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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청 후기)

팔국연합군(八國聯合軍)내의 "중국군단(中國軍團)"

by 중은우시 2006. 11. 18.

 

 

 

북경에 진입했던 팔국연합군중에 영국인에 고용된 중국인군대 즉, "중국군단"이 있었다. 중국인으로 하여금 중국인을 치고, 자기 국가의 수도로 진격하게 하고, 자기의 황제와 황태후를 치게 하였다.

 

아편전쟁의 와중에 대담하게 몰려나와서 영국군인들을 구경하던 중국인들은, 노란머리 파란눈의 영국군대내에 대량의 잡색 피부를 가진 사람들이 섞여 있는 것을 발견했다. 이들은 몸에 입은 옷은 백인들과 비슷했으나, 머리에 두건을 감고 있었다. 그래서 머리가 아주 커보았다. 중국인들은 이들에게 "대두병(大頭兵)" 또는 "대두귀(大頭鬼)"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당시 중국사람들은 몰랐지만, 이들은 사실 영국군대내의 인도 시크교도 사병들이었다.

 

인도병사들이 가담함으로써, 전쟁구경을 나온 중국사람들은 안복(眼福)이 터졌다. 그들의 눈에는 서양귀신들이 아주 다양했던 것이다. 백이(白夷), 흑이(黑夷), 홍이(紅夷), 그리고 불흑불백지이(不黑不白之夷)등등. 아주 구경거리가 많았다. 중국인들은 이들을 보면서 한편으로는 민족적 자부심이 더 커졌다. 서양귀신들은 사람같지가 않고 짐승같다고 생각한 것이다. 인도사병의 두건은 아주 깊은 인상을 남겼다. 왜냐하면 두건의 대다수는 빨간색이었고, 높았으며 부풀어올라 있어서, 기록을 좋아하는 중국인들은 잊지않고 한마디를 남겨두었다. 나중에 상해조계에서 영국인들이 인도인을 순포(巡捕)로 사용하였는데, 상해인들은 이들을 "홍두아삼(紅頭阿三)"이라고 불렀다. 이 희극적인 명칭은 그들의 두건과 관련이 있었다.

 

머리를 감싸는 두건은 인도 시크교도의 풍속이고 교규(敎規)이다. 총명한 영국인들은 식민지인들로 하여금 그들의 상하의복은 바꾸게 하면서 두건은 그대로 용인했다. 누가 알았으랴. 이런 특별한 두건은 중국에 오자 그들은 2등양인이라는 표지가 외었고, 중국인들은 아주 싫어했다.

 

그러나, 시대는 항상 전진하는 것이다.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던 것은, 19세기말이 되면서 중국이 '조차'해준 산동성 위해의 영국인들은 그들의 영국에서의 경험을 중국으로 옮겨왔다. 그리하여 위해에 '중국군단'을 결성하였다. 이 군대의 복장은 인도의 시크교도병사와 같았다. 머리에도 큰 두건을 씌웠다. 어떤 사람들은 두건처럼 생긴 모자였다고도 한다.

 

사료기재에 의하면, "중국군단"은 훈련이 잘되었고, 장비도 우수했다고 한다. 장총부대, 포병부대, 기관총부대, 기병부대등 모든 것을 갖추고 있었다. 이 군대의 병사들은 대기는 중국에서 처음으로 Maxim기관총을 다뤄본 사람들이다. 이 군대가 남긴 옛 사진들을 보면 산동에서 온 젊은이들은 비록 머리에 두건을 쓴 것이 좀 괴상해 보이기는하지만, 군기가 엄정했고, 아주 생기있어 보인다. 심지어 오만한 기운까지 느껴진다. 비록 "중국군단"으로 칭해지기는 하지만 장교는 모두 영국인이다. 정렬해 있을 때 매 소대의 옆에는 모두 큰 모자를 쓴 영국장교가 서 있다.

 

식민자인 백인들은 손해보는 장사는 하지 않는다. 그들이 모집한 중국병들은 인도병을 모집할 때와 마찬가지로 싸움을 시키기 위한 것이다. 중국군단이 막 훈련을 마쳤을 때, 싸울 기회는 왔다. 중국에 의화단의 난이 일어난 것이다. 산동은 의화단의 발원지이다. 그러나, 위해부근에는 그다지 큰 활동이 없었다. 왜냐하면 "중국군단"이 진압했기 때문이다.

 

오래지 않아. 위해의 "중국군단"은 북상하여, 세이무어 연합군에 가입한다. 의화단과 싸웠을 뿐아니라, 중국의 정규부대와도싸웠고, 천진과 북경을 점령하는 전투에도 가담했다. 전해오는 말에 따르면, 이 중국인의 군대는 아주 잘 싸웠다고 한다. 천진을 진공하는 전투에서 특히 뛰어났다고 한다. 연속하여 몇개의 무기고를 점령했다. 전투후에 이 군대를 표창하기 위하여 영국인들은 특별히 설계된 천진성문 문양의 휘장을 주었고, 이것으로 "중국군단"의 휘기를 삼았다. 한 "중국군단"의 영국장교가 쓴 바에 의하면 "중국군단의 원정작전의 횟수는 다른 어느 부대보다 많았다. 위해위에서 출현한 골치거리를 해결한 것은 계산하지 않더라도, 천진전투에서도 전공이 있었고, 북경전투에서도 전공이 있었다."고 한다.

 

8국연합군에 참여한 "중국군단"은 모두 400여명이다. 북경을 진공한 연합군의 영국군대는 모두 3000명이었으므로, 중국인이 13%를 점했다. 연합군중 프랑스군대가 800명(월남병사위주), 오스트리아군 58명, 이탈리아군 53명이었다. 당시 중국군단은 인도병사들과 옷이 같았으므로 당시에 싸웠던 중국인들은 중국군단이라는 것을 느끼지 못했고, 계속 그들이 인도병인줄 알았다.

 

우리로 하여금 감탄하게 하는 식민자의 "이화제화(以華制華)"정책은 책략이 고명할 뿐아니라. 다시한번 중국인들이 반성해야할 점을 알려준다. 전통적인 충군애국의 관념은, 만청의 난세에,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했다. 동일한 지방에서 일부사람들은 서양인과 세불양립으로 싸우고, 서양인을 죽이자고 소리지르고 있는데, 비록 칼은 대부분 기독교를 믿는 중국인의 머리에 떨어지기는 했지만, 서양인에 대한 적대감은 분명했다. 다른 일부 사람들은 (기독교를 믿는 신도도 아니면서) 서양인들을 따라서 중국인을 죽이고, 황제와 태후를 죽이려고 덤벼들었다. 19세기말은 정말 난세였다.

 

마지막으로 한마디를 하면, 나중에 영국인들은 팔국연합군에 참여한 중국병사중 사망자들을 위하여 비석을 세워주었다. 이 중국부대는 진짜 있는 힘을 다하여 싸웠나보다 23명이 전사했다. 비문은 중문과 영문의 두 문자로 쓰여 있는데, 비석의 양식은 완전한 중국식이다. 중국정부가 의화단의 난때 죽은 독일공사 크린더를 위하여 세워준 패방과 마찬가지로 이것은 중국의....치욕이다.

 

(작자: 장명 중국인민대학 정치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