘게 해주었다.

 

이번 면접을 통하여, 장씨부자는 사동민이 장씨집안에 충성하며, 믿을만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믿고 이용할만하다고 결정했다. 만일 그를 대만성장으로 발탁한다면, 국민당과 장씨집안에도 도움이 될 것이고, 장경국의 후계구도에도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후, 장개석은 장경국과 관계가 아주 좋은 총정전부 부주임 왕승(王昇) 상장을 불렀다. 그리고 그에게 말했다. 요즘 사회각계에서 자주 장경국에게 '행정원장'을 맡기라는 말이 있고, 그리고 천여명의 국민대회 대표들이 연명으로 글을 올렸고(사실은 장개석이 배후에서 기획한 것이다), 대만성의외의장인 사동민의 바람도 아주 강렬하여, 그는 여러차례 고위층회의에서 장경국을 추천했고, 장경국이 대임을 맡을 수 있다고 말했다고 하였다.

 

그는 또한 왕승에게 "이미 사회에서 장경국을 이토록 모시니, 너는 무봉으로 가서 사동민을 만타라. 그로 하여금 정식 추천서를 당중앙에 보내도록 하여 모든 사람들이 장경국이 행정원장을 맡는 것을 인심이 원하는 바로 하여라. 서신을 설득력있게 만들기 위하여, 먼저 사람을 찾아서 초안해서 가는 것이 좋겠다. 그러나, 내가 그렇게 말하였다고는 하지 말라"

 

왕승은 특무출신으로, 장씨부자와 2,3십년의 내왕이 있었다. 장개석의 뜻을 그는 한번 듣고는 바로 알아차렸다. 그래서 즉시 말했다. "총통께서는 안심하십시오. 제가 즉시 사동민을 만나겠습니다. 그가 추천서상에 서명하고 날인만 하면 제가 바로 가지고 돌아오겠습니다"

 

왕승은 즉시 글쓰는 사람을 찾아서 사동민의 명의로 추천서를 한 장 초안했다. 추천서에는 장경국이 "재덕을 겸비하고, 지혜와 용기를 모두 갖추었으며, 어려움중에 나라를 일으키고 보필한 뛰어난 인재"라고 극찬하였다. 또한 "경국선생은 이미 여러 사람들의 중망을 얻고 있으니, 전국 상하에서 모두 천거하니 이것은 민심이 원하이다. 그러니 민의에 따라, 민심을 안정시키는 것이 큰 지헤요 큰 사랑이다. 실로 만민이 칭송할 위대한 업적이 될 것이다"라고 까지 하였다.

 

왕승은 추천서초안을 가지고 무봉으로 가서 사동민에게 온 뜻을 알린 후 추천서를 사동민에게 보여주었다. 사동민은 한번 본 후에 장개석이 지시하였다는 것을 알아차렸고, 즉석에서 '국가'를 위하여 인재를 추천해주겠다고 동의하고, 추천서에 서명날인하였다.

 

왕승은 이어서 말했다. "당신이 동의한다면, 여기 현지에서 글을 잘 쓰는 사람을 골라서 추천서를 그대로 베껴서 다시 써주십시오"라고 한다.

 

사동민은 즉시 성의회에서 쓰는 공용편지지에 그의 비서로 하여금 베끼게 하였고, 맨끝에 자기의 도장을 찍었다.

 

헤어질 때, 왕성은 사동민에게 당부했다: 이 일을 중대하므로, 기밀을 요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사의장은 오늘 저와 아주 협조를 잘해주었으니, 제가 돌아가면 반드시 총콩과 장경국에게 사실대로 보고드리겠습니다. 내 생각에는 이 일이 잘 되면, 총통과 장경국이 장래에 당신을 홀대하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장경국은 사동민의 추천서를 보고 매우 기뻐하였고, 왕승을 한껏 칭찬해주었다.이어서 장경국은 추천서를 장개석에게 보여주었으며, 장개석도 매우 만족해 하였다.

 

다음 날, 장개석은 이 서신을 국민당중앙당비서장인 장보수(張寶樹)에게 건넸다. 그러면서 이 서신은 사동민이 사람을 시켜 타이페이로 보내온 것이라고 한다. 사동민이 '국가'의 대사에 관심이 많고, 그의 애국하는 마음은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하며, 다음번 중앙상무위원회에서 이 추천서를 읽도록 요청한다.

 

1972년 5월 26일, 국민당은 중앙상임위원회를 개최핸다. 회의전에, 중앙당부는 각 상임위원에게 회의내용을 고지한다. 회의가 시작한 후 반시간쯤 지나서, 장개석은 장보수에게 사동민의 추천시를 부총통 겸 행정원장 엄가금에게 보여주게 한다.

 

엄가금은 추천서를 본 후, 장개석이 아들을 후계자로 삼으려는 것을 알았다. 비록 기분이 좋지는 않았지만, 그는 이런 일은 자신이 막을래야 막을 수 없다고 생각하고, 그저 물흐르는대로 따르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렇게 하여 주동적으로 자리를 내놓아 장씨부자의 욕망을 만족시켜주기로 한다. 그리고자신은 나이가 많으므로 더 이상 바라는 것이 없다고 생각한다.

 

그리하여, 그는 장개석을 곁으로 가서 낮은 목소리로, "총통, 그럼 저는 오늘 부총통과 행정원장을 사임하겠습니다. 그리고 장경국 선생이 저를 대신하여 직무를 행하도록 추천드리겠습니다."

