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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한국/한중관계

만주족의 입장에서 쓴 정묘호란, 병자호란 (II)

by 중은우시 2006. 10. 23.

천총10년(1636년) 4월, 청태종은 황제로 칭한다. 국호를 대청(大淸)으로 바꾸고 연호를 숭덕(崇德)으로 정한다. 조선은 청태종의 황제즉위식에 나덕헌(羅德憲), 이곽(李廓)등의 사신을 심양으로 보내어 축하한다. 그런데, 황제에 대한 대례를 거행할 때, 나덕헌, 이곽은 무릎꿇는 것을 거절하여, 청태종은 격노한다. 이것은 조선국왕이 일부러 무례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조선에 국서를 보낸다. "네 왕은 스스로 죄를 뉘우친다면, 자제를 보내어 인질로 삼게 하라. 그렇지 않으면 짐은 몇월며칠에 대군을 이끌고 너희 국경에 임할 것이니라"

 

12월 초이틀, 청태종은 친히 10만대군을 이끌고 조선을 정벌한다. 병력은 직접 조선의 수도인 한양을 겨냥한다. 조선의 군신은 "상하가 모두 어찌할 바를 모르고, 도성의 사대부는 노인과 어린아이를 데리고 피난갔으며 곡성이 끊이지 않았다" 이 때 조선국왕(인조)은 최명길등을 청나라병영으로 보내어 협상을 하면서, 병사들의 진군을 늦추고자 하였다. 다른 한편으로는 왕비, 왕자 및 대신의 처자를 다시 강화도로 보내어 일시 피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자신은 문무백관을 이끌고 남한산성(한양의 남쪽 30여리)에 들어가 방어하게 되며, 각 지역에서 군대가 한양으로 오기를 기다렸다. 청나라 군대는 남한산성을 포위한다.나무를 베어서 목책을 만들고, 성을 둘러싸서 외부와의 연락을 차단한다. 산성내에는 양식과 물자가 부족하여, 말을 죽여서 먹기도 하고, 지방에서의 군사가 오기를 기다렸으나, 모두 청나라 군대에 패배하고 만다. 조선의 군신은 그저 고성에서 앉아서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숭덕2년(1637년) 정월 초이틀, 청태종은 조선국왕에게 조유의 형식으로 서신을 보낸다. 조선을 신하국으로 보고, 먼저 문제를 일으켰다고 질책한 후, 협박하여 말하기를 "짐이 이번에 온 것은 특히 의로운 전쟁을 일으킨 것이다...만일 거절한다면 살육할 것이다. 나를 따르는 자는 품어줄 것이나, 도망치는자는 반드시 붙잡을 것이다" 조선국왕은 신하들과 대책을 협의하나 신하를 칭할 수는 없다고 결정한다. 그래서 평등한 방식으로 글을 써서 회신한다. "조선국왕은 대청국관온인성황제에게 삼가 말씀드립니다. 작은 나라가 큰 나라에 잘못을 저질렀고, 스스로 병화를 불러일으켰습니다. 외로운 성에 갇혀서, 위기가 임박했습니다...정묘년에 하늘에 서약한 바를 생각하하면, 작은 나라의 생령의 명을 긍휼이 여기시어 작은 나라가 새로 태어날 수 있도록 허용해주시면, 작은 나라는 예전을 잘못을 씻고 지금부터 새로 시작할 것입니다. 만일 궁방한 병사를 벼랑끝으로 몬다는 죽음으로 스스로를 기약할 수밖에 없습니다" 조선국왕은 청나라의 답서를 기다리지 않고 최명길등에게 명하여 다시 서신을 가지고 가도록 하였다. 글에는 사정하는 내용이 대부분이었고, "작은 나라가 바닷가의 구석에 있어 시서나 알지 병사를 몰랐고, 약한 나라가 강한 나라를 따르는 것은 이치에 맞는 것이며, 군신과 부자가 오랫동안 고성에 갇혀 있어 궁박하기 그지없습니다. 바라건데 대국에서 용서하시어 스스로 새롭게 날 수 있도록 해주시면, 작은 나라의 군신은 감격할 것입니다. 천하의 사람들이 이를 듣는다면 대국의 위신에 승복하지 않는 자가 없을 것입니다"라고 썼다.

