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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청 후기)

청나라 군대가 팔국연합군에 패배한 원인은?

by 중은우시 2006. 11. 22.

사서의 기재에 따르면 1900년 하반기부터 1901년 상반기까지의 1년간은 중국의 대지에 화약냄새가 넘쳤다. 팔국연합군의 함대는 광주, 복주, 상해, 청도, 여순등 항구를 점령하고, 장강을 타고 올라가 중경에 까지 이르렀다. 북방의 직예(지금의 하북성), 산동등의 성에서는 의화단, 청나라 관군, 팔국연합군이 서로 어울려 싸웠다. 7월에 천진이 함락되고 8월에는 북경이 함락되었으며, 조정은 관군을 이끌고 황망히 서쪽으로 도망치게 된다.

 

- 음력 9월 15일, 팔국연합군은 보정(保定)에서 군사법정을 조직하여 정옹 위규항, 왕점괴등 세 사람을 참수한다.

 

- 9월 24일, 발더시(Waldersee)는 처음으려 혁광, 이홍장을 만나 팔국연합군이 직예에서 겨울을 날 것이라고 통보하고, 청나라 군대에게 직예를 떠나라고 요구했다.

 

- 10월 19일, 발더시의 주창에 따라 각국연합군의 지휘관으로 "북경관리위원회"를 조직하고, 치안, 위생, 맨정, 재정세무등을 담당한다.

 

이때 팔국연합군은 얼마의 병사를 데려 왔는데, 천진에서 8월에 병사를 이끌고 북경으로 올 때, 인원은 16000여명이었다. 그런데, 이 만육천명의 인원으로 10일만인 8월 14일에 북경을 함락시키고, 청나라 황제를 쫓아낸다. 그런데, 당시 북경성을 지키는 방어군(관군. 의화단 불포함)은 3만여명이었다.

 

그렇다면, 당시 팔국연합군의 무기가 청나라군대보다 뛰어났는가? 현재 남은 자료중, 팔국연합군이 청나라의 무기고에서 압수한 무기 목록이 있는데, 거기에는 신식대포, 신식총이 가득 들어 있었다. 그 총들은 연합군의 병사들에게 배급한 것보다 신식이었다.

 

병사도 많았고, 무기도 그다지 차이나지 않았는데, 왜 이렇게 쉽사리 팔국연합군에게 패퇴한 것일까? 이것은 그저 전투력이 극히 낮았다는 것으로밖에 설명이 되지 않는다. 의화단은 여기서 말하지 말기로 하자. 도창불입(刀槍不入, 부적과 내공으로 칼이나 총알이 들어오지 않는다고 믿었음)으 ㅣ미신을 믿었던 오합지돌이니까.

 

관군만 놓고 본다면, 갑오전쟁(청일전쟁)에서 패배하여 북양수군이 전멸한 이후 청나라정부는 새로운 군대를 완전히 서양의 총과 서양의 장비로 갖추게 된다. 이 군대를 "신군(新軍)"이라고 부르는데, 공식 명칭은 "무위군(武衛軍)"이다. 무위군은 청나라 군대의 전통에 따라, 전군(前軍), 후군(後軍), 좌군(左軍), 우군(右軍), 중군(中軍)으로 나뉘었고, 매군마다 1만여명으로 총 5만명이 있었다. 이 때, 이들중 우군은 위안스카이(원세개)가 거느리고 산동에 가 있었고, 좌군은 송경(宋慶)이 거느리고 산해관에 가 있었다. 나머지, 전, 후, 중군은 북경과 천진 일대에 배치되어 있었다. 북경성내에는 이외에 궁정수비대와 팔기친병이 배치되어 있었는데, 경성내의 이 만여명의 정예관군은 1000명의 수비대원도 갖추지 못한 외국대사관구역을 공격하였는데, 1달여가 지나도록 함락시키지 못하고 있었다. 외국대사관구역에는 여전히 해당국가의 국기가 나부끼고 있었다. 

 

전투력이 저하된 근원에는 부패가 있다. 청나라말기의 정치부패, 관료부패, 군기부패는 모두가 아는 바와 같다. 역사서를 읽다보면 상층부터 하층까지 모두 서양에 잘보이려고 했고, 암중으로 서양과 결탁했다.

 

첫번째 사례로는 6월 19일 청나라 정부가 선전포고를 한 후, 대사관을 공격했으나 함락시키지 못했다. 7월 15일, 천진이 함락되었다는 말을 듣자, 서태후는 급히 명을 내려 각국 대사관에 수박등 각종 음식을 보내도록 조치했다. 이러써 서양인들에게 잘보이고자 하였다. 그러나, 서양인들은 안에 독이 들었을지 몰라 감히 먹지를 못했다. 7월 25일 청나라 군대는 다시 대사관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두번째 사례로는 일본인들이 먹을 것이 부족하여 계란을 사고파는 작은 시장을 열었는데, 중국사병들은 계란을 소매에 숨겨와서 일본인들에게 팔곤 하였다. 지휘관이 이를 금하고 심지어 몇명을 죽이기까지 하였지만, 사병들은 계속 일본인들에게 계란을 팔았다. 그리고, 어떤 사병은 서양인으로부터 250위안을 받고, 천진까지 편지 심부름을 3번이나 해주었다.