 

장경국은 엄가금에게 이렇게 말했다. "부총통은 취임한지 6일밖에 되지 않았으니 사임할 수 없고, 당신은 그저 행정원장만 사임하면 된다"

 

그래서, 중앙상임위원회는 회의전에 임시의사일정을 넣어서 사동민의 추천서와 엄가금의 행정원장사임에 대한 것을 논의하고 장경국에게 행정원장을 맡기기로 지명한다.

 

장보수는 추천서를 읽은 후, 회의장은 아무 소리가 나지 않았다. 아주 돌연한 일이었으므로 회의참석자들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 엄가금이 말을 마친 후에도 회의상에서 아무도 말하는 사람이 없었다. 장개석은 분위기가 싸늘하자, "음부총통의 제안에 찬성하는 사람은 자리에서 일어서 주십시오"라고 말한다.

 

회의에 참석했던 중앙상임위원들은 장개석의 권세에 눌려, 모두 일어났다. 사동민이 나중에 얘기한 바에 따르면, 장보수가 그의 추천서를 읽고 있을 때, 장씨부자는 모두 얼굴에 미소를 띄고 있었고, 엄가금은 그다지 즐거운 표정이 아니었다.

 

그는 또한 이 추천서가 엄가금에게 죄를 짓는 일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고 한다. 엄가금은 원래 그의 상사였고, 엄가금이 대만성주석을 할 때, 사동민은 성정부의 비서장을 하였으며, 두 사람의 관계는 매우 좋았었다. 그런데 자신이 지금 이렇게 해버리게 되니 엄가금에게는 미안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규정에 따라. "행정원장"은 원래 총통이 지명해야 하는데, 장개석은 외부의 말들이 많을 것을 두려워하여, 엄가금으로 하여금 제안하게 한 것이다.

 

엄가금을 위로하기 위하여, 장개석은 엄가금을 별도로 찾아서 말하였다. "당신이 굳이 짐을 무겁게 질 필요가 없다. 그리고 이후에 절대 섭섭하게 대하지 않겠다"고 하였다. 엄가금은 원래 관직에 대한 욕심이 그다지 크지 않았고, 비교적 본분을 지키는 사람이었다. 장개석이 이렇게 위로하자, 마음 속에 품고 있던 불만도 없어졌다.

 

이렇게 대만역사상 처음으로 아버지가 총통을 하고, 아들이 행정원장을 하는 특수한 정치구조가 나타났다. 일시에 중외매체는 장씨부자의 이런 방식에 대하여 공격하기 시작했다.

 

국민당 중앙상임위원회는 장경국의 임명후에 장개석이 이어서 두 가지 조치를 취하였다. 하나는 국민당 중앙선전부에 <<중앙일보>>, <<중화일보>>와 <<연합보>>에 글을 실어 장경국의 재능과 덕망을 칭송하게 하였고, 다른 하나는 국민당의 입법위원 오춘청을 동원하여 입법원에서 서면선전원고를 만들게 하였으며, 엄가금의 행정원장 사임을 칭송하게 하였다. 이로서 일부 입법위원의 불만정서를 가라앉혔다. 결과적으로 입법원은 장경국을 임명할 때, 408표중에서 381표를 얻어서 순조롭게 통과되었던 것이다.

 

장경국의 후계구도에 큰 공을 세운 사동민은 장경국이 결국 보답하였다. 1972년 6월 1일, 장경국이 행정원에 취임선서를 할 때, 사동민을 대만성주석에 임명하였다.

 

이후, 장개석은 친히 사동민을 접견하고, 그의 행정혁신을 위한 노력을 칭찬하였다. 장개석은 사동민에게 암시를 주었다. 그는 일관되게 대만의 지방인사를 중시하고 있으며, 그가 임직기간중에 열심히 하기만 하면, 나중에 또 발탁될 것이라고. 장개석의 이 면담과 격려에 사동민은 감격하여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장경국의 행정원장직에 큰 공을 세운 왕승에 대하여도 장개석은 잊지 않았다. 그를 즉시 총정전부주임에 임명하고 계급도 상장에서 이급상장으로 승진시켰다.

 

사동민은 대만성주석이 되었는데, 미일 양국도 만족해 했다. 이 조치는 대만사회의 모순을 완화시키는데 도움이 될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장경국의 행정원장 취임에 대하여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1975년 4월, 장개석이 병사했다. 엄가금이 총통을 승계했다. 그러나, 장경국이 국민당중앙위원회 주석이므로 실제대권은 그의 손안에 있었다. 엄가금도 자신이 과도기적 인물이라는 것을 잘 알았다. 그래서 가급적 일에 관여하는 것을 줄였다.

 

사동민의 은혜에 대하여 장경국은 계속 잊지를 않았다. 1978년 3월, 장경국이 제6기 총통에 임명되었을 때, 사동민을 부총통에 임명했다. 5월 20일 사동민은 장경국과 함께 취임선서를 했고, 국민당이 대만으로 도망친 후 대만출신으로서는 최고위직에 오른 사람이 되었다.

 

당시의 장씨집안이 한 이 정치적 거래에 대하여 사동민은 계속 침묵을 지켰다. 1999년 4월, 말년의 사동민은 자기의 남은 날이 얼마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는 이 '최고기밀'을 그의 전기를 쓰던 대만학자 구가홍(邱家洪)에게 말해주었다. 이로 인하여, 구가홍이 대만목면국제사업공사가 출판한 <<정치호정담박심--사동민전>>에서 사동민은 그 때 한 일을 아주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었으며, "대만의 안정과 발전을 위하여, 시대를 긋는 큰 공헌을 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고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