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2년 2월에 닉슨대통령이 중국을 역사적으로 방문한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닉슨은 확실히 현역 대통령 재임중에 중국을 방문한 최초의 대통령이다. 그런데, 청나라 말기에 이미 미국대통령 2명이 중국을 방문한 적이 있다는 것은 그리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한 사람은 퇴임한 후이고, 한 사람은 당선전이었다.
그란트 대통령
1877년 3월, 미국 제18대 대통령인 그란트는 2번에 걸쳐 대통령을 연임한 후 퇴임하였다. 퇴임 2개월후, 그는 부인 줄리아와 함께 세계여행을 떠났다. 유럽을 여행한 후 1879년(광서5년) 4월 7일, 그란트는 배를 타고 홍콩에 도착했다. 다시 광주로 갔고, 배로 상해, 천진까지 갔다.
당시 북양대신이던 이홍장은 그에게 연회를 베풀고 후하게 대접하였으며, 두 사람은 금방 가까워 졌다. 서양인들에 의하여 동양의 비스마르크로 불리우던 이홍장은 그란트 대통령에게 아주 자부심있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우리는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두 사람이다. 우리는 역사상 유명한 두 반군을 진압한 바 있다" 그란트는 일찌기 미국남북전쟁때 북부군의 사령관이었고, 이홍장은 태평천국의 난을 진압한 공신이다.
그란트가 북경에 왔을 때, 청나라 정부는 그에게 가장 높은 예우를 하여 8명이 메는 가마를 보냈다. 앞뒤로는 의장대가 북을 치고 나팔을 불며 길을 열고, 뒤에는 군대병사들이 늘어섰고, 길옆에는 긴 창을 든 병사들이 호위했다. 관리들은 등급에 따라 줄을 서서 맞이했다. 청나라 조정을 장악하고 있던 공친왕 혁흔도 그란트와 한번 회담을 했다.
당시 중국은 일본과 유구문제로 분쟁이 있어, 이홍장은 그란트에게 거중조정을 해줄 것을 부탁했고, 그란트는 즉석에서 응락했다. 중국에서 한달여를 머문 그란트는 5월 16일, 일본으로 같다. 일본정부는 중국과 직접 협상하기를 원했고, 제3국이 끼어드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그란트의 수행비서는 편지를 이홍장에게 서신을 보내어 일본측이 성의가 없어서 조정이 성공할 가능성이 적을 것이라는 서신을 보냈다. 그리고, 일본의 야심은 유구에 그치지 않은 것으로 보이며, 중국의 우환은 힘이 약한데 있으므로 중국이 하루빨리 스스로 강하게 되기를 권유했다.
증국번의 손녀사위였던 오영은 <<경자서수총당>>이라는 글에서 그란트의 중국방문시, 다이아몬드를 박은 지팡이를 짚고 왔는데, 이홍장은 이것을 보고는 아주 좋아하고 탐을 냈다. 이 지팡이는 엄지손가락만한 다이아몬드가 박혀 있고, 주위에는 작은 다이아몬드를 박은 것이었다. 그란트는 이홍장이 이것을 좋아하는 것을 보고는 통역을 통하여 "중당께서 이것을 좋아하시니 당연히 선물로 드려야겠지만, 이것은 내가 퇴임할 때, 전국각계에서 논의하여 만들어 선물한 것이므로 국민의 뜻이어서, 내가 사사로이 드리기기 힘들다. 귀국한 후, 여러 사람의 의견을 들어본 후 보내드리도록 하겠다" 이홍장은 즉시 사의를 표하며 "그러실 필요는 없습니다. 저는 그저 한번 가지고 놀아 보았을 뿐입니다"라고 하였다.
1896년 이홍장이 러시아의 니콜라이 2세의 즉위식에 축하사신으로 갔다가, 귀국하는 길에 미국을 들었다. 이때는 그란트가 사망한지 이미 10년이 된 때였다. 이홍장은 뉴욕의 그란트 묘원을 찾아가 조문하고, 미망인 쥴리아를 방문했다. 그란트 부인은 아주 기뻐하며, 이홍장을 위하여 연회를 베풀어주었다. 이 때, 그란트 부인은 "오늘 이선생께서 내방하셨는데, 여러분들이 제 남편에게 주신 지팡이를 이선생에게 드리면 어떻겠습니까"라고 말하고, 주위의 사람들이 모두 박수로 찬동했다. 그녀는 여러 사람들 앞에서 지팡이를 이홍장에게 주었다. 이홍장은 귀국후에 이 지팡이를 보배처럼 여기고 잠시도 몸에서 떨어뜨리지 않았다.
후버 대통령
미국 31대 대통령인 후버는 미국의 1930년대의 경제공황때 이를 극복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러나, 그의 젊었을 때의 중국에서의 독특한 경력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1897년, 22세의 스탠포드대학 지질학 학사인 후버는 런던에 본부를 둔 베이비크 모린 채광회사의 엔지니어로 채용되어,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일을 했다. 1년후 회사는 그를 중국으로 보냈다. 이 일로 돈을 많이 벌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후버는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여자친구인 스탠포드 지질학과 동창 루 헨리에게 전보를 보내어 구혼하고, 처의 신분으로 그와 함께 갈 것을 요청했다. 루는 전보를 보내어 받아들이겠다고 하였다. 후버는 즉시 미국으로 돌아가서 1899년 2월 10일, 캘리포니아의 집에서 결혼식을 거행했다.
이 젊은 부부는 신혼의 허니문도 거의 보내지 못하고, 가방에 중국역사와 문화에 관한 책을 집어넣고 1달의 긴 항해를 거쳐 천진항에 도착한다. 개평석탄광산의 총판인 장익의 독일국적 고문인 덕최림(아마도 디트리히의 중국번역어)의 지휘를 받아 후버는 장익의 기술고문이 된다. 동시에 직예열하광무국의 총공정사(수석엔지니어) 겸 청고항구건설공사의 감독이 된다.
1900년, 의화단의 난이 폭발한다. 덕최림은 장익이 상해에 피난한 기회를 이용하여, 비밀리에 베이비크 모린회사의 중국내 총대표인 후버와 협상하고, 계약을 체결하여 개평의 광업권을 모두 베이비크 모린 회사에 양도한다. 베이비크 모린은 다시 이를 영국상인들이 만든 동방신디카투자회사에 양도한다. 1900년말, 베이비크 모린, 동방신디카와 벨기에상인 차이스가 만든 개평광무유한공사는 개평석탄광산을 인수하고, 후버는 회사 사장이 된다.
1901년 후버는 아무 것도 모르는 장익과 협상을 벌여, '양도계약"을 작성한 후 장익에게 서명하게 한다. 무능한 장익은 놀라고 두려워했으나, 서양인들의 위세에 눌려 할 수없이 굴복한다. 그는 합작을 선택하면서 덕최림과 5만파운드의 보너스를 나눠가진다.
후버의 이런 자랑스럽지 못한 과거는 그의 정치생에에서 항상 오점으로 남았다. 1928년 대통령선거때, 정적들은 그를 깨끗하지 못한 사람으로 공격했다. 즉, 그가 중국에서 불법적인 수단을 활용하여 큰 돈을 벌었다는 것이다.
비록 후버부부는 천진에서 2년이 안되는 기간을 살았지만, 그들은 중국어를 배웠다. 나중에 백악관에서 후버부부는 자주 다른 사람들이 못알아듣게 중국어로 얘기하곤 했다. 후버는 1902년 중국을 떠났고, 26년후에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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