 

적을 앞에 두고, 국가최고지도자는 수박을 보내고, 사병은 계란을 팔고 있었으니, 전투에서 지지 않았다면 이상한 일이다.

 

전투력이 저하된 군사지휘측면을 살펴보면,

 

첫째, 지휘가 제대로 되지 않았다.

 

청나라 조정의 내부에는 처음부터 화, 전 양파의 논쟁이 있었으므로, 전투를 개시하고도 최후까지 싸우겠다는 결심과 조치가 없었다. 6월 17일 천진의 대고구포대가 함락되기까지 계속 물러나면서 전투를 피하는 작전을 썼다. 6월 19일에 서태후가 주재한 어전회의에서 선전포고가 결정되고, 전선총지휘관 유록(裕祿)으로 하여금 서양병사를 막도록 하였다. 6월 21일에는 선전조서를 발표하고, 각성에 전투준비를 지시했다.

 

개전후에 유록은 소극적인 방어작전을 썼다. 먼저 천진의 대사관구역을 장악한 후 다시 대고구포대를 장악하려고 하였으나, 이 때 서양의 병사는 대고구포대를 통하여 속속 상륙했다. 그리하여 병력이 3천명에서 1만명으로 증원되었다. 결국 무위군 전군총지휘관 직예제독 섭사성이 7월 9일 전사하고, 천진은 7월 14일에 함락된다. 이 때도 청나라 군대는 계속 뒤로 물러나면서 직접 전투는 피하는 전술을 썼다.

 

20일이 경과한 후 팔국연합군은 군사회의를 세번 소집하고, 병력을 보충한 후, 8월 4일 1만6천명으로 늘어난 연합군은 북경으로 진격한다. 5일, 청나라군대의 방어선을 돌파한다. 6일부터는 사실상 청나라 군대는 저항을 포기하고 계속 후퇴만 하게 된다. 팔국연합군은 거의 저항없이 12일 통주를 점령하여, 북경성을 눈앞에 둔다. 팔국연합군은 통주에서 군량미와 무기를 상당히 많이 포획한다.

 

북경방어작전중 13일부터 전투가 개시된다. 14일 오후 2시경에 성문 하나가 함락된다. 이어서 서태후는 성을 버리고 중신들과 도망치고, 3만의 수비군은 일부가 호위하여 서쪽으로 가는 외에 나머지는 여전히 저항한다. 다른 두개의 문도 저녁에 열리고, 황궁수비군은 16일저녁늦게서야 황궁으로 철수한다.

 

둘째, 부대간의 보조가 맞지 않았다.

 

이 며칠동안의 전투에서 청나라군대는 보조가 전혀 맞지 않고, 각자 따로 싸웠다.

 

대고구포대전투에 있어서, 수비군은 2,3천명이 있었고, 대포는 신식으로 구비되어 있었다. 적군은 935명의 6개국으로 조성된 군대였다. 포격전에서는 먼저 팔국연합군의 배 6척을 부수는 등 전공이 있었다. 그러나, 수군에 어뢰정으로 공격해달라고 요청하고, 다른 부대의 지원을 요청했는데, 다른 부대에서는 전혀 도와주지 않았다. 이로써 대고구포대는 포탄이 떨어져 결국 함락되고 만다.

 

양촌방어전투에서도 청나라군대의 신임총지휘관인 이병형은 군대를 몰고와서 막 배치를 마쳤으나, 원래의 부대들이 그의 지휘를 듣지 않고, 임의로 진지를 정하거나 옮겨갔다. 이병형이 조정에 올린 글에서, 군사 수만이 방어를 하고 있으나, 적이 왔다는 말만 들리면 도망치기 바쁘고, 지휘를 전혀 듣지 않는다고 하고 있다.

 

이외에 북경, 천진방어전에서 청나라 총사령관 영록은 원세개가 보유한 무위우군으로 하여금 지원하도록 명령하였으나, 원세개는 느리게 이동하여 파견한 6영부대(약7천명)이 천진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연합군에 함락된 이후였다. 이후에도 북경으로 달려가지 않고, 팔국연합군과 싸우지도 않았다. 그리하여, 무위군중 전, 후, 중군은 전멸하고, 좌군은 마옥곤(馬玉琨)의 부대가 겨우 살아남았으나, 우군의 원세개의 부대는 전혀 손상이 없었고, 오히려 1만명에서 2만여명으로 늘어난다. 이후, 팔국연합군과의 협상이 종료되고 난 다음에, 원세개의 부대는 청나라 정규부대의 주축이 되고, 원세개는 중국의 병권과 권력을 한 손에 잡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