 

청태종은 조선군신의 화의요청이 간절하고, 전혀 싸우려는 의지가 없는 것을 보고는 그들을 핍박하여 항복을 강요하고자 하였다. 망월봉에서 백기를 들어 항복하라는 글자를 써서 남한산성에 보이도록 하였다. 그리고 조선국왕에게 서신을 보고, "이제 너희들은  살고자 한다면, 성을 나와서 명을 받으라, 죽고자 한다면, 역시 성을 나와서 한번 싸우자" 조선국왕은 형세가 여의치 않자 사신을 보내어 서신을 썼고, 청태종에게 "폐하"라고 써서 자신을 신하로 낮추었다. 그리고 "모든 번국들이 합쳐서 존호를 올리니 하늘과 사람이 모두 귀속되었습니다"라고 써서 청태종에 대하여 황제로 칭하였다. 다만 "포위를 풀어주지 않으시고, 황제의 노함이 가라앉지 않았으니" "성을 열고 나가서 명을 기다릴 수는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청태종은 조선국왕의 이러한 청을 받아들이지 않고, 잉어얼다이등을 보내어 조선국왕에게 "성을 나와서 짐을 배알하라. 하나는 그대가 진심으로 항복하는 것을 보고자 함이고, 다른 하나는 그대에게 은혜를 내리고자 함이라, 이제 너희나라의 주인이 되었으니, 병사를 되돌린 후에 인의와 신뢰로써 천하에 보일 것이오, 만일 계책으로 그대를 유인하는 것이라면 어떻게 천하에 신의를 보일 수 있을 것인가?" 그날 조선국왕은 답서를 써서 여전히 "성을 나가서 명을 받지는 못하겠다"고 하였다. 서신에서는 "오늘 성안의 백관과 백성들이 명을 받드는 것에 대하여 논의하였는데, 모두 동의했다. 그러나 성을 나서는 것에 대하여는 모두 우리나라에 종래에 없는 일이므로 죽음으로 기약하며 나가고자 하지 않았다. 만일 대국에서 계속 고집하신다면, 그저 시체로 쌓인 빈 성을 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청태종은 잉어얼다이로 하여금 조선의 국서를 돌려보내게 하고, 동시에 화포로 성을 공격하게 한다. 그리고 사람을 보내어 조선국왕에게 통보한다. 청나라 군대는 이미 강화도를 점령하였고, 종실과 비빈 및 문무백관의 부인들이 모두 포로로 잡혔다고. 조선국왕과 군신은 이 소식을 듣고는 이미 대세가 기울었음을 알고 사신을 파견하여 청태종에게 성을 나가서 항복하겠다고 한다. 청태종은 답서를 보내어 항복의 조건 17개항을 제시한다. 주요 내용은 명나라와 교왕을 끊을 것. 큰 아들과 또다른 한 아들을 인질로 보낼 것, 명나라의 연호를 사용하지 말 것, 청나라를 받들고 매년 1회 진공할 것, 황금백냥/백은천냥/백우포200필/각색면세2000필/각색세마포400필/각색세포만필/쌀만포등등을 진공할 것, 조선측에서는 모든 조건을 무조건 받아들였다. 조선국왕은 군신을 이끌고 남한산성에서 나와 도보로 한강동안의 삼전도(즉, 마전포)로 가서 청태종에게 투항하였다. 청태종은 항복을 받은 후 병사를 돌려가고 도르곤등으로 하여금 대군을 이끌고 포로와 재물을 가지고 돌아오게 하였다. 그리고, 슈투어(碩托), 공유덕(孔有德), 경중명(耿仲明), 상가희(尙可喜)등으로 하여금 가도에 있는 명나라군대를 치도록 하였다.

 

청태종의 두번째 조선정벌전쟁은 조선국왕으로 하여금 '성하지맹'을 체결하도록 하였고, 철저하게 청나라에서 명을 칠 때의 뒷근심을 없앨 수 있었다. 이때부터 조선은 신하국으로 칭했으며, 명나라와 관계를 단절하였고, 청나라의 속국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